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안개를 부르고 있는 정훈희. 곁에서 색소폰을 메고 지휘 중인 이봉조 (사진=유튜브캡처)
1970년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안개를 부르고 있는 정훈희. 곁에서 색소폰을 메고 지휘 중인 이봉조 (사진=유튜브캡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노동운동단체 바보회를 만든 기념으로 공장 동료들과 떠난 바닷가 야유회에서 전태일 역할을 맡은 홍경인이 모래사장 모닥불 앞에서 장기자랑을 펼친다. 장난기 어린 엉거주춤 자세로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유명한 씬에서 그가 부른 노래는 다름아닌 '맨발의 청춘'이었다. 최희준 노래, 유호 작사, 그리고 작곡은 이 글의 주인공인 이봉조다.

이봉조는 1931년 5월 1일 경남 남해군 창선면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받쳐준 덕에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중고등학교를 진주에서 다녔다. 특히 진주중학교 시절 만난 스승 이재호에게 배운 음악은 굵은 거름이 되어 평생의 이봉조를 만든다. 이후 진주농고에 진학한 이봉조는 미군 부대 담장 너머로 존 콜트레인과 소니 롤린스 같은 거장 재즈 색소포니스트들의 음악을 접하고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악기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연습 소리 때문에 하숙집을 다섯 차례나 옮겨야 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하지만 음악은 이봉조의 꿈이었을 뿐, 집에선 반대한 아들의 미래였다. 결국 1952년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럼에도 음악을 끊지 못해 김광수 악단에 픽업,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8군 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하며 덩치가 커진 공연 시장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신중현, 패티 김, 조용필 등이 모두 이봉조와 같은 시장을 거쳐 훗날 거물이 됐다.

단 그때만 해도 음악은 이상이었고 현실은 취업이었기에 이봉조는 졸업 후 서울시청 토목과에서 2년 동안 근무한다. 물론 그는 음악을 해야할 사람이어서 1961년 퇴직하고 미8군 무대 밴드마스터로 본격 활동을 시작하며 프로 음악가의 길을 재촉했다. 이때 만난 사람이 가수 현미다. 현미는 1957년 미8군 무대에서 칼춤 무용수로 활동했던 인물로, 생전 한 방송에 출연해 이봉조 덕분에 자신이 스타가 됐다며 그를 "나의 은인이자 스승, 애인이요, 남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현미는 그렇게 눈이 새카맣게 잘 생긴, 추운 겨울 트럭에서 자신에게 겉옷과 양말을 양보하던 이봉조와 3년을 만난 뒤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총각인 줄 알았던 26살 이봉조에겐 이미 딸이 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땐 현미의 뱃속에도 생명이 있었던 상황. 이봉조가 세상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한 것으로 보이는 본처 노전숙 씨의 <주간중앙> 인터뷰에 따르면 노 씨가 현미를 찾아가 "처자가 있는 사람이니 관계를 청산해달라" 사정을 했다고 한다. 노 씨는 그때 현미가 이미 (이봉조에게) 딸 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자신에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식으로 얘길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현미의 생전 증언과 엇갈리는 부분으로, 그는 이봉조의 딸 둘 존재를 몰랐던 나머지 "나는 모르겠고 미스터 리(이봉조)와 얘기하라. 나 임신 8개월 됐다"라고 노 씨에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봉조가 현미와 결혼 생활 중 본처와 사이에 아들, 딸 한 명씩을 더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봉조는 현미와 대외적인 부부 관계를 이어가며 노 씨와 자식들과도 '따뜻하고 자상한 아빠'로서 관계를 이어간 셈이다. 노 씨의 표현대로라면 당시 그들은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숨은 가족"이었다. 결국 현미와 이봉조는 1974년에 별거한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봉조가 다른 여가수와 일본 여행을 간 것 등이 이유였다고 하는데 사실 진짜 이유는 자신과 자식을 낳으면서(현미와 이봉조 사이에도 아들 둘이 있다) 본처와도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현미는 '나라도 물러나야겠다. 다시 본처에게 가 잘 살라'는 생각으로 이봉조와의 이별을 택했다.

현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이봉조는 어느날 술을 마시고 찾아와(그의 평소 주량은 맥주 한 병 정도였다) 야구방망이로 살림을 부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미는 생전 방송에 나와 "잠옷 바람에 밍크코트 하나 입고 애들 데리고 도망 나온 그날 (이봉조와) 영원히 헤어졌다"고 아프게 회상했다. 평소 자상하고 잔정이 많은 성격이었다는 이봉조 주변의 증언과는 배치되는 다소 거친 이야기다.

그럼에도 현미를 잊지 못한 이봉조는 홀로 가슴앓이를 했던 모양. 현미는 한 인터뷰에서 1987년(이봉조가 세상을 뜬 해다) 이봉조가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다시 찾아온 이봉조는 예전 그 잘 생겼던 사람이 아닌,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위아래 틀니까지 한 초췌한 사내였다.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나를 이렇게 놔둘 거냐." 이봉조의 말에 현미는 다시 건강하게 함께 살자고 화답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결합은 시작도 전에 끝나고 만다. 이봉조가 현미를 다시 찾아간 해 8월 31일,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자신의 클럽 '봉'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미 협심증과 당뇨 같은 지병을 앓고 있던 그는 당시 마지막 힘을 다해 서울올림픽 공연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현미의 말이다. "우리 운명이 거기까지 밖에 안 됐나 보다."

집 현관에 이봉조의 서예 작품을 걸어두고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 말한 현미의 운명도 지난 4월 4일까지였다. 사망 당일 9시 37분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쓰러져 있던 고인을 팬클럽 회장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던 것. 향년 85세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다시 만났을까.

이봉조를 얘기하며 가수 정훈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정훈희는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다. 부친이 일단 가수였고 오빠 다섯 중 네 명도 바이올린, 트럼펫, 오르간, 기타 등을 다루며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작은아버지 역시 한국에서 최고 규모를 자랑했던 그랜드 호텔 나이트클럽 악단장이었는데, 한 번은 작은아버지 피아노 반주에 맞춰 그랜드 호텔에서 정훈희가 외국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를 호텔 2층에서 식사하던 이봉조가 들었고 이 만남을 계기로 아직 색소폰으로만 녹음해둔 '안개' 음원이 두 사람 사이에 공유됐다. '안개'는 이후 가사를 붙여 정훈희가 두 번 만에 녹음을 끝내며 대중에게 전해진다.

TBC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를 10년간 이끈 이봉조는 그렇게 정훈희와 일본 동경 국제가요제('안개'), 그리스 가요제('너'), 칠레 가요제('무인도'와 '꽃밭에서') 등에 나가 입상하며 전성기를 누린다. 지금이야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 1위도 밥먹듯 하는 시대이지만 당시엔 드물고 귀한 성과였다. 정훈희가 "케이팝의 문은 이봉조 선생님이 열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MBC가 주최한 '전국 경음악단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해인 1962년 발표한 'It's a Lonesome Old Town' 번안곡 '밤안개'를 비롯해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종점', 개그맨 이주일의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까지 두루 히트시킨 이봉조. 현미와 정훈희 외에도 최희준, 차중락, 윤복희, 김추자, 박경애, 최백호, 김세환이 모두 그의 곡을 불렀다. 또 이봉조가 평소 흠모했던 세계적인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가 70년대 초 인삼이 색소폰 연주에 도움을 준다는 말을 듣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TV 쇼 프로그램에 나와 협연한 일은 이젠 전설처럼 회자된다.

현재 남해에선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봉조 음악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생활은 사생활일 뿐. 이봉조는 그럴 자격이 있는 음악가였다.

/단디뉴스 = 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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