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우리처럼 작은 학교는 음악이나 미술 과목 중 한 과목은 반드시 겸무(여러 학교를 겸직) 선생님이 수업을 하신다. 이를테면 우리 학교에 미술 선생님이 계시면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가시는 날 다른 학교 음악 선생님께서 오시는 일종의 순회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수업의 최종 책임을 지는 교장으로서 음악 미술 수업이 늘 걱정이 된다. 그 걱정의 핵심은 음악 미술로 대표되는 학교 예술 교육이 자칫 소홀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 학교 예술 교육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중고 예술 교육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이 땅의 왜곡된 사회 구조와 그에 영향을 받는 교육적 현실을 비추어 볼 때, 가장 왕성한 예술적(미적) 감흥을 가진 아이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기우를 넘어서고 있다.

19세기말 영국 출신의 수필가 월터 페이터(월터 허레이쇼 페이터, Walter Horatio Pater 1839~1894)는 “모든 예술이 음악의 상태를 열망한다”라고 말했다. (월터 페이터 모음집, 옥스퍼드 출간 Collected Works of Walter Pater, 2019) 사실 이 말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를 살다 간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인용하여 페이터가 좀 더 쉽게 풀어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견해는 사실 음악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실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지닌 여러 추상적 성질에 관심을 두었다.

쇼펜하우어는 유독 음악에서만은 예술가가 다른 여러 목적을 위해 흔히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청중들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어느 정도 실용적인 목적을 같은 건축물로 스스로를 표현해야 한다.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에서 오가는 대화에도 쓰인다. 그리고 화가는 대개 가시적 세계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오직 작곡가만은 자신의 의식에 따라 일상의 표현방법이 아닌 것을 통해 자유롭게 예술작품을 창작한다고 이야기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지음, 곽복록 번역, 올재, 2021. 38쪽, 77쪽 참조)

순수한 예술은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의욕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모든 예술가는 기쁨을 주고 싶은 욕구와 의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예술을 정의한다면, 예술은 곧 마음을 기쁘게 하는 형식을 창조하려는 어떤 시도이다. 우리의 미감(美感)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예술의 형식이다. 즉, 감각과 지각이 교차하는 순간, 그 형식 관계에서 통일과 조화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미적인 감각은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견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악은 아주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는 예술이다. 그에 의하면 음악은 굳이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음악 자체가 풍부한 언어이며, 최고의 주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다른 예술이 추구하는 예술적 개념은 자칫 추상적이고 표면에 관심이 집중될 가능성이 있지만, 음악은 대상의 내밀한 핵심을 전달한다. 즉, 분명하지 않지만 매우 분명하고, 흐릿하지만 더욱 또렷해지는 역설이 이해되는 것이 바로 음악적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미지라는 말에는 이미 객체화되고 가시적인 대상물을 의미한다. 하지만 음악이란 가시화할 수 없고 객체화할 수 없는 독특한 예술영역인 탓에 오히려 더 많은 사상과 이념, 그리고 의지가 개입되는 것이다. 물론 미술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개입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시각(視覺)으로 파악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즉각적 대응이나 요구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미지는 음악이나 미술이 추구하는 동일한 세계이기는 하나 인식 가능한 범위와 조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을 배우고 미술을 배우며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감성을 일깨워 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음악이며 어떤 미술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다. 제공되는 것을 이용하고 또 그것을 모방했을 뿐이다. 제공되는 것 이외의 예술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껏 배우고 익힌 예술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이런 지점에 도달하기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오래된 관행과 그 관행만큼이나 오래되고 두터운 자신의 틀을 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예술적 감흥을 누군가에게 가르쳐야 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난해해진다. 그런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예술적 경험이 어떻게 단련되어왔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단지 기술과 태도를 교육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예술의 본령, 즉 인간의 오감으로 충족되어 구현되는 거대한 이미지 혹은 그 이상을 예술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이미지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고민해 보아야 한다. 강요되거나 혹은 편협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이미지조차도 희미하여 혼선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대전제 아래 서 있다면 이 혼돈은 충분히 감수하여야 하는 당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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