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남인수는 1936년 김상화라는 사람이 쓴 시에 박시춘이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을 시에론(Chieron Record)에서 내며 데뷔했다. 이때 남인수는 강문수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는 모친이 강 씨와 재혼해 호적상에 오른 것이었다.

1918년 진주에서 태어난 남인수의 생부는 최 씨로, 따라서 그의 본명도 최창수로 알려져 있다. 남인수라는 이름은 오케(Okeh) 레코드로 이적 후(1937년) 이부풍이 노랫말을 다시 써 제목도 '애수의 소야곡'으로 바꾼 '눈물의 해협'을 1938년에 다시 발표하며 쓰기 시작한 이름이다.

남인수는 같은 해 '기로의 황혼'이란 노래도 불렀지만 치안 방해를 명목으로 가두 연주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더불어 이 노래는 가사를 쓴 조명암이 월북했다는 이유를 앞세워 1965년 방송금지곡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남인수의 어린 시절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일제강점기 학적부를 통해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나온 것 정도가 확인된다. 또 일본에서 노동자로 지냈다는 말과 중국어를 배우던 중 고향 선배가 만주군관학교를 권했다거나, 그 선배의 권유로 경성부(일제강점기 때 행정 구역. 지금의 서울이다)로 갔다는 것 등 몇몇 설들이 있지만 정확하진 않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알려진 친형 최창도의 월북과 관련해 남인수가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의 초기 피해자로 기록돼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였는지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 '여수 야화'는 이승만 정권이 1949년 9월 1일 "사회적 통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북한에서 태어난 최창도의 딸, 그러니까 남인수에겐 조카가 될 최삼숙은 1970~80년대 북한 최고 가수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다. 그 최삼숙의 딸은 지난 2016년에 일어난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의 탈북자 13명 중 한 명이라고 전한다. 좀 복잡한 내막이다.

노래는 때로 시대를 대변하고 또 그 시대를 디뎌 히트한다. '애수의 소야곡'과 더불어 남인수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도 그런 곡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돌아서고 8월 15일 정부가 '서울 환도'를 발표한 때, 3년 간 피난살이에 시달린 사람들이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모습과 감정을 담아낸 남인수의 노래는 그 시절 뭇사람들의 서글픔을 달래주었다.

당시는 때만 기다리고 있던 레코드사들이 잇따라 신곡을 발표하던 터라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한 김재창이 설립한 유니버살(Universal)이 환도 이듬해 9월 25일 자 <서울신문>에 '제1회 신보 광고'를 실어 유명세를 탔다. 해당 광고에는 싱어송라이터 전영록의 모친인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도 포함돼 있었다. '봄날은 간다'는 한국 시인들이 한때 가장 애창했던 노래로도 유명하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1950년대 최고 판매량(5만 장)을 기록하며 남인수의 두 번째 전성기의 신호탄이 돼주었다. 물이 들어왔으니 노를 젓는 건 당연할 일. 남인수는 여세를 몰아 1955년 7월 '고향의 그림자'를 비롯해 '가을인가 가을', '기다리겠어요', '청춘고백' 등을 내리 발표하며 시대의 원톱 가수로 우뚝 섰다.

특히 '청춘고백'의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 몹쓸 것 이내 심사"라는 인트로 가사는 손석우가 쓴 것으로, 그는 남인수의 '내 고향 진주'를 써내며 작곡가로 출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손석우는 이후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등 드라마와 영화 주제가로 이름을 더 널리 알렸다. 아울러 손시향이 불렀고 나중에 김현식이 다시 부른 '이별의 종착역' 역시 그의 곡이다. 뭐니 뭐니 해도 손석우를 당대의 작곡가로 만들어준 노래는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일 것이다.

남인수와 27년 동안 콤비로 활동한 작곡가 박시춘은 현인의 '신라의 달밤'과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장세정의 '고향초',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백설희의 '봄날을 간다' 등 40년 작곡 생활 동안 무려 3천 여 곡을 쓴 30년대 최고 인기 작곡가였다. 1981년 MBC가 실시한 '한국 가요 대조사'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노래 100곡 중 10곡이 박시춘의 것이었다는 건 과거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 박시춘과 화려한 시절을 보낸 남인수는 1950년대 후반 오아시스 레코드로 가 같은 진주 출신 작곡가인 이재호와 '산유화', '무정열차'를 발표해 정상에 선 자신의 위치를 재삼 확인했다. 이재호에게 ‘조선의 슈베르트’라는 별칭을 안겨준 '산유화'는 성악가 한규동도 "클래식에 근접한 괜찮은 노래"라고 했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남인수/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인수/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가요 사상 최고의 미성', '백 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을 하늘이 내린 목소리', '서정 가요의 황제'. 가수로서 그를 칭송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마냥 칭송만 듣고 산 건 아니었다. 그에겐 별명 두 개가 있었으니 바로 '돈인수'와 '여인수'였다. '돈인수'는 출연료를 선금으로 주지 않으면 절대 출연하지 않았다는 그의 철저한 경제관념에서 비롯된 말이고, '여인수'는 주위에 여자가 많았다고 해 붙은 별칭이다.

실제 남인수는 판소리 명창/민속 무용가였던 공옥진과는 동거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공옥진이 생전에 직접 증언했다고 한다), 가수 이난영과는 사실혼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한 번은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활동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았던 상업 조직) 출신 극성팬들에게 납치당해 동거를 강요당했을 정도였다고도 하니 당시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물론 이런저런 스캔들도 그의 친일 행적에 비하면 소소하다.

남인수는 1943년 조명암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혈서지원' 등 군국가요를 불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이 일로 1996년부터 열어온 '남인수가요제'가 2008년부터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매년 10월 개천예술제/남강유등축제 기간에 열려온 '진주가요제'는 그 후신으로 볼 수 있다.

남인수가 군국가요를 부른 일과 관련해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이자 음악학자인 이준희는 "당시 인기가 있고 역량이 인정된 대중음악가라면 백 퍼센트" 군국가요를 만들거나 불렀다고 보면 맞다고 했다. "꼭 음반 녹음을 하지 않았더라도 무대에 서기 위해선 그런 노래(군국가요)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자료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이 백년설과 남인수라는 것이고, 조선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몬 군국가요를 대표했다는 '이천오백만 감격', 조명암이 가사를 쓰고 김해송이 곡을 붙인 '강남의 나팔수'와 조선군보도부에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의 동명 주제가 등이 그런 노래들에 포함됐다.

이에 대해 노래 평론가 겸 연극 평론가인 이영미는 "대중예술인의 친일 문제는 좀 까다롭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에 따르면 흔히 지식인 또는 본격 예술로 일컫는 문학, 미술 분야는 창작자(작가)가 자신의 인식과 신념을 작품에 담는 것으로 간주하지만(따라서 책임도 져야 하지만) 대중 예술은 수용자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상업성)이 본질이므로 시류를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이때 배우나 가수, 연주자는 단순 기술자로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데, 미술이나 문학처럼 대중예술(영화, 대중가요, 연극 등)은 따로 보관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끝나는, 즉 활동 중단을 감수해야만 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영미는 덧붙여 "물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순 없다"라며 "단지 광복과 동시에 남인수 같은 사람이 사죄를 할 수 있는 프로세스가 있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 같다"라고 했다. 그랬다면 생전에 자신의 친일 행적을 사죄하고 세상을 떠난 반야월처럼 남인수에게도 최소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까라는 얘기다.

남인수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음반 제작이 멈춘 1944년 이후 약초(若草) 가극단 등에 들어가 무대 활동을 했다. 그해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주최한 '성난 아시아'에 출연한 것이 일례다. 광복 이후엔 여러 악극단에서 무대 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다 음반 제작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1947년 이후엔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불렀고, 이듬해엔 아세아(Asia) 레코드를 통해 본인이 직접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남인수는 또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을 했으며, 뒤엔 오리엔트(Orient) 레코드 등 여러 음반사에서 앞서 말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과 '추억의 소야곡'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역임, 1960년엔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을, 한해 뒤엔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지낸 남인수는 비슷한 때 지병이 재발해 '낙화유수' 등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이듬해인 1962년 6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45세. 그의 장례식장에선 '애수의 소야곡'이 흘렀다고 한다.

남인수의 묘소는 진주시 하촌동 진주 강 씨 묘역에 있다. 또 진주시 판문동 진양호에는 1984년에 만든 '남인수 노래 기념비'가 있고, 그의 사망 39주기였던 2001년 6월에 남인수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동상도 곁에 함께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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