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CIC(특무부대),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에 의해 100만 명의 '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대상은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서 제1차~16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 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경상남도가 2021년에 유족의 뜻을 이어받아 2년에 걸쳐 각 시∙군(18개)의 유족들의 상흔을 녹취하여 증언록을 발간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천혜의 환경조건을 갖춘 지리산지척에 두고 있어 빨치산(유격대)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에 더욱더 보도연맹원들의 집단학살이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필자는 “70년 만의 증언”을 토대로 18개 시∙군의 유족들과 매장지를 현장 답사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민간인학살의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달 기사는 사천편 사연을 소개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자 경남유족 증언집1~5권

▶사천유족회는 위령제를 ‘사천왕사’에서 지낸다.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 중 사천지역 정치범은 진주형무소 구치소에 감금되었다가 학살되기도 하였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 25일(음력 6월 11일)부터 27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인민군 일부가 남아 있어서 미군이 촉석루를 폭격한 후 사천지역 학살이 본격화되었다. 즉, 보도연맹원 400~550여명을 삼천포경찰서나 동부파출소에 감금했고 삼천포초등학교에 예비검속되어있던 분들이 모두 학살당했다. 현재 매장지가 확인된 곳은 하일면 질매섬(마안도), 노산공원, 학섬, 온정마을 4지점이다.

그 외도 바닷가 부근이기에 수장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학살당한 사람 수 파악이 정확하지 않다. 사천유족회는 육지에 매장된 시신은 거의 수습하였고 매년 학살된 민간인의 위령제는 ‘사천시 사남면 심방길 144 ‘사천왕사’에 위패(50위)를 모셔 놓고 제를 올리고 있다. 사천왕사는 필자가 다니는 사찰이기도 하여 위령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반가웠다. 능륜스님은 학승으로서 역사의식이 있는 훌륭한 스님이다. 그래서 위령제도 받았던 것 같다.

▶6월 25일 진주 위령제 날

6월 25일 진주위령제 행사를 “초전공원 위령탑”에서 실시하였다. 필자도 위령제에 참석하였다. 이제는 진주 유족분들과는 포옹도 할 정도로 편하게 지낸다. 귀빈 소개에서 사천유족회장님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행사 마친 후 인사를 하고 이봉환 어르신(사천유족)의 연락처를 받았다.

▶어느 날 통화에서 가슴이 철렁

며칠 후 ‘이봉환 유족(현재 86세)’께 전화를 드렸다. 소개도 제대로 하기 전에 몇 마디 듣지도 않고 화를 벌컥 내시면서 전화기 속에서는 뚜뚜뚜 소리만 들린다. 사실 필자는 항상 유족과 통화할 때 조심스럽고 긴장이 된다. 72여 년간 유족들의 상흔을 들추는 일이기에 미안하고 또 죄송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 끝을 봐야지 하면서 용기를 내어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 신호가 간다. 여보세요. 어르신 제발 잠시만 제 말 들어 보시면 안 될까요? 순간 적막이 흐른다, 그리곤 “뭔지 말해보시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필자의 신분과 사정을 설명하고 "사천에는 지금 매장지가 사천(삼천포) 노산공원과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그리고 용현면 석계리 온정마을이 있다고 하시던데 혹시 저하고 동행하여 매장지를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봤다. “나도 농사짓고 바쁜데… 동행은 해 드리리다”. 다음 주 월요일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돌리니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진주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사천인데 사천 매장지는 어떤 사연이 있고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궁금했다.

▶학살지 질매섬(마안도) 이야기

삼천포 벌리동에 거주하고 계시는 어르신(이봉환)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삼천포 치매암센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키가 훌쩍 큰 분이 모자에 지팡이를 짚으면서 걸어오신다. 어르신께 인사를 하고 필자의 차로 모셨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이렇게 몸도 불편하신데 안내해 주셔서요". “아고마 좋은 일 하신다는데 내가 당연히 안내해야지요”하신다. "어르신 상처를 다시 되새기게 해서 미안합니다. 세 곳 중 어디부터 먼저 가실까요?". “나는 질매섬과 노산공원만 안내해 주겠소. 온정마을은 나도 잘 모른께…”하신다. "예!" 하곤 질매섬으로 향했다.

 

질매섬(마안도)의 전경
질매섬(마안도)의 전경

질매섬은 경남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에 속한 무인도로 사량도와 하일면 사이에 있는 섬이다. 질매섬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300여명으로 추정한다. 질매섬의 특징과 유래를 보면 질매란 길마의 사투리다. 길마는 소나 말 위에 얹는 안장같이 생겼다고 하여 길마 즉 마안도(질매섬)이라고 한다. 옛적에는 사람이 살았고 거주 당시 평평하게 일궈 놓은 밭이 있었다. 학살은 그곳과 모래밭에서 자행되었다.

질매섬을 자세히 보면 섬 둘레에 하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있다. 이것은 물살이 세다는 뜻이다. 겉으로 바라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이지만 이런 곳이 학살지라니 가슴이 아프다. 왜 질매섬을 학살지로 선택했는지 궁금했는데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이곳은 물살이 아주 센 곳이야! 그리고 뱀이 많이 서식했어.”하신다. 아! 역시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학살 만행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사악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상해죄로 끌려간 형님이 보도연맹원으로 둔갑되어 학살

질매섬으로 이동하는 동안 어르신과 대화는 계속된다. "학살당한 분은 누굽니까?". “한국전쟁 당시 맏형 이연조(당시 28세)씨가 동네 구장이었던 이○○(아버지 4촌)씨가 상해죄 고발로 삼천포 남양지서로 끌려갔는데, 이후 보도연맹원으로 둔갑되어 삼천포경찰서에서 노산공원으로 끌려가서 학살당했어요”. "맏형(이연조)은 삼천포 일출초등학교(현재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가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북해도 와니시 제철공장 지배인으로 지내다가 1949년 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해 4월에 곧바로 결혼하고 이듬해인 1950년 음력 6월에 끌려갔어요.“

"상해죄인데 왜 보도연맹원으로 둔갑 되었습니까?". “형이 끌려가기 전날 밤에 구장(이○○)과 지서 주임이 동생(이권환) 군대 소집영장을 전달하러 왔고, 그렇게 동생은 군대에 끌려간 후 형은 구장에게 동생의 영장 문제로 항의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있어 형이 구장에게 빰 한 대 때렸는데 구장은 제중병원에 3주 상해 진단을 끊어 형을 고발해버렸어”. "구장이 아버지 사촌인데 왜 그런 짓을 했어요?". “그러니깨 구장이 나쁜 놈이었어. 형이 끌려가고 3일 후 아버지도 경찰서에 연행됐는데 다행히 아버지는 아침에 석방됐어. 그때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셔서는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갔는데 그 사람들 다 죽였을끼라고, 질매섬으로 끌고갔을 거라고 했어"

▶질매섬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춘암 포구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질매섬에 도착했는데 어르신이 질매섬을 찾은지 시일이 오래되어 방향이 헷갈려 동네 주민께 여쭤보고 질매섬이 잘 보이는 춘암포구에 도착하였다.

(왼쪽)질매섬 전경 (오른쪽)이봉환 어르신

춘암포구에 도착하니 바닷바람이 세차다. 그런데 이봉환 어르신은 불편한 몸으로도 힘차게 포구를 걸어가신다. 포구 가까이 가서 보니까 꽤 파랑이 세차게 출렁거리며 어르신과 필자를 반겨주는 듯 철썩철썩 소리를 낸다. 포구 입구부터 질매섬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더니 포구 끝부분으로 가니 드디어 자세히 보였다. 이곳에서 보면 질매섬이 2개로 보이는데 사실은 2개가 붙어있어 한 개의 섬이다.

춘암포구에 도착하니 바닷바람이 세차다. 그런데 이봉환 어르신은 불편한 몸으로도 힘차게 포구를 걸어가신다. 포구 가까이 가서 보니까 꽤 파랑이 세차게 출렁거리며 어르신과 필자를 반겨주는 듯 철썩철썩 소리를 낸다. 포구 입구부터 질매섬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더니 포구 끝부분으로 가니 드디어 자세히 보였다. 이곳에서 보면 질매섬이 2개로 보이는데 사실은 2개가 붙어있어 한 개의 섬이다.

“이곳에서는 몇 명이 학살되었을까요?” “이곳에 끌려온 사람은 300여명 정도로 모두 학살되었어요. 당시 어머니와 머슴 그리고 나(당시 14살) 세 명이 삼천포 팔포항에서 배를 한 대 빌려서 질매섬을 들어갔어요. ”앞에 보이는 큰 섬과 작은 섬이 이어지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잘록한 곳에 모래가 짝 깔려있었는데 그곳에 시신을 끌고 가서 동그랗게 2인 1조로 세워서 모내기할 때 사용한 못줄로 묶어서 총을 쏘아 사살을 했데요.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면서 수장도 했어요”하신다. “배 위에서 던진 거지 뭐! 수장은 2인 1조로 손목을 묶을 때 돌을 네모 모양으로 갈아 만들어서 못줄과 손목을 묶었어요. 그래갔고 수장한 사람들은 조수간만으로 시신이 물속에서 떠올라서 시신을 건져서 찾아간 유족도 있어요. 당시 6∙25 때 못줄을 모두 걷어갔어요. 잘록한 곳으로 배를 정박하고 도착한 어머니와 머슴은 시신이 얽히고설키어 검붉은 핏속을 뒤지기면서 18구 정도를 찾았지만, 형은 없었어요. 밀물 때라 물이 허리까지 찼고 해는 저물었고 어머니는 이 자식아 꿈에라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하면서 통곡하셨어요. 망연자실한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어제같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그 말씀에 어르신은 눈시울을 적신다. “이제 노산공원으로 갑시다. 내가 노산공원 가서 자세히 설명해 주리라.”하셨다.

▶ 노산공원을 향하여

질매섬을 뒤로 하고 차는 삼천포 노산공원을 향했다. 노산공원을 가는 차 안에서 또 대화는 계속되었다. “내가 삼천포 살지만 노산공원은 절대 안 가요. 내가 그곳을 우찌가겠노! 눈물이 나고 그 당시를 생각하면 공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사실 어르신은 배를 빌려서 필자와 함께 질매섬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어르신이 지팡이도 짚고 연로하셔서 질매섬의 위치만 확인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어르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몇십 분 동안 노산공원으로 가면서 "어르신! 제가 전화를 드렸을 때 끊으셔서 제가 입장이 곤란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했더니 어르신이 “내가 진심으로 사과 할께요. 난 또 그런 김선생 사정을 모르고 그랬으니 미안하오!! 다음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드릴 테니”하면서 웃으신다. “이러고 다니면 여비는 우찌 충당하는고?”라고 하신다. 필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냥 제가 사비로 다닙니다. “아구! 참 고생이 많으시오.”라고 하신다.

"질매섬에서 형을 찾지 못하고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갔고 결국 형을 찾지 못하고 팔포항으로 돌아와서 노산공원 앞에서 어머니가 통곡하고 계시니까 그 동네 할매가 왜 이렇게 슬피 우시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니까 며칠 전에 새벽 세시경 노산공원에서 콩볶는 소리(총소리)가 타타타탕 다다다탕 났다고 전해주었어요. 다음날 노산공원으로 찾아 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노산공원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왼쪽)노산공원 표지 (오른쪽)전경
왼쪽)북쪽 노산공원 입구 (오른쪽)동서쪽에서 올라가는 입구
왼쪽)북쪽 노산공원 입구 (오른쪽)동서쪽에서 올라가는 입구

▶ 이연조(맏형)을 찾은 곳으로 무거운 발길을

주차를 하고 어르신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노산공원 북쪽 방향에서 올라가는 길이 옛길이다. 지금은 산책로와 다양한 나무로 심어졌지만, 옛길 그대로다. 당시 노산공원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40~50명으로 추정한다. 그때부터 어르신은 다리가 아파서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필자는 어르신 팔을 부추기고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조심 올라갔다.

 

(왼쪽)이봉환 어르신 뒷모습  (오른쪽)형이 학살당하고 시신을 수습한 장소
(왼쪽)이봉환 어르신 뒷모습 (오른쪽)형이 학살당하고 시신을 수습한 장소

그런데 어르신의 마음이 급해진다. 계단 올라서는 순간 어르신이 먼저 가시고 필자는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가시던 중 잠시 멈추시고는 “김선생”하면서 줄기가 6개로 뻗어 올라간 나무 한 그루 앞에 멈추신다. 지팡이로 나무를 가르키면서 “이곳이 형의 시신을 찾은 곳이요.”하신다. 어쩌면 산책로가 비슷비슷해서 어디인지 구분하기가 싶지 않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기억하신다.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어르신은 형의 시신을 찾은 장소 옆에 정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시더니 “아구! 다리가 아파서”하면서 의자에 덜컥 걸쳐 앉으신다. 어르신은 상념에 잠기시는 모습이었다. 어르신은 남쪽해안가 산책로를 가르키면서 “저쪽까지 가보시오. 해안가에서 올라오는 길까지 전쟁 방어기지로 구덩이를 파놓았어요.”하신다. 하곤 해안가 산책길을 따라 쭉 따라갔다. 옛날에 여기에 충혼탑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봉환 어르신이 형의 시신을 찾은 장소 옆 정자에 앉아 상념에 잠긴 모습
이봉환 어르신이 형의 시신을 찾은 장소 옆 정자에 앉아 상념에 잠긴 모습

▶어르신 형을 어떻게 찾았습니까?

"어르신 형을 어떻게 찾았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물었다. “당시 며칠 전에 시신을 찾아간 사람들도 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노산공원 입구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지금의 산책로는 한국전쟁 때 방어막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파고 총구멍을 만들어놓았어요. 그곳 구덩이에다 집어넣고 학살했어요.”

“형은 울대뼈에 총을 맞았고 다른 신체 부위는 아주 깨끗했어요. 어머니는 삼베와 당신 머리카락으로 짠 허리끈을 보고 형을 알아보았고, 나는 형의 금니로 시신을 확인하고 수습하여 모충공원에 묘를 만들었어요. 함께 찾은 시신은 6구 정도 되었어요. 형의 시신을 보시고 어머니는 기절하셨어요. 그날이 (음력 6월 17일) 형의 제삿날이요.”

 

북쪽에서 남쪽 해안가 방향 산책로
남쪽 해안가 방향 산책로

"그 후 어머니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머니는 큰아들의 죽음으로 생긴 상흔 때문에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넘기시고 98세까지 장수하시고 돌아가셨어요.“

 

구덩이를 파 학살지로 이용한 장소

"어르신 노산공원에 충혼탑을 옮긴 이유가 있습니까?“. "아! 그거요! 보도연맹학살지와 충혼탑은 서로 상충되니 장소를 옮겼어요.”. "어르신 혹시 이곳을 “보도연맹학살지 안내 표지판” 세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러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지 않을까요?”라고 하신다. 유족들의 대부분 생각이 옛정서와 유교적인 관점에서의 사고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많다. 즉 시민들이 혹시 혐오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인식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그동안 국가가 은폐하여 연좌제를 일삼았기에 유족들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살은 세월이니 그럴 만도 하다.

▶따뜻한 인삼차 한잔으로.

 

이봉환 어르신은 노산공원을 뒤로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오시는 모습과 댁에 도착한 모습
이봉환 어르신은 노산공원을 뒤로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오시는 모습과 댁에 도착한 모습

무거운 마음으로 노산공원을 뒤로 하고 돌아서면서 "어르신 간단히 식사라도 하시지요? 하니까“그럽시다.”하신다. “중국집으로 갑시다. 내가 안내하리다.”어르신은 삼천포에 있는 단골 중국집으로 안내하셨다. 주인장과 인사도 나누시고 만두 서비스도 주신다. 짜장면과 소주 한 병을 주문하신다. 식사 중 술 한 병을 후딱 드셨다.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 댁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 집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가시오.”하신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단호하셨다. 실례를 무렵 쓰고 잠시 들어가니 아내와 따님이 함께 살고 계신다. 오래된 아끼는 인삼차를 내어놓으신다. 간단히 마시고는 인사를 하고 댁을 나섰다.

▶용현면 석계리 온정마을 매장지는

온정마을 석계리는 유족이 연로하셔서 필자와 동행해 주실 분이 없어 답사하지 못했다. 그곳은 사천 정동면 보도연맹원들이 40~50명을 트럭에 싣고 삼천포 바닷가에 수장시키기 위해 가던 중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트럭이 고장 나버렸고, 그래서 삼천포 바닷가까지 못 가고 온정마을 입구에서 학살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시신은 한 달쯤(8월 25일경) 후 인민군 점령기(이하:인공시)였기에 시신 수습이 가능했다. 어느 지역이나 인공시기는 학살지에 인부를 동원시켜 시신을 수습하는데 독려해준 것이 인민군이었다.

▶잔혹하고 사악한 가해자들

어르신은 잔혹하게 형을 죽인 살인마 주모자를 알고 계신다. 삼천포경찰서장 이○○은 남해 이동 사람이었고 동부경찰서 순사 박○○이는 총잡이였다. 그리고 이○○는 형을 고소한 사람이다. 훗날 이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만나질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영도다리에서 저만치 걸어오는 한 사람을 유심히 보니까 이○○였다고 한다. 순간 상대도 이봉환 어르신을 보고 도망가는 걸 쫓아갔지만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잡지 못했다. 지금도 잡히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고 하신다. 어르신의 상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맺는 말

사천지역 매장지를 다니면서 느낀 점은 유족들이 시신을 거의 수습해 갔다는 것이다. 가까운 진주에서는 보복이 무섭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인민군이 입성하기 전에 학살했기에 수습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천지역은 인민군이 입성하여 경찰서와 지서 문을 열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깐 경찰서 근무자들이 명단을 공개하면서 질매섬은 몇 명 명단이 공개되었고 노산공원도 누가 학살되었는지 명단이 공개되었다. 그랬기에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신다. 하지만 진실된 역사를 드러내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유족들의 생각이 안타깝다. 또한 사천유족분들이 거의 80세 중반을 넘어 노령이라 활동하시는 데도 한계와 어려움이 봉착되어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천시는 청산되지 않은 사천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조사하여 '잘못된 역사' 즉 국가의 폭력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장소에 표지판을 세우는 것이 책무이다. 하루빨리 노산공원에 학살지 표지판이 세워지길 기대해본다.

 

다음 16회 계속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