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6월항쟁 돌아보는 ‘1987 진주 6월 민주항쟁의 길을 따라’ 열려

[단디뉴스=김순종 이은상 기자]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분노의 시대였다. 호헌조치 이후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터져 나왔다. 자연스레 길거리 투쟁이 시작됐다. 당시 시청과 경찰서를 접수하면 민주화가 될 줄 알았으니 미숙하긴 했다. 항쟁 후 군부정권(노태우)이 이어졌지만,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김임섭 씨는 이같이 말했다. 7일 오전 열린 ‘1987 진주 6월 민주항쟁의 길을 따라’에서다. 이날 시민 200여 명은 6월 민주항쟁 진주사(史)를 돌아보는 자리에 함께했다. 행사는 6월 민주항쟁 관련 영상 시청과, 구도심 6월항쟁 주요거점 순회, 사진전 및 부대행사로 구성됐다.

진주는 1987년 6월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6월 14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 해산으로 민주화 시위가 주춤하던 때 민주화 시위의 불씨를 살렸다. 87년 6월 17일 시위대는 남해고속도로 등을 점거했고, LPG 운반 트럭을 탈취해 시위에 나섰다. 이날 시위는 ‘서울지’ 1면과 외신에 실리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 7일 행사에서 1987년 진주 6월항쟁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임섭 해설가.

 

▲ 진주 구도심 지역을 걸으며 6월항쟁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 아이

7일 열린 행사는 이 같은 진주지역 6월 민주항쟁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당시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회원들이 다수 참여했으며, 이들은 시민들에게 1987년 당시의 기억을 전하는 해설가로 나섰다. 시민들은 오래 전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6월항쟁 진주사(史)를 돌아봤다.

9시40분께 시작된 행사는 6월항쟁 동영상 시청과 조창래 진주참여연대 대표의 진주 6월항쟁 설명에 이어, 진주 6월항쟁 주요거점을 8명의 해설가와 함께 순회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단디뉴스>는 이날 6월 민주항쟁에 직접 참여한 김임섭(5조), 권재성(4조) 해설가를 따라 시민들 틈 속에서 진주 6월항쟁 주요거점을 돌았다.

 

▲ 이날 기자와 함께한 6월항쟁 주요노선 걷기 5조 사람들

김 해설가와 함께한 진주 구도심 6월 민주항쟁 순회 노선은 진주경찰서,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롯데인벤스 아파트(옛 진주MBC), 옛 수정파출소(현 청명 인테리어), 옥봉성당, 옛 진주호텔(현 하연옥), 옛 중앙파출소(현 폰 옥션), 옛 진주시청(현 청소년수련관) 등이었다. 김 해설가는 이곳이 6월 민주항쟁 당시 의미 있는 장소였다고 설명했다.

김 해설가는 이날 87년의 기억을 회상하며 해설을 시작했다. 그는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자리가 예전에는 주요 시위가 시작되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지리산 결사대’라고 있었다. 화염병을 숨겨뒀다가 호각소리에 맞춰 시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상업은행서 시작된 시위는 대체로 큰 규모의 시위였다”고 전했다.

롯데인벤스 아파트는 옛 진주MBC로, 1987년 당시 언론불신이 극에 달해 이곳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과격한 시위가 벌어지고는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왜곡보도가 심해 기자를 구타하거나 카메라를 박살내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MBC에도 괜찮은 노조가 있었는데, 우리 때문에 그들이 피해를 입은 것도 같다”고 전했다.

 

▲ 부대행사로 마련된 6월항쟁 퀴즈에 참석한 아이

그는 옥봉성당이 광주항쟁과 관련된 영상을 보여주던 교육장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광주항쟁을 잘 모르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관련 영상을 보며 의식이 각성되고는 했고, 이 때문에 경찰이 성당 진입을 막아서기도 했다는 것. 그는 한 신부님의 도움으로 옥봉성당이 교육장 역할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6월항쟁 당시 경찰서를 파괴하는 사례가 잦았다며, 그 이유는 “경찰서를 탈취하고, 시청을 접수하면 우리 세상이 될 줄 알았던 마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특히 진주교 쪽에 있던 중앙파출소가 자주 파괴됐다고 했다. 시청이 있던 청소년수련관은 시위가 최고조로 올랐던 때 발 디딜 틈 없이 큰 시위가 벌어진 곳이라고 했다.

 

▲ 부대행사인 캘리그라피에 참여한 아이.

권재성 해설가가 이끈 3조도 비슷한 노선을 따라 걸었다. 권 해설가는 이날 경상대 학보사 편집권 침해로 시작된 1987년 4월 경상대 총장실 점거사건이 6월 민주항쟁의 동력이 됐다고 했다. 당시 총장실 점거에 참여한 학생들이 민주항쟁을 주도했다는 것. 이 팀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 항쟁 당시의 구호를 따라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시민 이갑순 씨는 “평소 무심하게 지나치던 길에 이렇게 많은 역사가 있었다니, 놀랍다”며 “진주시민이라면 참여해볼 만한 뜻 깊은 행사였다”고 말했다. 이솔 씨는 “진주 6월항쟁의 기억을 당시 참여했던 시민의 입으로 전해 들을 수 있어 생생했다”고 전했다.

부대행사로 진행된 6월항쟁 사진전, 6월항쟁 퀴즈 맞추기, 캘리그라피, 수제공책 만들기에도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행사는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과 ‘단디뉴스’가 주최하고, 경남도가 후원했다. 후속행사로 경상대 6월항쟁 표지석 제막식이 준비 중에 있다.

 

▲ 7일 행사에 참석해 6월항쟁 관련 영상을 시청 중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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