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987년 6월 항쟁 당시 경상대 호헌철폐 독재타도 특위위원장 최익호

청년을 닮은 6월은 푸르고 뜨겁다. 31년 전인 1987년, 경남 진주는 오늘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경상대 학생들을 필두로 한 6월 항쟁 때문이다.

6월 항쟁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직접 선거’를 달성케 한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지금이야 시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우리를 대리할 정치인들을 선출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았고, 1987년 이 같은 내용이 깃든 헌법을 수호할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6월 경남 진주를 비롯한 전국의 시민들은 '한 표' 행사할 권리를 달라며 일어났다. 6월 항쟁이다.

<단디뉴스>는 27일 1987년 당시 경상대학교에서 일어난 6월 항쟁을 주도한 최익호 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1987년 6월 경상대학교 호헌철폐 독재타도 특위위원장이었고, 1988년 경상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지난번 인터뷰한 진홍근 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6월 항쟁에 대한 계획 전반을 짰다면 최익호 씨는 각 시위에 앞장 서 6월 항쟁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 인터뷰 중인 최익호 씨

- 6월 항쟁 당시 경상대학교는 어떠한 분위기였나?

“6월 항쟁 당시 경상대학교는 사실 학생운동 세력이 약했다. 경남대나 창원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열악한 힘을 한 곳에 집중해 터트리고자 했다. 경상대학교 총학생회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특위위원장을 맡았다. 6월 항쟁의 시작은 6월 10일 경남대에서 집결해 연합집회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 6월 10일 경상대 학생 100여 명이 마산으로 넘어갔던 기록이 있다.

“6월 10일 경남대에서 연합집회를 했다. 그날 낮에 경남대에서 사전집회를 했다. 당시 안기부 차량이 학내에 들어왔더라. 안기부 직원을 우리가 잡았다. 당시 나는 연단에 오르고 하다 보니 뒷얘기는 잘 모르는데 그때 안기부 직원을 잡아 학생들이 조사한 뒤 풀어준 바 있다..”

- 학생들이 안기부 직원을?

“그랬다.(웃음) 그 다음에 마산어시장으로 진출했다. 당시 우리에겐 가두시위 경험이 많지 않았다. 6시 경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스크럼을 짰다. 제일 앞에 선 사람들은 신분이 100% 보장된 사람들이었다. 소위 운동권 선수들. 이들이 스크럼을 짜 뛰어 나가면서 시위가 시작됐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면서. 뛰는 데 지나가는 시민들의 눈빛을 보니 분위기가 다르더라. 시민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다. 뭔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그런 눈빛.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지나가는 차들은 ‘빵빵’거리며 호응해줬다. 그 몇 분 사이 세상이 바뀔 것을 짐작했다."

- 그 날 어디까지 학생들이 행진을 이어갔나?

“스크럼을 짜 공설운동장까지 진출했다. 그날 대한민국 대 이집트 축구경기가 있었다. 우리가 그 앞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경찰들이 우리를 보고 최루탄을 쐈는데 남동풍이 불었다. 삼국지 적벽대전의 남동풍 같은. 그러다보니 최루탄이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나라 선수들은 콜록거리고, 이집트 선수들은 그냥 바닥에 누웠다더라. 그러다보니 관중들이 밖으로 나오게 됐는데 곧바로 우리와 합류했다. 우리는 그 당시 '군사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이런 구호를 외쳤는데 시민들은 '쳐부수자 민정당 때려잡자 전두환' 이런 구호들을 외치더라.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이후는?

“오동동 쪽으로 진출했다.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 우병규 사무실이 그곳에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에 전두환 액자가 있길래 내가 끄집어내렸다. 사진을 찢으니 밑에서 군중들이 불을 질러라고 외치더라. 그래서 라이터를 켜 불을 질렀더니 순식간에 사무실이 전소됐다.. 그날 11시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철수한 뒤 나는 진주로 넘어왔다.”

- 진주로 와서는 무얼 했나?

“단과대 학생회장들을 만났다. 그 당시 학생회장들 대부분이 운동권이 아니었다. 학생회장들을 만나서 이 시기에 경상대학교가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80년대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후배들에게 남기자고 설득했다. 동의하더라. 이틀 뒤인가?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개양파출소를 뚫고 진주시청까지 나갔다. 거기서 연설을 하고. 마무리 집회를 진주역 앞에서 했다. 주머니를 보니 돈이 백만 원 가까이 있더라. 시민들이 응원해주면서 주머니에 넣어준 돈이다. 이 돈으로 휘발유를 사서 화염병을 만들고 그랬다.(웃음)”

- 기록에 보면 15일, 16일 가두시위를 하고 17일 고속도로를 점거, LPG 차량을 탈취한 걸로 나온다. 12일은 총장실 점거하면서 학보사 자율화를 요구한 것으로 나오고.

“총장실은 6월 항쟁 전에 기성회비 공개하라면서 점거했던 것 같은데, 오래된 일이라 조금 헷갈린다. 아마 기록이 맞을 거다.”

- 가두시위를 하다가 고속도로를 점거했다.

“맞다. 가두시위를 하다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고속도로 점거까지 하게 됐다. 그 당시 진주시위의 의의가 나는 거기 있다고 본다. 국민운동본부가 당시 명동성당에서 비폭력 평화시위를 부르짖을 때 우리는 비폭력 평화시위만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지금도 전대협에서 나는 전대협 지휘를 받지 않은 의장으로 질타를 받곤 한다.(웃음) 과격하게 시위를 이끌었다는 이유다. 하지만 6월 항쟁 당시 새로운 국면을 만든 게 진주라는 평가도 듣는다.”

 

▲ 경상대 학생들이 LPG차량을 탈취했다는 당시의 언론 보도

- 고속도로 점거 당시 LPG차량을 탈취했는데, 원래 계획은 아니었다고?

“맞다. 계획은 아니었다. 백골단에게 포위되면서 그 돌파구를 찾고자 LPG차량을 탈취한 거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잠시 사용하자고 설득해서(웃음)..”

- 이 때문에 경찰들이 철수했던 거 아닌가.

“그렇다. 그 당시 나는 교문 앞에서 집회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LPG차량 두 대가 들어오더라. 횃불을 들고. 교문 앞에 오니까 학생들이 진주시청으로 가자고 하더라. 진주시청으로 가는 도중 개양 검문소에서 경찰들에 의해 해산됐다.”

- LPG차량이 있는데도?

“직격탄이 날라왔다. 처음에는 LPG차량이 폭파하면 반경 10KM가 전소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경찰 쪽이 LPG차량이 쉽게 폭발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최루탄을 쏴댔다. 개양검문소에서 경찰이 직격탄을 쏘니까 학생들이 학내로 다 도망가고 그랬다.”

- LPG차량 탈취사건은 조선일보 등에도 나온 유명한 사건이다.

“그렇다. 조선일보, 중앙일보를 비롯해 뉴욕타임스에도 다 나왔다. 외국신문에 나온 내용이 그 당시 학교에 대자보로 붙고 그랬다.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그런 사건이었으니.. 당시 내가 외쳤던 구호가 그런 거였다. 이 독재정권에서 살아봤자 징역이고 죽어봐야 교수형이다. 이런 살벌한 구호도 외쳤으니 분위기가 짐작될 거다.”

 

▲ 경상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선 최익호 씨의 선거 포스터. 그는 1988년 경상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사진=최익호)

- 총학생회장은 언제 한건가?

“1988년이다. 수배생활을 하면서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그래서 총학생회장을 얼마 하지 못 했다.”

- 1987년 6월 당시 총학생회장은 누구였나?

“송삼수라고 비운동권이었다. 다른 학교는 보통 총학생회장이 시위를 주도했는데 우리는 그게 안 되니 투쟁특위를 만들어 집회를 주도했다.”

- 1988년 수배가 됐다고 했는데 수배는 왜 떨어진건가?

“수배는 1986년에. 86년도에 화염병 던지고 하다가 수배됐다. 그러다가 88년 4월에 구속됐다. 구속됐지만 오래 살지 않았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면회를 오고 그랬다. 한달 반? 그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구속된 것은 열차방화사건 때문이다.”

- 열차방화사건은 무엇인가?

“(해당 기사를 보여주며) 88년도 4월은 총선 기간이었다. 4월2일 백기완 선생 초청강연회를 칠암동에서 했다. 허남호 당시 경찰서장이 경찰의 학내진입을 허가했다. 이날 초청강연회와 함께 농축산물 수입개방 반대 투쟁을 했다. 통일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백기완 선생과 내가 연설하고 가두시위를 위한 스크럼을 짜기 전에 경찰이 학내에 진입했다. 그 과정에서 지하주차장 내려가는 길에 학생들이 떨어져 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우리는 경상대학병원으로 들어가 점거농성을 했다. 협상을 했다. 학교 스쿨버스가 우리를 태워 학교 총장실로 갔다. 4월4일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몇 천명이 모여 규탄 시위를 했다. 나는 정문 앞에서 시위했다. 열차 길은 고지다. 학생들이 처음에 고지를 점령했다. 짱돌도 던지고. 그 와중에 기차가 지나가다가 학생들이 보이니 기차를 세웠다. 학생들은 밑으로 내려가고 승객들은 다 탈출했다. 그 기차에 전경들이 올라와 최루탄을 쏴댔다. 그걸 보고 학생 가운데 한 명이 화염병을 기차에 던졌다. 화염병 하나 들어갔는데 불이 활활 나더라."

- 열차방화사건 이후 언제 구속된 건가?

“이후 동명극장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됐다.”

- 구속된 후 처벌은 어떻게 받았나?

“여소야대 정국이 돼서 87년 6월 이전 수배 건은 다 말소됐다. 유일하게 문제된 게 열차방화사건이다. 수사당국이 불을 누가 질렸냐고 해서 내가 질렀다고 했다. 그러니까 당일 경상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하던 사진을 내밀며 언제 불을 질렸냐고 묻더라. 계속 내가 불을 질렀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입증이 안 되니 한 달 보름 정도 만에 풀려났다. 재판도 안 열리고 조사만 실컷 받았다. 기소유예로 나왔던 것 같다.”

- 그 과정에서 폭력이나 고문은 없었나?

“그런 건 없었다. 진홍근 씨 같은 경우는 언더 세력 쪽 사람이니 당할 수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오픈 세력 쪽은 상처 하나만 있어도 문제가 되니 협박 정도만 했다. 그 이전에 박종철 사건도 있었고 하니. 함부로 못 했다.”

- 대학 졸업은 언제 했나?

“89년 여름에 했다.”

- 학번과 학과는?

“83학번이고 축산·낙농. 남북경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전공 살려서 북한에 가 양돈을 해볼까 싶다. 동포들 단백질 섭취에 도움 좀 줄려고(웃음)”

 

▲ 1991년 경남도의원 선거에 나섰던 최익호 씨의 선거 포스터(사진 = 선관위)

-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왔나?

“졸업하고 나서 민청, 연청 쪽 일을 봤다. 그러다가 첫 지자체 1기 도의원으로 출마했다. 꼬마민주당을 달고 나갔다. 2등해서 낙선했다. 표는 좀 얻었는데.. 선거하면서 선거문화에 너무 실망했다. 돈이나 밥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심지어 유권자에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여러분의 심부름꾼, 머슴이 되려 나왔는데 밥을 사달라거나 돈을 달라해서 되냐고. 이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같이 정치하자고 여러번 찾아왔다. 휴가 때 삼천포를 찾아와 같이 놀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특별한 사이였다. 1주기 추모제 때 딸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까.”

- 그 이후에는?

“마도로스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1993년부터 배를 조금씩 모아서 1995년 쯤 사업을 시작했다. 운이 없을려니 얼마 안 돼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남해에서 좌초했다. 온 바다에 기름이 떠다녔다. 그 당시 10억 가까이 투자해 사업을 시작했는데 7~8개월 바다에 기름이 떠다니고 고기가 없어지고 하니 사업이 망해버렸다. 10억도 내 돈이 아니라 빌린 돈이 많았는데.. 그 이후에는 특정한 직업이 없이 살았다. 그러다가 뱃사람들이 해경들한테 무시받는 측면이 있는 걸 보고 낚시어선연대 전국 집행위원장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낚시어선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일을 해냈다. 면세유나 무인도 하선에 관련된 이런 문제들. 지금도 낚시어선 운영하는 사람들이 나를 잘 안다.”

- 김근태 전 장관의 특보를 역임하기도 했다고?

“김근태 의장 밑에서 조직특보를 지냈다. 7명의 특보가 있었다. 지금도 김근태 의장 추모제에 가면 국회의원, 시장, 군수보다 먼저 소개시키는 게 우리다. 그만큼 김근태 의장은 우리 특보들과 함께 했다. 나는 어디가도 제일 자랑스러운게 김근태 의장의 조직특보를 한 거다. 김근태 의장은 민주주의의 상징 아니냐.”

- 특보는 장관시절에 했던 건가?

“그 이전부터다. 국회의원 때부터. 다 이어지지 않나. 민청학련부터 전대협까지. 졸업하고 나서는 민청에서 활동했다. 경남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경남조직 특보로 들어갔다. 김근태 의장의 통일운동 재단인 한반도 재단에서도 활동했고."

- 지금은 사업을 하지 않나?

“2005년 8.15 특사로 사면됐다. 선거법 위반으로 문제된 적이 있었다. 1997년 쯤. 선거 찬조유세하면서 과격한 말들을 많이 해가지고.. 명예훼손죄로 선거법 위반에 걸렸었다. 2005년 김근태 의장에게 더 이상 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다. 정치하려면 테크닉이 필요한데 나는 직설적이고 거짓말도 못한다. 인생을 좀 정리해야겠다고 하면서 지리산에 들어갔다. 젊은 시절 가진 정치적 세계관 이런 것들을 쭉 지켜왔는데 그 틀에만 갇혀 산 것 같다고 했다. 내 자신을 위해 좀 살아보고 싶었다.”

- 지리산에는 얼마나 살았나?

“6년 정도. 김근태 의장과 인재근 의원이 그때 자주 찾아오곤 했다. 어쨌든 지리산에 있으면서 돈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이전에는 돈을 몰랐다. 평화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하고자 했다. 지리산에 들어가 나한테 찾아오며 기름값 걱정하는 친구들을 봤다. 대학시절부터 열심히 살아온 친구들이다. 그들을 보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내가 살아가는 현실은 자본주의고, 내가 아무리 상대에게 애정을 주고 싶어도 물질을 동반하지 않은 채 마음만을 전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6년 간 지리산에 있으면서 나중에 돈을 어디에 쓰든 일단 돈을 벌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 현재 운영하는 회사는 어떠한 일을 하는가?

“세 가지 회사를 운영한다. 천부산업, 동양산업, 엠파마르바이오텍이다. 천부산업은 우수관, 하수관을 만드는 사업을 하고, 동양산업은 철 가공업을 한다. 엠파마르바이오텍은 미생물을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를 소멸시키는 기계를 만드는 거다. 엠파마르바이오텍은 최근 일본에 가서 250만 불의 수출 계약을 했다. 상장까지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사업 시작할 때 돈이 없어서 신용 하나로 시작했다. 선배한테 전세금 5천만 원 빌려서. 사업이 잘 됐다. 4년 후에 공장 부지를 다 샀다. 11억 3천만 원을 주고(웃음). 사업을 하지만 여전히 청년시절 꿈꾸었던 것을 소중히 생각한다. 평화, 통일, 민주주의 등”

-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한반도 정세가 어떠한 것 같나?

“위태위태하지만 우리가 바랐던 대로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통일이 되려면 먼저 시장이 섞여야 한다. 정치체제가 하나로 합쳐지는 게 아니라 시장이 하나로 합쳐져야 통일은 이루어진다. 우리 경제에서 최소 몇 조만 북한으로 가서 북한 경제에 모세혈관처럼 섞이면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래서 남북경협에 기대를 걸고 있고 잘 되길 바란다. 하지만 잘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야 한다. 얼마 전 이인영 의원에게도 그런 말을 했다. 지금부터 할 말 못하고 하면 문제가 되니 잘 못하고 있는 건 반드시 지적해달라고”

-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앞으로 돈을 더 많이 벌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학생운동을 통해 잘 돼 있는 친구들이 많지만, 본인의 성격이나 여건에 의해 아직까지 어렵게 지내는 선후배들이 있다. 지금은 내가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돕지는 못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고 있는데, 앞으로는 내가 찾아다니면서 도와주고 싶다. 한때 같은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했던 사람들 아니냐.”

- 학생운동은 어떠한 의미로 남아 있나?

“6월 항쟁의 기억들은 지금도 내가 흔들릴 때 나를 통제하는 힘이 돼 준다. 학생운동 당시 나를 바라봐주고 믿어주던 그 눈빛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눈빛을 기억하는 한 나는 제대로 살아갈 거다. 늘 고마운 마음들이 남아 있다.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함께 싸웠던 것은 내 인생에 큰 힘이 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 지난 25일 2018 통일걷기 '민통선, 평화를 걷다'에 참석한 최익호 씨(좌)와 이인영 의원(우) (사진=최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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