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진주, 6월17일부터 6월 29일까지의 기록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같은 일을 할 거야.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싸운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려움 없이.” 1987년 경상대학교에서 6월 항쟁을 주도한 최익호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6월 항쟁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의 발판 위에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고, 시민들은 참정권을 돌려받았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그 뜨거웠던 역사의 여름, 경상대학교 학생들은 전국 어느 곳보다 격렬하게 6월 항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해 여름, 경상대학교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한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11톤 LPG가스 차량 두 대를 탈취해 시위 중이다.(사진 = 서부경남지역 6월 항쟁 약사, 진홍근)

17일 남해고속도로 점거, 11톤 LPG차량 두 대 징발.

학생들은 17일 11시 칠암 캠퍼스에서 집회를 갖기로 하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된다. 이에 13시 20분 가좌캠퍼스 17동(교양학관) 185강의실에 모인 학생운동 주축 세력들은 새로운 투쟁방법을 모색한다. 이들은 경상대가 남해고속도로와 경전선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내고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할 계획을 세운다. 

15시30분쯤 학생들은 3개의 시위대를 조직한다. 제1시위대는 사범대와 자연대로 학교 정문방향으로 나아간다. 제2시위대는 농대와 법대 학생들로 체육관 뒷길(후문)을 거쳐 개양 오거리 방면으로 향한다. 제3시위대는 인문대 사회대로 이들은 17동(교양학관) 뒷길을 거쳐 고속도로를 점거하기 위해 정촌 방향으로 나아간다.

16시25분 쯤 인문대, 사회대 학생 2백여 명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한다. 경찰은 이들을 포위하고 학생 일부를 연행한다. 다급했던 학생들은 포위망을 뚫고자 정촌면 화개리 화동마을 앞 고속도로를 지나던 11톤 짜리 LPG수송차 2대를 탈취한다. 이들은 LPG차량 운전사에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차량을 좀 사용해야 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고속도로에서 LPG 차량을 징발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 주축세력의 계획은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이 포위망을 뚫고자 궁여지책을 낸 셈이다. 지휘부는 이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후 투쟁 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한다. 학생 중 일부는 런닝을 벗어 횃불을 만들고, LPG차량에 올라 횃불을 흔든다. 이들은 경찰의 포위가 풀린 틈을 타 경상대학교 정문으로 향한다.

정문에서 이들 3시위대는 1시위대와 결합한다. 시위 대열은 3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LPG차량을 끌고 진주시청으로 나아가자고 결의한다. 이동 중에 LPG차량이 폭파하면 반경 1KM가 전소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 퍼져나가자 시위대 일각에서는 ‘죽자’는 주문이 낮게 흐른다. 누군가의 주도가 아니었다. 

당시 학생운동의 지휘부에 속했던 진홍근 씨는 “‘죽자’는 말이 군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나올 만큼 당시 학생들의 각오는 굳건했다”며 “위험하니까 시위를 접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바라는 걸 위해 더 나아가야 할 것인가 중 학생들은 후자를 선택했다”고 증언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손학모 교수(당시 사범대 사회교육학과, 학습모임 ‘풀무회’ 지도교수)가 "제자들을 다 죽일 수는 없다”며 경찰 측에 협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경찰은 협상을 거부한다. 

학생들은 개양철교를 지나 정촌파출소를 다시 전소한다. 20시25분 쯤 LPG차량 때문에 후퇴를 거듭하던 경찰이 갑자기 최루탄 40여 발을 집중해 쏘며 LPG차량을 탈취하고 20여명의 학생들은 연행한다. 이들은 LPG차량 2대가 정면 충돌해도 안전하다는 증언을 LPG 운전기사로부터 들었고, 학생들이 가스탱크 개폐스위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후퇴하던 시위대는 마산발 진주행 비둘기호 열차를 징발해 경찰과 다시 협상하려 한다. 경찰은 뒤늦게 선로에 올라 열차를 탈취한다. 23시30분 경찰이 학교를 덮칠 것을 우려해 학생운동 주축세력들은 흩어져 학교를 빠져나간다. 나머지 학생들도 귀가한다.

이날 LPG 탈취사건은 국내 언론만이 아닌 해외 언론에도 실린다. 그만큼 반향이 컸던 사건이다. 진홍근 씨는 이날 사건에 대해 “6월 항쟁 가운데 가장 위험했던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최익호 씨는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며 “당시 ‘이 독재정권에서 살아봤자 징역이고 죽어봐야 교수형’이라는 이런 살벌한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분위기가 짐작될 거다”고 밝혔다. 이날 경상대학교의 거센 시위는 14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되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전국 단위의 시위를 끌어올리는 촉매제가 됐다. 

 

▲ 1987년 6월 18일자 중앙일보에 보도된 연합뉴스 사진(사진 = 김주완 김헌주 지역에서 본 세상)

18일부터 25일,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위

18일 11시 경상대학생들은 민주광장에 집결하기로 했지만 학교당국이 조기방학을 선포해 학생들이 교내에 많지 않았다. 학생운동 주축세력은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진행하려 했지만 일부의 반대로 50여 명의 핵심 세력만이 ‘연행 학생 석방’, ‘독재 타도’를 외치며 교문 앞에서 투쟁한다. 

18일부터 25일까지 학생들의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유는 총학생회 간부들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 때문으로 보인다. 앞선 17일 밤 민주광장에 집결한 학생들은 “총학생회와 대의원들이 기회주의적이고 어용적인 기질을 보인다”며 “싸움을 부추겨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빠지는 이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 ‘국민운동본부 진주지회’ 설립을 선언하다.

경상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가운데 시민들은 6.26 국민평화대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26일 11시쯤 경상대 가좌 캠퍼스 민주광장에는 3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한바탕 해방 춤을 추고 기차놀이를 하며 긴장을 풀었다. 출정시각이 되자 이들은 “완전무장한 전경을 따돌리고 시내로 진출해 시민과 결합하는 건 30여명이면 충분하다”며 비장함을 다진다.

14시쯤 진주시내 상업은행 옆 도로에 도착한 30여명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세를 규합한다. 삽시간에 2백여 명의 군중이 몰리자 전경들이 나선다. 이들은 완전 무장한 전경들의 기동력이 약한 점을 파악하고 계획된 동선에 따라 중앙시장을 거쳐 동명극장 쪽에서 다시 중앙로터리로 올라온다. 시위대는 이미 천 명이 넘은 상태였다. 이들이 진주극장 앞으로 진출하자 시위대 수는 3천여 명을 넘는다. 이들은 이곳에서 연좌농성을 진행한다.

16시쯤 장대동 부산교통 주차장 앞에 집결해있던 신부, 목사, 민주당 당원과 군중 3백여 명이 ‘군사독재 타도하여 민주헌법 쟁취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진주극장 앞 시위대에 합세한다. 이들은 군중을 포위한 경찰의 틈바구니 속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국민운동본부 진주지회’가 창립됐음을 선포하고 진주역 쪽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틈틈이 약식집회를 가지기도 한다. 군중 속에서 연설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시민들은 투쟁방향과 구체적 동선도 제시하기 시작한다. 

18시쯤 제일병원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군중집회를 열고 각종 문화행사를 시작했다. 1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20시쯤 학생운동 주축세력 가운데 한 명인 진홍근 씨가 연설에 나선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진주경찰서로 가서 연행자들을 풀고 진주교도소(현 상봉동 한주아파트)의 문을 열 것이다. 법원과 진주지원도 접수하겠다. 내일은 완전한 민주세상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승홍 신부는 당일 시위대 사절을 자임해 경찰서장과 담판을 지으러 간다. 시위대는 진주경찰서 쪽으로 진출한다. 시위대가 진주교 중간쯤을 지날 때 진주경찰서장은 연행자들을 석방한다. 시위대는 다음 날 투쟁을 약속한 후 해산한다. 다음날인 27일 학생운동권 주축세력 가운데 한 명인 진홍근 씨가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29일, 전두환은 대국민 항복 선언을 한다. 6월 항쟁이 승리의 깃발을 걸게된 순간이다. 국민들이 참정권을 되찾고 새 헌법이 만들어질 공간이 열렸다. 시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형식적 민주주의 이루어졌지만, 대중 민주주의는 요원"

6월 항쟁으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들의 투쟁에 의해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나라에 살아가고 있다. 지난 31년 부침을 겪어왔지만 87년 당시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일약 성장했다. 한 때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나라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 배경에 1987년, 그 뜨거웠던 여름이 있었다.

하지만 1987년 경상대학교에서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진홍근, 최익호 씨는 아직 목마르다고 말한다. 그들은 2018년 6월, “우리나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지금의 민주주의는 기득권에 의한 민주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우리가 바랐던 진정한 대중적 민주주의가 언젠가는 이 땅에서 꽃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 몫은 이제 남은 세대들의 것이다.

* 이 기사는 진홍근 씨가 쓴 '서부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약사'와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가 쓴 '80년대 경남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가제)', 그리고 1987년 경상대학교 6월항쟁을 주도한 진홍근, 최익호 씨의 증언에 기초해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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