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한반도 근대 외식업 시작의 시대적 배경 

황규민 약사
황규민 약사

1929년 12월 발간된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진주 지역의 명물로 진주비빔밥이 소개되었다. 

“... 새파란 채소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의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중간 생략)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식민지의 식탁>에서 박현수는 "식민지시대에도 새벽뿐 아니라 문을 닫지 않고 24시간 영업하는 설렁탕집 역시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100년 전만 해도 서울사람들 대부분은 냉면을 몰랐다. 불고기는 192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던 음식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20년대 들면서였다. 우후죽순 음식점과 선술집이 생겨났다." -100년전 우리가 먹은 음식-

이때가 되면 예전에 비해 시나 소설 또는 신문기사에 음식 이야기가 크게 증가한다. 문화혁명 같았던 이 격랑의 배경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이준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 구고산 큰 애기 반봇짐만 싸누나.”라는 유명한 <신고산 타령>의 시대적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전통도시 고산을 빗겨 철도역이 들어선 ‘신고산’은 식민지 근대와 자본주의 도입의 한 상징이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를 한반도 전역에 퍼뜨린 '우르르 화물차 떠나는 소리'는 조선의 백성에게 그저 '단봇짐' 싸서 고향에서 쫓겨나 도시의 변방에 토막을 치고 더 처절한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고난의 신호일 뿐이었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전쟁준비와 만주로의 진출을 위해 평양과 함흥 등지에 중화학 공업단지를 건설한다. 1923년에는 영등포 일대에 경성방직공장을 비롯하여 피혁, 기와, 기계, 맥주 등 경공업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로 전쟁물자를 실어 나르고 한반도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철도를 건설했다. 인천 군산 목포 진해 마산 부산 등 한반도 농수산물을 일본으로 수탈해가는 길목에는 '식민지 도시'가 건설되거나 성장했다.
  
1910년대에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이나 철도공사 또는 일제의 폭정과 수탈에 의해 생계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또는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은 서울 등 구도시, 새롭게 형성되는 신도시, 공업단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도시 근교에서 '토막'이라 불리는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것이 '식민지 도시화'와 '식민지 공업화' 즉 '식민지 근대화'의 모습이다. 

이 시기의 주거형태인 '토막'은 음식을 만들기는커녕 잠도 겨우 잘 정도의 열악한 공간이었다. 결국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비빔밥이나 국밥 등이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다. 

1920년대 들어 어쩔 수 없는 식민지 도시화, 식민지 공업화 때문에 그리고 냉장기술과 '아지노모토'의 도움으로 외식업이 활발해졌다. 어쩔 수 없는 근대 외식업의 시작이었다. 

진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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