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학교에서 폭력이 없는 상황은 좀체 어렵다. 폭력을 물리적인 강제력에서부터 정신적·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모든 상황으로 정의한다면 학교에서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학교라는 조직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사람(교사)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학생)의 권력관계가 양립하고 거기에 두 집단 사이의 긴장관계가 개입되어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배경이나 원인은 두 집단의 바탕이 되는 사회(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다.

퐁티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폭력은 인간 삶의 불가피한 요소(모리스 메를로퐁티, 박현모 역, 휴머니즘과 폭력, 문학과 지성사, 2004)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퐁티는 ‘폭력’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문제가 있지만 인간 삶 바닥에 흐르는 폭력의 문제에 대한 퐁티의 시각에 거의 동의한다.

그런 구조 속에 있는 학교에서 폭력이 없을 수 없다. 당연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교라는 조직이 생긴 이후 늘 있어왔던 문제였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매우 엄밀해져야 한다. 즉 모든 시대 모든 학교에서 폭력이 있었다는 관점에서 현재의 학교폭력을 조망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희석하는 오류를 범할 것이고, 지나치게 현재의 관점에서만 학교폭력을 보는 것 역시 현재의 학교폭력 문제만을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전체)이 이전의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폭력적이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루어낸(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국가이다. 정치, 경제적 격변을 겪었고 그 격변이 고스란히 사회로 스며들어 사회의 말단 구조인 가족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처럼 격변을 일으키려면 그것을 일으키게 하는 동력이 필요한데 동력은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오늘의 결과를 준 동력의 역기능은 순기능보다 보이지 않는 많은 곳에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30년 이상 고교(전문계, 인문계)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교폭력의 주인공들과 면담을 해 보면 그 바탕에는 그들의 참담한 가정이 있었다. 예외 없이 불행한 가족의 상황이 학생에게 폭력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고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폭력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가정은 사회 속에 있었고 그 사회는 국가의 정치, 경제 제도의 바탕 위에 있다. 가정이 불행해진 것은 위에서 말한 거대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 동력의 역기능이 가정에 미친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도 있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문제 역시 거시적으로 본다면 전체 구조의 문제 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그러한 가족을 벗어난 아이들이 향하는 학교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2023년 대한민국 학교의 교사 집단은 전형적인 위계형 집단이다. 물론 최근에는 ‘민주적’이라는 말로 순화되기는 했지만 교사 집단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위계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학교 내부의 조직이 일단 위계적이다. 교장 교감을 상위에 둔 명령체계가 확립되어 있다. 더불어 학교와 교육청이 위계적 관계이고 교육청과 교육부가 역시 위계적이며 교육부 또한 거대한 정부 조직의 위계 속에 있다. 위계적 구조를 지탱하는 권력과 권위, 그리고 ‘민주’적이라는 장식적인 말이 서로 긴장하는 아주 복잡한 상황이 교사 집단 구조의 바탕이다.

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통제되는(내부적으로는 교사 집단에 의해 조정 및 통제되는) 학생들은 교사 집단의 위계 구조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학생들은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단 속에서 받고 있는 권력구조의 부정적 에너지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미세하지만 영향력은 매우 크다.) 학교나 교사의 통제와 함께 학생들은 독립적으로 그들 내부에서 생겨나는 권력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교사와의 관계에서부터 학생 상호 간의 관계가 매우 중첩적으로 겹쳐있다. 교사와의 관계에서 오는 학생들의 권력관계는 거의 표면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학생 상호 간에 관계는 매우 내밀한 것으로서 학생 개인의 가정 상황과 학교 성적과 개인적 능력(학교 성적과는 무관한)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관계가 설정된다.

이 관계 속에서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예견된 갈등은 역시 그 예견에 기초한 각종 법령이나 규칙이 작동하지만 예견할 수 없는 갈등의 해결은 본능적 상황에 의존할 개연성이 커진다. 그 개연성 중의 하나가 폭력이다. 이처럼 학교폭력의 구조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배경이나 발생, 그리고 진행은 원인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갈등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원인을 찾아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일어난 일을 처리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학교 폭력 문제는 처리된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힘이 센 쪽에서 힘이 약한 쪽을 향한 일방적 의사표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힘이 약한 쪽이 연대하여 힘이 센 쪽을 향하는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그 상황은 학교폭력의 장면에서는 상정하기 어렵다.

학교 폭력의 유형 중에 가장 많고 동시에 가장 처리가 어려운 것이 ‘따돌림’에서 시작되는 유, 무형의 폭력이다. 원인과 진행과정이 지속적이어서 표면화되었을 때는 매우 심각한 단계이므로 문제 해결이 매우 어렵다. 조사를 진행해 갈수록 관련된 학생의 범위가 확산되고 어떤 경우에는 따돌림이 일어난 그 반, 학년 전체 아이들 중 전혀 개입되지 않는 아이를 찾기 어려울 지경인 경우도 더러 있다. 누적적이고 점층적인 따돌림의 결과가 표면화되었을 때, 그 일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우리 사회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권력관계와 폭력이 모두 들어있음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래 동안 잠재되어 있다가 표면화된 문제는 사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이런 일이 더 이상 생기지 말도록 해야 하는 방향 중 하나가 ‘회복적 ~’ 교육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회복적 ~’ 교육을 아이들에게 실행하면서 스스로 참담함을 자주 느꼈다. 이유는 이러하다.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표면적인 어루만짐이 아닌가? 실제로 심각한 따돌림을 실행한 당사자들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성찰이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회복한다는 것인가?

결정적으로 학교는 이것만을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어서 ‘회복적 ~’ 교육은 때로 장식품처럼 소비된다는 것이다. ‘회복적 ~’ 교육을 하고 나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위안이 교사에게 남는다. 그리고 이런 의문도 남는다. 학교는 그리고 교사는 폭력의 근본 문제인 사회구조의 부조리에 집중하여 그것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 수 없는가? 사회의 잘못된 구조로부터 발생한 학교 폭력의 처참한 결과와 그 상처를 그저 어루만질 수밖에 없는가?

기형적이고 부조리한 우리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학교 폭력은 여전히 진행될 것이고 더불어 그 방식과 결과는 우리의 상상을 넘을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회복적 ~’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마치 피해자인 사람에게 무조건 마음을 잘 정돈하고 정리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원인이 되는 사회구조 내부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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