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진주고 교사
김준식 진주고 교사

며칠 전 또 선생님이 자살을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지금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한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왜냐하면 원인 규명과 대안에 대한 의견이 많아질수록 사태 해결은 조금 더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나의 의견 또한 완전히 새로운 대안이 아니며 나의 분석이 역시 완전히 새로운 분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교장에서 교사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학교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인문계 고교인 지금 학교는 전체 교직원 60명 이상이 각각의 학년실에서 그리고 교무실에서 생활하신다. 그런데 학교 분위기는 마치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안에는 소소한 인간적인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들의 표정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얇은 단절이었다.

나는 이미 60을 넘겼고, 30년 이상 교사로서 경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함을 대부분 겪어 본 만큼 학교 현장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에 대하여 (어떤 것이든)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줄 위치에 있다. 그래서 가능한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예민하게 사태를 보려고 노력한다. 아직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은 분위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지금 학교에서 받은 느낌은 매우 경직된 분위기였다. 분명히 내가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며 요청이 있으면, 내 능력 범위 안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릴 예정이다. 하지만 교사 집단은 자존의 집단이다. 쉽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쉽게 자존의 벽을 허물지도 않는다. 그래서 늘 스스로를 고문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알게 해야 한다.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내가 학교로 돌아온 이유는 아마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행정적 절차적 요소가 아닌 정서적 배려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베풀어 줄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전화가 왔다. 불쑥 ‘아버지’라고 부른다. 전화를 건 사람은 30대 여자 졸업생이다.

“아부지! 저 퇴사했어요!”

“아이고 고생했구나! 그래 좀 쉬어도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이런저런 저간의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냥 “잘했다!”라고만 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그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아부지’라고 불렀다. 그 시절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혼내는 부분이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밥(특히 아침)을 챙겨 먹지 않는다고 혼내고 대충 산다고 혼을 냈다. 그래서 별명이 집에 아버지처럼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아부지’가 되었다. 졸업 이후에는 만나면 여학생은 ‘딸’이라고 불렀고, 남학생은 ‘아들’이라고 불렀다. 별 다른 거부감 없이 딸 아들이 많이 생겼고, 동시에 아부지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많다.

'이직移職'이 많은 시절이라 놀랍지는 않지만 그 아이는 지난 7년 동안 참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재취업할 것이라며 학교에 찾아가도 되냐고 물었다. 이제 나는 교장이 아니라서 학교 말고 밖에서 만나야 한다고 했더니 왜 교장을 그만뒀냐고 묻는다. 이해할 수 없으리라.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모두 나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30년을 넘게 선생 노릇을 했으니 졸업생이 수 천명은 족히 넘을 것인데, 내 거울이 수 천 개라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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