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 백정해방운동의 동력이 되다.

황규민 약사
황규민 약사

1910년 조선이 멸망했다. 교방도 폐지되었다. 냉면은 교방을 벗어나 부유층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부분적이지만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과 부자들은 요정 등에서 유흥을 마치고 나면 음주 후 냉면을 먹었다.

그리고 1920년대가 되자 일반인들도 비빔밥뿐만 아니라 냉면을 접할 수 있는 외식업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1920년대 냉면과 비빔밥이 대중화될 시기에,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었던 진주에서, 육전과 육회가 올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시장과 도축장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축하고 해체하고 판매, 유통, 공급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들이 바로 백정이었다.

진주의 우시장과 도축장에서 공급되는 쇠고기를 상시적으로 판매하는 정육점이 진주 중앙시장에 생겼다. 백정들은 냉면집, 비빔밥집 등의 식당에 육류를 공급하거나 부유한 일반인을 상대로 고기를 판매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를 축적하는 백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선한 고기 공급으로 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의 발전과 대중화에 기여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백정들은 이제 자기의 처지를 자각하고 자녀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계급해방의 의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백정들은 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의 발달과 대중화에 기여했으며 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은 백정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여 계급해방 운동에 나설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현실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이학찬 등은 3.1 운동의 경험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대중운동 발전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자산을 물려받은 양반 출신에서부터 새롭게 지식과 부를 축적한 백정에 이르기까지 출신은 달랐지만 신식 교육과 일본유학 등을 통해 선진사상을 흡수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3.1운동에 조직적으로 깊숙이 관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시작된 진주 지역 시위는 진주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출발점이었다.

임술년 농민항쟁, 갑오농민전쟁, 1900년대 의병운동, 교육운동, 애국계몽운동은 3.1운동의 '선행학습'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의 경험은 이후 진주 지역 사회운동의 인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했다. 3.1운동 후 미래 정부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지도자를 뽑는다는 '공화정'에 대한 합의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식민지 민족 상황을 깨닫고 민족해방 운동에 모두가 하나되는 데 있어 계급을 타파하고 차별을 없애자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백정해방 운동과 차별철폐 운동은 적어도 사회활동가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고 백정들의 요청에 함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날씨가 더워지면 강상호, 신현수 등은 중앙시장에 들러 육전 고명을 얹은 냉면을 먹고 더위를 식히고 허기를 달랬을 것이다. 또 어떤 때에는 백정들이 공급한 신선한 고기를 얹은 육회 비빔밥을 함께 먹으면서 백정과 비백정이 비빔밥처럼 함께 어우러져 사는 평등 세상을 상상하며 조직하고 연대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들은 백정들의 고통과 간절한 염원을 외면하지 않았고 1923년 4월 25일 <형평사> 창립총회에 백정들과 함께 나란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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