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과 8월 계곡길을 걸으면서 잠시 멀어졌던 지리산 둘레길,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들녘 사이로 다시 둘레길을 걸었다. 9월 초록걸음은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중 일부인 남원 노치마을에서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까지 오락가락하는 가을비를 맞으며 발걸음을 이어갔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마을로 백두대간 종주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다. 여원재로 향하는 마을 뒷산에는 250년 넘은 당산 소나무 4그루가 마을 들판을 내려보며 마을을 굽어살피고 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 소나무들은 지리산 둘레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들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길동무들과 함께 네 그루 소나무 어르신들의 거북 등 같은 껍질을 어루만지며 노송의 영험한 기운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노치마을에서 덕산저수지 지나 가장마을 가는 길은 알곡들이 여물면서 단순한 식량 그 이상의 무게로 벼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들녘을 따라 걸었다. 참으로 힘들었던 여름도 어쩔 수 없이 가을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지만 극한호우란 단어가 등장했던 지난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또 비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쏟아부었던가. 그럼에도 지리산의 가을은 들녘에서부터 시작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논두렁길이었다.
질매재를 넘어 가장마을을 지날 때쯤 빗줄기가 굵어져 오씨 공원묘역 옆 정자에서 비도 피할 겸 점심을 먹고는 초록걸음만의 의식인 시와 음악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들녘의 운무까지 더해져 더욱더 깊이 시와 음악에 빠질 수가 있었다.
가을비가 계속 내렸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어 우산과 비옷으로 무장을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행정마을로 향하는 둑길은 주촌천을 따라 이어지는데 세걸산에서 발원한 이 주촌천은 운봉을 지나고 산내를 지나 엄천강이 되고 생초에서 경호강이 된다. 덕유산과 더불어 남강의 또 다른 발원지가 되는 것이다.
행정마을에 다다를 즈음의 들녘은 해발 400m 고원지대이다. 정령치에서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릉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산허리를 두른 운무에 논두렁에서 하늘거리며 피어있는 코스모스 꽃무리까지 보태져 가을 들녘이 말 그대로 운치 있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마을 숲 대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사시사철 언제 찾아도 감동을 주는 숲이라고 감히 말한다. 가을비까지 더해진 서어나무 숲을 길동무들과 함께 서너 바퀴를 돌면서 숲의 소리와 함께 숲의 기운을 온전히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함께 걷던 어느 길동무가 말했다. “이런 기운 받아 가기에 다시 한 달을 견딘다”고...
빗줄기가 굵어지는 바람에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의 종점이자 2구간 출발점인 운봉 서림공원까지는 걷질 못했지만 10월 초록걸음을 기약하고는 빗길을 헤치고 진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