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디뉴스=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 손목인은 1913년 4월 13일 경남 진주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손세영과 어머니 표성수 사이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탄생 100주년은 진즉에 지났고 별세한 지도 올해로 24주기다. 지금 세대에겐 너무 아득한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입에서 고복수의 '타향살이'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한 소절쯤 들은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더풀~ 원더풀~" 하는 '아빠의 청춘'의 후렴을 들어본 적은 없을까. 이것들이 모두 베레모 쓰고 아코디언 연주하며 음악을 "생명줄"로 여긴 손목인의 곡들이다. 손목인은 다섯 살 때까지 진주에서 살았다. 그의 '타향살이'는 부친이 먼저 서울로 가 안국동에 한약방을 열고 진주에 있던 가족들을 서울로 부르면서 시작된다. 1917년의 일이다.

손목인의 본명은 손득렬이다. '손목인'은 일본 유학 시절 여름 방학 때 집에 와 작곡을 하며 바꾼 이름이다. 이름에 칠 목(牧) 자를 쓴 건 소와 말이 풀 뜯고 노는 목장, 그것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내는 바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손목인은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세 살 위 형은 때문에 베드로를 한자음으로 바꾼 이름(손피득)을 얻었다. 격동기에 여운형 밑에서 일했던 손피득은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손목인의 부모님은 아들이 음악 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당신들에게 음악은 그저 '풍각쟁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음악은 운명처럼 손목인을 이끌었다. 그는 음악 공부를 위한 일본행 여비를 모으려 학교 수학여행비를 빼돌렸고, 급기야 한 집의 주요 재산 목록이었던 재봉틀까지 전당포에 팔아 돈을 마련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한 일본의 친지 집엔 눈칫밥으로 2~3일 밖에 머물 수 없었다. 그나마 YMCA에서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동경에서 얼마간 지낼 수 있었는데, 음악에 목말랐던 손목인은 동경제국음악학교 담장 밑에서 몰래 음악을 듣곤 했다고 한다. 얼마 뒤 초등학생 때 다니던 교회 선배들이 동경음악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걸 친구가 알려줘 손목인은 곧장 그들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먼 길을 가 만난 선배들은 그를 도와줄 형편이 못됐다. 낙담한 손목인은 하루를 꼬박 걸어 친구 집에 와 그대로 쓰러진다. 보다 못한 친구가 손목인의 집으로 직접 편지를 부쳐 여비를 부탁, 송금된 여비로 다시 집에 간 손목인은 "학교는 마치고 음악을 하라"는 부모님의 조건부 허락을 받아낸다. 음악가로 가는 문턱을 넘어선 순간이다.

1931년, 손목인은 꿈에도 그리던 동경제국음악학교 성악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그는 재수를 결심했고 이듬해 피아노/작곡과에 합격해 음악의 기본기를 닦는다. 3년 뒤 조선에서 레코드 산업이 성행하기 시작한 때 손목인에게 첫 기회가 왔다. 외사촌인 문호월이 오케(OKEH)레코드 이철 사장에게 그를 소개한 것이다. 손목인은 피아니스트로 오케레코드 전속 악단에 들어갔다. 한 달 뒤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왔으니, 오케레코드 문예부장 금능인이 쓴 '타향살이'(원제는 '타향'이었다)에 곡을 붙여보라고 이철 사장이 권유한 일이다. 손목인은 가사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 여기며 5일 만에 곡을 써냈다(손목인이라는 예명을 이때 짓는다). 이제 손목인의 대표곡이 될 '타향살이'를 누가 부를 지가 남은 상황. 주인공은 1934년 2월 빅터레코드가 주최한 '전국가요대회'에서 2등에 오른 고복수였다. 손목인과 고복수는 한 달가량 집중 연습을 거쳐 곡을 녹음했고, SP(Standard-Playing Record, 우리말로 '표준시간 음반'을 뜻하는 말로 주로 LP 이전의 음반 형태로 통용된다-필자주)의 B면에 실려 발매된 '타향살이'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최초 A면에 실렸던 '이원애곡'이라는 곡이 '타향살이'에 밀려날 정도였다. 당시 고복수의 인기는 요즘 아이돌 부럽지 않았다. 공연 때 그를 보고 까무러친 여성팬도 있었으니까.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과 손목인의 대표곡이면서 한국 트로트계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과 손목인의 대표곡이면서 한국 트로트계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타향살이'를 발표한 이듬해, 손목인은 자신의 또 하나 대표곡이 될 '목포의 눈물'을 작곡한다(그는 이 곡의 악상을 얻으려 목포항 이슬을 맞으며 며칠 밤을 다녔다고 했다). 가사는 목포의 문학청년이었던 문일석이 썼다. 문일석의 시는 1933년 오케레코드가 지역 특색을 담은 노래를 보급하기 위해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낸 '제1회 향토찬가 가사 모집'에서 뽑힌 것으로, 그는 이후 마찬가지 진주 출신인 남인수가 부른 '뒷골목 청춘'의 가사까지 쓴다. 그리고 노래는 목포 출신 이난영의 몫이었다(문일석은 목포에서 악기점을 하던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이옥례로, '이난영'은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붙여준 예명이다.

이난영은 손목인에게 작곡을 배운 김해송과 결혼해 무려 9남매(두 딸은 어릴 때 잃었다)를 낳았다. 이들이 나중에 김시스터스와 김브라더스가 되는 건 한국 대중음악사의 소소한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고 납북된 김해송이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하면서 이난영은 자녀들을 홀로 키우며 엄청난 고생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65년 봄 세상을 떠났는데, 이난영의 장례식은 국내 최초 '연예협회가수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막 들어섰던 때라 집회가 금지된 때였지만 이난영의 장례는 예외로 허가를 받은 것이다. 손목인에 따르면 당시 회현동에서 현 세종문화회관까지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고인을 뒤따랐다고 한다. 참고로 '목포의 눈물'이 발표된 건 일제강점기 때라 종로서 고등계에서 가사에 시비를 건 적이 있다. 2절에서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의 "원한 품은"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철은 나름 지혜를 발휘해 "'원한'은 '원앙'을 잘못 쓴 것"이라 해명하며 고비를 넘겼다. 아픈 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한음저협)라는 곳이 있다. 1964년,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절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 마음 놓고 창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이다. 2023년 현재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웬만한 대중음악 가수, 작사/작곡가들이 가입되어 있는 이곳을 세우고 1~2대 회장을 지낸 사람 역시 손목인이다. 그는 일본의 국민 가수였던 미소라 히바리를 비롯해 일본 가수 100여 명이 음반으로 발표한 '카스바의 여인'으로 일본에서 큰돈을 벌 때 그곳의 저작권 시스템 덕을 톡톡히 본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고국에 적용해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손목인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36년 7월 첫 번째 아내 정계순과 결혼해 아들 셋을 두고 이혼한 그는 56년 3월 일본 활동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2년 뒤 오정심과 재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또한 한국 전쟁 때 한국군 제2군단 정훈 공작 대장을 맡았던 손목인은 67년 7월엔 파월장병 위문공연단장으로 활약했다. 박시춘, 박영호, 조명암과 함께 30년대 트로트가 음악적, 정서적 전형성을 갖추는데 일조한 인물로 평가받는 손목인은 생전에 가요 1천 여 곡과 뮤지컬 음악 50여 곡, 영화음악 10여 편을 남겼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대중음악인' 손목인을 살피는 글이다. 일본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노래를 만들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음악인 부문에 포함된 사실이나, 한국 전쟁 중 일본으로 밀항한 일 따위는 이 글에선 논외다(누군가에겐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록영화 음악 작업에 참여한 일도 불편할 것이다). 이광수의 친일 이력이 이광수 문학의 현대적 의미를 완전히 지울 순 없듯, '타향살이'와 '목포의 눈물'을 빼고 한국 대중음악사를 논하기란 어색하다. 적어도 이 글에선 그런 역사 정치적 과실보단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저작권)를 누릴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진 일이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 글을 여기에서 다룰 수밖에 없었던 건 손목인이 다섯 살 때까지 진주에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 손목인은 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봉조와 함께 ‘진주 재즈 페스티벌’ 개최의 명분이 되고 있는 인물로, 해방되던 해 이 땅에 들어온 미군들을 상대로 그가 위문 공연을 펼칠 때 연주한 레퍼토리가 다름아닌 스윙 재즈의 대표 스탠더드 'Sing Sing Sing(With a Swing)'이었다.

글 / 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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