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진주역사, 문화 위해 도움 손길 내민
김장하 선생의 남성당한약방,
31일 마지막 영업, 50년 역사 정리

진주시 동성동에 위치한 남성당한약방(1973~2021.5.31), 김장하 선생은 이곳에서 값싼 가격에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로 인해 얻은 수익금을 대부분을 지역에 환원했다.
진주시 동성동에 위치한 남성당한약방(1973~2022.5.31), 김장하 선생은 이곳에서 값싼 가격에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로 인해 얻은 수익금을 대부분을 지역에 환원했다.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한평생 이 말을 실천해온 김장하 선생(78)이 31일 남성당한약방 문을 닫는다. 50여 년 가까이 진주시민들의 든든한 후원처였던 한약방이 지역사회 곳곳에 발자취를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셈이다.

김장하 선생과 남성당한약방은 문화, 역사, 언론 등 지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던 이들을 오랜 기간 후원해왔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김장하 선생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이 같은 후원들을 이어왔고,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는 걸 알리기조차 꺼린다. 그럼에도 숱한 선행은 숨겨지지 않고 전해져 온다.

김장하 선생의 조건 없는 후원에는 그의 유년시절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1944년 사천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집안 탓에 중학교 졸업 후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사천의 한약방에 취업했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해 19세에 당시 최연소로 한약종사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1963년 사천 용현면에 한약방을 열었고, 1973년 진주시 장대동으로 한약방을 옮겼다가, 곧 현재 남성당 한약방이 위치한 진주시 동성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장하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기간 진주시민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10여년 간 옛 진주신문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언론을 뒤에서 돌봤다. 진주문화연구소,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진주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힘썼다. 두 단체는 진주가을문예를 27년 간 운영하며 지역작가를 발굴했고,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시리즈 책자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렸다.

김장하 선생은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결성을 주도해 2004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시민후원금으로 건립된 형평운동기념탑 조성에도 한 몫 했다. 1984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명신고등학교를 연 뒤, 1991년 국가에 헌납한 것도 잘 알려진 사건이다. 지난해 12월에는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기금 34억 5000만 원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하기도 했다.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김장하 선생은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줬다. 뿐만 아니라 극단현장이 현재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이 닿았다.

그는 시민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지리산살리기 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의장과 상임의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등을 맡아 진주와 지리산 지역의 생명 및 환경 보존 활동을 벌이며 후세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기여했다. 이 밖에도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많은 일을 하고, 도움을 주면서도 그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일평생 자가용 한 번 가져본 적 없고, 해외여행 또한 다닌 적이 없다. 평생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여행이라고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한 게 전부라고 알려져 있다. 6.25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형이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고서다.

김장하 선생은 언론과 정치권을 멀리하기로도 유명하다. 언론 인터뷰는 극구 사양하며, 정치와도 거리를 둔다. 1990년대 진주시장 선거를 앞두고 지역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하기로 했을 때, 몸을 숨긴 일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장하 선생을 찾아와 ‘정치인에게 훈수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런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2019년 그의 생일날,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했던 말 속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김장하 선생에게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1986년 사법시험을 합격했고,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역임한 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그가 이날 전한 이야기는 1986년 무렵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있었던 일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맙다고 인사드리러 갔더니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자신은 이 사회에 있는 걸 저에게 준 것 뿐이니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다. 제가 우리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김 선생님의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민은 30일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김장하 선생님을 본받은 '작은 김장하'가 지역에 많아졌으면..”

(2부에서 계속..) 단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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