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지나간 의신계곡을 배경으로...
장마가 지나간 의신계곡을 배경으로...

115번째 초록걸음은 극한 호우로 인해 셋째 토요일이 아닌 넷째 토요일로 연기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서산대사길이라 불리기도 하는 지리산 옛길은 의신마을에서 신흥마을까지 총연장 4.2Km의 산길로 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되는 곳이다, 의신마을에서 30분가량 오르면 닿는 원통암은 서산대사가 출가한 암자로 유명한데, 그 자리가 지리산의 배꼽이라고들 한다.

 

옛길 시작점인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의신계곡
옛길 시작점인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의신계곡
의신베어빌리지
의신베어빌리지

지리산 옛길의 시작점이 되는 의신베어빌리지는 마을주민들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마을사업으로, 현재 반달가슴곰 두마리를 방사하며 오전 오후 방사장을 관람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으로 유명한 의신마을답게 지리산 옛길 시작부터 고로쇠나무가 빽빽했고 지난봄에 수확하느라 설치한 호스가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리산 옛길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숲길의 정취를 만끽하며,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길임이 분명하다.

 

개울물을 건너고 있는 길동무들
개울물을 건너고 있는 길동무들
의자바위를 향하고 있는 길동무들
의자바위를 향하고 있는 길동무들

긴 장마 끝인지라 옛길 중간중간에는 폭우의 흔적으로 실폭포가 곳곳에 생겨 있었다. 작은 시냇물이 여기저기 졸졸 흐르고 있어 물소리 듣는 즐거움을 더해 주는 발걸음이었다. 구간 전체가 국립공원 구역이기도 하고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물놀이를 즐길 수 없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계곡물에 발을 담글 수는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산대사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의자바위에서...
서산대사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의자바위에서...
장마로 생긴 실폭포 앞에서의 가족사진
장마로 생긴 실폭포 앞에서의 가족사진

임진왜란 때 일본이 가져가려던 의신사 범종을 서산대사가 의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의자바위 를 지나고, 높이가 20m 넘는 감감바위까지 지나면 옛길의 마지막 관문이 나온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옛 신흥사가 있었던 왕성분교에 다다르면서 지리산 옛길은 마무리된다.

 

왕성분교 담쟁이 벽을 지나는 길동무들
왕성분교 담쟁이 벽을 지나는 길동무들
옛길 끝점에서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펼침막을 들고서...
옛길 끝점에서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펼침막을 들고서...

하지만 이 길의 끝에는 두 가지 덤이 길동무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가장 덩치가 크다는 500세 푸조나무와 최치원 선생이 속세에 찌든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며 바위에 글씨를 남겼다는 세이암(洗耳岩)이다. 푸조나무가 보이는 계곡 가운데 있는 세이암은 국립공원 구역 밖이라 계곡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 물놀이를 맘껏 즐길 수가 있으니 땀 흘려 걷고 난 다음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긴 장마로 눅눅해진 영혼까지 헹구며 8월의 초록걸음을 그렇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낙장불입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 ‘지리산 옛길’로 걸어왔던 길을 복기하면서...

 

화개천 세이암 물놀이터에서...
화개천 세이암 물놀이터에서...
왕성분교 앞에서 500년째 자리 지키고 있는 푸조나무
왕성분교 앞에서 500년째 자리 지키고 있는 푸조나무

 

지리산 옛길 / 이원규

살다 지쳐 자주 팍팍한 날이면

세상사 낡은 외투 훌훌 벗어던지고

화개동천 지리산 옛길로 가자

세이암 맑은 물에 두 귀를 씻고

연초록 산바람에 백태 낀 눈동자를 헹구자

저마다 외로운 구름처럼

한 마리 보리은어의 첫 마음으로 거슬러 오르자

아직 어린 새색시 첩첩 울며 시집오고

의신마을 코흘리개들 가갸거겨 배고픈 쇠점재

저 홀로 버림받은 사람도

아랫도리 후덜덜 화개장터 소금장수도

어금니 꽉 깨물고 넘던 사지넘이고개

날마다 서산대사는 입산출가의 자세로 오가고

비운의 혁명가 화산 선생은 빗점골로 들어가

마침내 죽어서야 돌아왔다

살다 지쳐 자주 침침한 날이면

저잣거리 빛바랜 안경을 벗어던지자

감감바위 아래 그 무거운 봇짐일랑 내려놓고

금낭화 피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냥 금낭화가 되자

산나물 조금 안다고 뜯지도 캐지도 말고

박새 초오 지리강활 동의나물

여차하면 독이 되는 오욕의 풀일랑 키우지 말고

그저 가만가만 보리은어의 눈빛으로

착한 다람쥐꼬리처럼 따숩게 두 손을 잡자

그래도 못다 한 속울음이 남았다면

벽소령 희푸른 달빛을 보며

대성폭포처럼 그예 대성통곡을 하자

그리고 돌이끼처럼 다시는 울지 말자

그 누구라도 외로운 산신령, 서러운 신선

온종일 의신동천 물소리로 내장을 헹구러 가자

모세혈관마다 연초록 바람이 이는 지리산 옛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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