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연출한 윤종빈 감독의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선 <추격자>로 유명해지기 전의 배우 하정우를 만날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 영화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용서받지 못한 자>는 같은 소대에서 병장과 이병으로 만난 옛 중학교 친구 둘이 예기치 못한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 병장 유태정을 연기했는데, 제대한 유태정의 휴대폰 벨소리가 바로 이 글과 관련이 있다. 백년설의 '대지의 항구'다.

'대지의 항구'는 창씨개명으로 일제 조선 탄압이 극에 이르렀던 1941년 3월에 발표된 노래로, 마음 둘 곳 없어 힘들었을 조선인들에겐 선물 같은 노래였던 걸로 전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맥락과 떨어져 '대지의 항구'가 한 청년의 핸드폰 벨소리가 됐을 때 노래는 이상한 엇박자를 타며 관객을 헛웃음 짓게 한다. '대지의 항구'는 지하철에서 곯아떨어진 태정의 바지 주머니에서도 울리고, 여자친구와 분위기 잡으려는 여관에서의 한 순간에도 울린다. 영화도 노래의 사연도 모두 비극인 곳에서 그 멜로디만은 일관되게 유머 코드를 머금은 묘한 순간이다.

또 다른 영화. 이번엔 고 윤정희 배우의 유작이 된 <시>라는 영화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비롯해 국내외 15개 상을 휩쓴 이창동 감독의 장편 데뷔작 <초록물고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배우 한석규가 열연한 막동이로, 그는 우연히 발을 들인 건달 세계에서 보스에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 사건 장면 중 노래 하나를 흥얼거리는데 다름 아닌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였다. 출세를 위해 화장실에서 자해하며 진짜 '불효'를 저지르는 막동이. 그의 안쓰러운 모습이 노래의 서글픈 멜로디와 가사에 중첩되며 마찬가지 비극에 이를 영화 전반에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조선의 '슈베르트'라 불린 작곡가 이재호 (사진=디지털진주문화대전)
조선의 '슈베르트'라 불린 작곡가 이재호 (사진=디지털진주문화대전)

'대지의 항구'와 '불효자는 웁니다'. 두 곡은 같은 사람이 작곡했다. 이재호. 본명은 이삼동이다. 1919년 10월 24일 생으로, 진주 풍류객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판소리 동편제 명창 이선유가 이재호의 큰아버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이 손에 자란 그는 트럼페터였던 형의 영향으로 음악에 입문했다.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이재호는 일본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 본과(바이올린 전공)에 진학해 2학년을 수료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갔다. 스무 살 때 콜럼비아레코드에 들어가 무적인(霧笛人)이라는 필명으로 준(準) 전속 작곡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얼마 뒤 태평레코드로 가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들인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북방여로', '대지의 항구' 등이 모두 이때 나왔다. 이삼동이 이재호가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이재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진방남(본명은 박창오)의 '불효자는 웁니다', 백난아의 '망향초 사랑', 채규엽의 '북천 오천 키로' 등을 연거푸 히트시키며 박시춘, 남인수 콤비로 승승장구하던 오케레코드에 맞먹는 태평레코드의 성장을 이끌며 그는 회사의 대들보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오케레코드는 마산 출신인 진방남을 자신들 회사로 데려가려 갖은 방법을 동원했는데, 진방남은 결국 입사 축하금 3천 엔, 전속 계약금 2천 엔, 월급 350엔을 조건으로 내건 오케레코드로 옮겨 간다. 이 금액이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당시 일반 가수 급료가 80엔, 일본인 최고 수입이라 했던 부립(府立) 병원장 월급이 수당 포함 220엔 정도였기 때문이다. 진방남은 '불효자는 웁니다'를 녹음하기 전 실제 모친이 세상을 떠나 더 애절하게 노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마산을 떠나던 날, 우산도 없이 비 맞으며 아들의 성공을 빌어준 어머니였다. 나중에 진방남은 반야월이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해지는데, 창밖 초승달을 바라보며 쓴 '넋두리 이십 년'을 계기로 1950년대 말부터 무려 3천 여 곡 노랫말을 써내 당대의 작사가로 이름을 떨친다. 진방남은 반야월 외에도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등 필명만 15개 이상을 썼다고 한다.

1943년 즈음 이재호는 전시(戰時) 물자 결핍으로 레코드 제작이 힘들어져 '태평연주단' 지휘를 맡아 조선, 만주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다. 그는 이 시기 만난 같은 진주 출신 무용수 김정선과 결혼한다. 하지만 그는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애주가였던지라 주위에 여자들이 많았고 숙취로 스케줄을 펑크 내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한 번은 진방남의 '잘 있거라 항구야' 생방송 반주 약속을 어겨 현장 지휘자였던 홍난파가 대타를 맡아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을 정도다. 술보다 더 심각했던 건 지병이던 폐결핵. 해방 뒤 '귀국선'을 작곡하며 존재감을 확인시킨 이재호는 결핵 치료를 위해 고향으로 와 모교인 진주중학교 교단에 선다(당시 이재호의 한쪽 폐는 제거된 상태였다). 이때 제자 중엔 훗날 유명 색소포니스트 겸 작곡가로 성장하는 이봉조도 있었다. 나라는 다시 민족 간 전쟁으로 상처를 입는 사이 이재호의 병세는 나아져 그는 부산방송국 경음악단 지휘자가 된다. 이재호는 한때 '태평 삼총사'로 불린 진방남, 백년설과 '서라벌레코드'를 창립하기도 했지만 신곡 발표 공연 정도를 했던 것 빼곤 사업 상 큰 성과는 없었다.

1950년대 초 영남 일대 음반사에서 금사향의 '홍콩 아가씨'와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 등을 히트시키고 서울 오아시스 레코드에 들어가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만들어내며 다시 전성기를 맞는 듯했던 이재호는 그러나 1956년 들어 결핵이 악화되며 마산 결핵요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아픈 중에도 예술가는 예술을 해야 했던 건지 문병 온 반야월이 그곳에서 본 한 여성의 인상을 그린 노랫말에 이재호는 신세 한탄하듯 곡을 붙였으니 그것이 '산장의 여인'이 됐다. 이 노래는 그 시절 '순정의 가희'라 불리던 권혜경이 불렀다.

1960년 6월 4일, 이재호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41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년 이상 형제처럼 지낸 진방남은 "큰 별이 떨어졌다"며 애통해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 투병 생활까지 겹쳐 이재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부인 김정선은 다방에서 일하며 4남 1녀 자식들을 키우다 1965년부턴 '대원각'이라는, 서울에서도 손꼽혔던 요정을 경영했다고 한다. 1970년대 들어 그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을 미국 LA까지 가져가 식당명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가수 주현미는 트로트와 신민요 정도에서 선을 그은 우리네 전통가요들을 다시 부르며 '한국 가요사 100년'을 나름 정리하려는 취지로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채널에서 다룬 곡들에 관해 소개글도 착실히 써나갔는데 그 글들을 엮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책 속엔 '귀국선', '불효자는 웁니다', '물방아 도는 내력', '산유화', '꽃마차'가 포함돼 있다. 모두 이재호의 곡들이다. 흔히 세상은 이재호를 가리켜 '조선의 슈베르트'라 부른다. 김소월의 시를 참조한 듯한 반야월의 가사와 이재호의 왈츠가 어울린 '산유화' 때문이었다. 이재호는 이 곡을 쓰고 "이래도 대중가요를 천시할 테냐?" 말했다고 한다. 같은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는 자신의 공연에서 '산유화'를 앙코르 용으로 아껴두었다 부르곤 했다.

생전 고운봉의 '남강의 추억'으로 고향을 추억한 이재호. 1996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해 대작곡가의 업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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