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3일 호헌조치 발표부터 6월16일까지의 기록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같은 일을 할 거야.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싸운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려움 없이.” 1987년 경상대학교에서 6월 항쟁을 주도한 최익호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6월 항쟁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의 발판 위에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고, 시민들은 참정권을 돌려받았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그 뜨거웠던 역사의 여름, 경상대학교 학생들은 전국 어느 곳보다 격렬하게 6월 항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해 여름, 경상대학교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호헌’조치 발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이 강력히 주장해온 직선제로의 개헌을 무시한 것이다. 경상대학교 학생들은 다음날인 14일 정권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천5백여 명이 참석한 이날 시위에서 경상대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학생들은 민주광장에서 4.19 혁명 기념식을 치른 후 교외 진출을 시도하며 경상대 정문에서 경찰과 5시간 가량 대립했다.

15일 경상대 총여학생회 주최로 경상대 민주광장에서는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학생들은 진주지역 운동사와 광주항쟁, 4.19혁명 등에 대해 토론회를 벌였다. 18일에는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김영식 신부 초청강연회 등이 열렸고 19일에는 또 다시 5백여 명의 학생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요구하며 교외 진출을 시도했다. 이날 7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자 나머지 학생들은 학교 도서관을 점거하고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틀 후 연행된 학생들이 석방되자 이들은 해산했다.

4월부터 5월, 두 달간 진행된 산발적인 시위들은 6월 일어날 대규모 시위의 전조였다.

 

▲ 1987년 6월15일 진주시청 앞(현 청소년 수련관)에서 독재자 화형식을 가지고 있는 시위대 (사진 =서부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약사, 진홍근)

10일, 6월 항쟁의 깃발을 치켜들다.

1982년부터 학내 학습 모임 등이 만들어졌지만 6월 당시 경상대학교는 학생운동권 세력이 약한 편에 속했다. 총학생회장 역시 비운동권 출신이었다. 이에 6월 초 경상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은 경남대 창원대 학생들과 경상대 교양학관에서 만나 6월 10일 마산에서 대규모 연합집회를 열기로 계획한다.

시간이 흘러 6월9일 경상대학교 학생운동 주축 세력 백여 명은 이 약속을 지키고자 마산으로 넘어간다. 이들은 이날 낮 경남대에서 사전집회를 연 뒤 10일 오후 6시 마산어시장에서 대오를 짜 진격하기 시작한다. 사전집회 당시 학생들은 학내에 들어온 안기부 직원을 잡아 조사한 뒤 풀어주는 거침 없는 모습도 보인다.

오후 6시 마산 어시장 집회의 선두에는 운동권 핵심 세력들이 섰다. 이들은 ‘독재 타도’, ‘호헌 철폐’ 등을 외치며 유인물을 뿌리고 경찰과 대립했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이들은 코아 백화점 쪽으로 진출했고, 이때 시위대 주위에 상당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경찰차 1대에 불을 질렀다.

이날 시위는 마산 공설운동장 앞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마산 공설운동장에서는 우리나라와 이집트의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시위대는 이곳에서 경찰과 대립했다. 경찰이 쏴댄 최루탄이 마침 불어온 동남풍에 의해 축구경기장 안으로 스며들었고, 축구경기는 중단됐다. 최루탄 냄새에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쳐부수자 민정당. 때려잡자 전두환’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당시 이곳에 있었던 최익호 씨는 학생들보다 더 강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며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이후 마산 오동동 쪽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양덕파출소를 부수고,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이던 우병규 사무실로 향했다. 그들은 우병규 사무실의 전두환 액자를 끄집어내 사진을 찢고 불태웠다. 사무실은 순식간에 전소됐다. 이들은 또 북마산·오동동 사무소를 파괴했다. 시청 유리창 70여장이 시위 과정에서 깨졌고, MBC 건물에는 화염병이 던져졌다. 경찰버스 차량도 4대 전소됐다.

이들은 이날 23시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이날 밤 경상대학교로 다시 넘어왔다. 경상대학교에서 다시 세를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진주 경상대 민주광장에서는 규탄대회가 열렸고, 일부 학생들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13시30분부터 20시까지 경상대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했다.

 

▲ 1987년 6월15일 학생과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서부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약사, 진홍근)

11일~14일, 다시 진주에서..

11일 진주로 돌아온 학생운동권 중심세력은 각 단대 회장들을 만나 시위 동참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단대 회장들은 이에 동의했다. 8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후배들에게 기록을 남겨주자는 말에 동의를 표한 셈이다.

12일 학생 3천여 명은 민주광장에 모여 ‘호헌 철폐와 대한 민주화를 위한 개척인 전진대회’를 열었다. 경상대 총학생회 주최였다. 학생들은 이날 경상대신문사(학보사)의 자율화를 요구하며 총장실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학생들이 잠겨있는 총장실 문을 부수는 사이 총장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날부터 백50여명의 학생들은 총장실에서 학보사 자율화를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14일 학교 측은 편집자율권 보장, 편집국장제 철폐, 내년도 예산증액을 골자로 하는 ‘신문사 편집자율권쟁취 합의 요구사항’에 서약했다. 학생들은 자신이 요구안이 받아들여지자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15일,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다.

15일에는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9시 단과대학별로 집결한 학생들은 시국토론을 통해 수업과 시험의 전면 거부를 결의하고 학생들에게 시위 동참을 요구했다. 이들은 민주광장에서 독재타도 및 호헌철폐를 위한 개척인 출정식을 마치고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공대생 백50명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나서 전경과 대치하는 틈에 다른 학생들은 경상대 후문을 통해 개양 검문소를 통과해 시내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들었다.

11시20분 쯤 구 진주역 사거리에 도착한 천여 명의 시위대는 약식 집회를 가졌다. 진주교를 넘어 진주시내로 진출할 때 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확대됐다. 그 수가 3천여 명에 달했다. 이후 학생들은 진주시청(현 청소년 수련관)에 집결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결의문을 낭독했다. 많은 시민들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호응하고 시위대열에 가담했다.

12시 30분 쯤 학생들은 시위대를 3개로 나누어 다른 대학의 학생들 및 시민들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1시위대는 진주보건대에 동참을 호소하러 갔다. 2시위대는 13시 경 북부파출소를 부순 뒤 진주교육대학에 진입해 동참을 호소했다. 13시30분경에는 KBS방송국에서 ‘관제언론 타도하고 민주언론 쟁취하자’는 구호를 제창하고 KBS기와 새마을기를 소각했다. 3시위대는 MBC방송국(현 롯데인벤스)에 도착해 민주언론쟁취를 선언한 뒤 시외터미널을 돌아 다시 시청 앞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3개 시위대는 재결합했다.

시청에 다시 모인 시위대는 ‘진주시민에게 드리는 글’,‘공동성명서’ 등을 발표했다. 이들은 여기서 “이미 민주화는 대세지만 군부독재정권과 미제국주의가 물러가지 않는 한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는 요원할 수 밖에 없다”며 “오늘의 애국민주투쟁으로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자”고 결의했다.

16시30분쯤 독재자 화형식을 가진 시위대는 시외버스터미널, MBC방송국, 봉곡 로터리, 인사동 로터리를 돌며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17시35분 경 시위대가 민정당사에 도착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대치했다. 18시 중앙로타리(현 중앙약국 사거리)에 재집결한 시위대는 약식집회를 열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시위대에 동참하며 즉석연설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19시 시위대는 중앙로터리, 진주교, 진주역, 진양교를 거쳐 상평공단으로 진출해 노동자들과 결합을 시도한다. 하지만 경찰은 거세게 저항한다. 이에 시위대는 다시 고려병원 앞으로 돌아와 다음 날 12시 경 중앙로터리에서 모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한다.

 

▲ 1987년 6월15일 진주시청 앞(현 청소년 수련관)에 모인 시민과 학생들 (사진 =서부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약사, 진홍근)

16일, 다시 집결하지만 경찰의 과잉진압에 부딪혀

16일 경찰은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집결하기로 한 중앙로터리를 원천봉쇄했다. 학생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시위대를 조직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 간부 2인을 포함한 50여 명의 학생들이 연행됐다. 경찰은 이날 사복경찰을 동원, 폭력을 사용하며 학생들의 시위를 강하게 진압했다.

12시 10분 쯤 학생들은 장대동 동명극장 쪽에서 다시 시위대를 조직해 중앙로터리 쪽으로 밀고 올라왔다. 중앙파출소 앞에서 학생들은 경찰과 대치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학생들을 폭행하고 연행했다. 이날 학생들을 폭행한 경찰들 중에는 사복경찰관들이 있었다.

같은 시간 인문대학생들이 중앙로타리에서 연좌시위를 하자 전경들은 이들을 덮쳤다. 일부학생들이 지하상가 공사장에 추락해 중상을 입었다. 일부 군중들이 학생 시위대에 참가하며 이들은 중앙로터리 일대를 점거하나 집회를 완료할 만한 안정적인 공간과 시간은 확보하지 못한다.

13시 10분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은 경찰에 밀려 옥봉동 쪽으로 후퇴한다. 칠암캠퍼스에 집결했던 학생들도 시내로 진출하던 중 진주교 위에서 경찰들과 대치한다. 경찰의 강력한 시위 진압에 학생들은 15일처럼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 한다. 경찰은 전날(15일) 학생들이 진주 곳곳을 누비며 해방군처럼 행동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날 강력한 진압을 시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14시 10분 학생들은 역전 파출소 부근에서 다시 시위대를 조직한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도로에 모여 역전파출소를 불태운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시위가 역전 파출소 부근에서 하나로 결집하자 이들은 약식집회를 진행한다. 이들은 ‘진주시민들게 드리는 글’이라는 새로운 유인물을 배포하고, 그 과정에서 화염병 제작을 위한 성금 10여만 원이 모인다.

16시 20분 경찰들은 직격탄을 발사하며 역전에 모인 학생들을 밀어붙인다. 학생들은 후퇴하며 호국보훈의 달 광고탑에 불을 지른 뒤 칠암동 교정과 가좌동 캠퍼스로 후퇴한다. 가좌동 방향으로 일방 후퇴할 경우 그 거리가 멀어 시위에 동참한 시민들이 분산될 것을 염려해서다.

시위대는 가좌동 캠퍼스로 후퇴하며 개양검문소, 한국도로공사 진주지사 경비실, 정촌파출소를 습격해 전소한다. 특히 도로공사는 학생시위 때마다 경찰병력이 주둔하던 곳으로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학교로 돌아와 학생회관 3층 라운지에서 연행된 학생과 시민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인다. 한편 칠암동 캠퍼스로 후퇴한 학생들은 문화행사와 토론, 간단한 평가회를 가진 뒤 다음 날 투쟁을 약속하고 해산한다.

이들은 이날 경찰의 강력한 진압을 겪으며 가두시위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다음 날 고속도로를 점거할 것을 계획한다. 다음 날 이들은 11톤 짜리 LPG 수송차량 2대를 징발하는 등 전국 6월항쟁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장면을 연출했다. (계속)

* 이 기사는 진홍근 씨가 쓴 서부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약사와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가 쓴 '80년대 경남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가제)', 그리고 1987년 경상대학교 6월항쟁을 주도한 진홍근, 최익호 씨의 증언에 기초해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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