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작년(2022)부터 시행된 교육기본법 제14(교원) 항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학교교육에서 교원(敎員)의 전문성은 존중되며, 교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는 우대되고 그 신분은 보장된다.

존중이나 우대는 법률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법률용어는 제한금지또는 의무’, 그리고 요건등을 가능한 가치개입이 없는 매우 건조한 용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치개입이 시작되는 순간 법질서는 흔들리게 되고 동시에 당해 법, 또는 법 조항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가치개입이 없는 매우 건조한 용어로 표현된 법도 해석이 천차만별인데 존중이니 우대등의 표현은 웃기는 일이고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한다면 아예 존중이나 우대따위는 기대조차 하지 말고 개나 줘 버리라는 것이다.(말 그대로 선언적인 의미 밖에 없다.)

도대체 어느 정도가 존중인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기준을 제시해야 할 법이 오히려 기준을 뭉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국회의원의 법 제정 수준이 문제인가? 아니면 법 제정에 관여한 사람들이 문제인가? 이 모호한 존중이 교육기본법 14조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우대역시 천차만별의 해석이 가능한 상대적인 용어다. 기준이 없는 이런 단어가 법 조문에 들어 있다는 자체가 교육기본법의 법적인 상황과 위치를 말해준다. 우리 사회에서 교원의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조금 더 보자!

교육기본법 제14(교원) 항은 더 가관이다. 교원은 교육자로서 지녀야 할 윤리의식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에게 학습윤리를 지도하고 지식을 습득하게 하며, 학생 개개인의 적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학습윤리를 지도한다.’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연구 윤리는 있어도 학습윤리는 금시초문이다. 내가 무지한가? 나름 나도 학위를 가진 박사다. 그런데 학습윤리를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말은 참 애매하다.

몰라서 검색해 보니 대학에서 학문을 탐구할 때의 윤리라는 이야기인데 이 말이 교육기본법에 왜 들어갔을까? 교원의 범위에 대학 교원들도 포함은 되니 조금은 수긍이 가지만 뒷부분의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개개인의 적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은 대학 교원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면 앞부분의 학습윤리가 무엇인지 더 혼란스러워진다. 심지어 그것을 지도하라는데 학습윤리를 지도하는 것은 금방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법 제정에 참여했던 국회의원에게 물어보면 알까?

문제는 또 있다.

교육기본법에 교권규정은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교사의 권리라고 명시된 것은 보이지 않는다. 3조에 학습권만 규정되어 있다. ‘교권이 왜 없을까?

권리는 권한과 권능으로 나누어지는데 권한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가능한 주장과 요구의 힘 또는 자격을 말하고 권능은 그 구체적 내용이다.

교사의 권리는 이렇게 권한을 정하고 권능을 정하면 될 일인데 법률은 이를 회피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구체적인 권한과 권능을 잘 모르거나 교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학생과 교사 간의 그 내밀한 역학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교사 출신으로 법률을 공부한 사람이 국회로 나아가냐 하는데이미 교사 출신의 국회의원이 있어도 그 효과가 없는 것은 이 나라 정치현실이 그 모든 상황을 하향균질화 시키고 마는 심각한 독성에 마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많은 교권 침해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권이 규정된 법이 없으니 모두 사법부 판사의 애매하고 무지한 법 해석에 따라 결판이 나고 만다.

해방된 지 무려 78년이 다 되어 가는 우리 교육 현장에 겨우 2022년 교육기본법이 시행되었다니(제정은 1997) 이 또한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