"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부족한 삶, 더 열심히 살겠다”

진주 시민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뒷배인 김장하 남성당한약방 원장(76)의 75번 째 생일을 맞은 지난 16일, 진주시민들은 경남과기대 아트홀에서 행사를 열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 시민들은 그간 김장하 원장이 해온 일들을 거론하며 그의 공로에 거듭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김 원장은 이에 “노력했지만 아직 부족한 삶”이라며 “남은 생을 좀 더 열심히 살겠다. 고맙다”고 말했다.

 

▲ 무대에 올라 감사의 말을 전하는 김장하 남성당한약방 원장

“재물은 쌓이면 구린내가 나고 뿌리면 향기가 난다”

김장하 원장의 말이다. 그는 지난 40년 간 진주에서 이 말을 실천해왔다. 진주에서 일어난 다양한 운동들, 그리고 현재 운영되고 있는 여러 단체들 가운데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 1984년 3월 명신고등학교를 개교시켰다. 그는 8년간 명신고등학교의 기틀을 닦은 뒤 1991년 9월 명신고를 국가에 기증했다. 그는 당시 명신고를 국가에 기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라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저 개인의 것일 수 없습니다.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입니다.”

 

▲ 김장하 원장의 도착을 기다리며 그의 여러 공로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민들

명신고등학교가 국가에 기증되던 1991년 명신고 1학년생이었던 최승제 씨는 “명신고에 입학하고 한 학기가 지나 학교가 사립에서 공립으로 바뀌었다. 김장하 이사장님께서 사립고등학교를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하셨기 때문”이라며 “그날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훗날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기억, 눈물 바다의 학교 강당”이라고 전했다.

김 원장은 진주지역 문화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그는 1994년 ‘진주가을문예’를 만들어 문학 신인들을 발굴해왔고, 이 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진주오광대 복원, 서적 <진주문화를 찾아서> 시리즈 발간에도 힘을 보탰다. 뿐만 아니라 진주지역 대표 극단인 ‘극단 현장’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진주오광대 예능보유자(경남도 무형문화재)이자 현 경남문화예술회관장인 강동옥 씨는 “민예총 행사할 때 밥값이 없고 하면 김장하 선생님께서 많이 지원을 해주셨다. 도움을 요청하면 말씀 없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돈 봉투를 건네고는 하셨다. 해외출장을 갈 때도 많은 지원을 주시곤 했는데 우리만이 아니라 많은 단체들이 도움을 받은 걸로 안다”고 했다.

극단 현장 관계자는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 김장하 선생님께서 전세금 3천만 원을 지원해주셨다. 5년 뒤 갚기로 했는데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5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리니 그건 당신들에게 준 돈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셔서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 무슨 행사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며 입장하는 김장하 원장

그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건네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젊은 시절 가난을 이유로 많이 배우지 못한 그는 그의 아픔을 젊은 세대들이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김장하 원장에게 장학금을 받았다는 문형배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맙다고 인사드리러 갔더니 자기에게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자신은 이 사회에 있는 걸 저에게 준 것 뿐이니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제가 우리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김 선생님의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진주가 없었다면 김장하 선생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데, 김장하 선생님이 없었다면 오늘의 진주도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말하는 중간 중간 눈물을 훔치며 김 원장에 대한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 원장은 이외에도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을 맡았으며, 마당극 전문극단 ‘큰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지금은 폐간된 옛 ‘진주신문’ 등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활동과 단체들을 적극 지원하는 데 힘써왔다.

이 때문인지 1990년 민선 진주시장 선거를 앞두고 지역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은 자체 투표를 거쳐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원장이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주지 않아 무산됐던 일화가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 인수위 시절 국무총리, 장관후보를 국민추천을 받아 뽑겠다는 정부 기조에 <내일신문>은 김 원장을 소개하며 “이런 사람이 국무총리가 돼야 한다”고 보도한 적도 있다.

 

▲ 생일 케익을 자르는 김장하 원장

이날 행사에는 지역에서 다방면의 활동을 하는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상경 경상대 총장, 정대균 MBC경남 사장, 김중섭·장만호 경상대 교수, 서소연 더불어민주당 진주(을) 지역위원장, 류재수·서은애·서정인 진주시의원, 김석봉 전 진주환경운동연합 대표, 전민규 전 극단 큰들 대표, 갈상돈 진주혁신포럼 대표 등이다.

특히 이날은 김장하 원장의 75번째 생일이기도 했기에 다양한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노래패 맥박의 노래, 극단 큰들 합창과 율동, 전지원 양의 판소리 등이다. 참석자들은 모두 함께 김 원장의 생일을 축하하고 케익과 차, 꽃다발 등을 건넸다. 또한 “김장하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노래 <만남>을 합창하기도 했다.

 

▲ 행사 후 단체 사진, 이날 행사에는 백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했다.

한편 이날 행사는 극비리에 추진됐다. 김장하 원장이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많은 선행에도 불구, 그는 일반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 원장은 이날 “무슨 행사인 줄도 모르고 가보자고 해 얼떨결에 끌려왔다”며 행사장에 들어와서도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런 자리가 되고 보니 김수업, 박노정 두 분 생각이 더 난다.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부족한 삶이다. 남은 생 좀 더 열심히 살겠다. 고맙다”고 전했다.

김 원장이 언급한 김수업, 박노정 두 사람은 김장하 원장과 함께 진주의 원로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지난 해 세상을 떠났다. 행사에 참석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진주에 존경받는 어르신들 가운데 김장하, 리영달 선생님만이 남으셨다. 김수업, 박노정 두 분이 살아계실 때 이런 자리가 마련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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