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네 형제의 피학살지 및 합동묘지를 찾아서”

《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경상남도가 2021년에 유족의 뜻을 이어받아 2년에 걸쳐 각 시∙군(18개)의 유족들의 상흔을 녹취한 증언록을 발간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천혜의 환경조건을 갖춘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있어 빨치산(유격대)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에 더욱더 보도연맹원∙민간인학살∙정치사범이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필자는 “70년 만의 증언”을 토대로 18개 시∙군의 유족들 사연과 매장지를 현장 답사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민간인 피학살지의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달 기사는 밀양편 2부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남유족 증언집 1~5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남유족 증언집 1~5권

▶김원봉(호:약산)의 친조카 김용건과의 만남

필자가 밀양에 답사 갔을 때 미전고개에서 약산 4형제가 학살된 곳이라 듣고 ‘의열기념관 학예사’와 대화하다가 약산의 친조카(김〇〇)가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물론 암암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필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귀가 솔깃해진다. ‘그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하니까 학예사가 '한 달 전에 ‘의열기념관’에 다녀갔습니다’라고 한다. '정말요? 그럼 어디에 사십니까' 물으니 ‘밀양에 거주하십니다.’ 라고. '어떻게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하니, ‘밀양독립운동연구소’의 회원 중 전〇〇라는 먼 친척이 있으니 연락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라고 한다. 사실 중국역사탐방에서 몇 차례 만난 약산 외조카 김태영 회장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의 차남)을 만나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회장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필자랑은 직접적으로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던 터라 조심스러웠다. 고민 끝에 지인 중 정원식 박사랑 김 회장과 연락하고 지내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 박사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필자는 김 회장을 중국답사에서 첫 대면 했을 때 너무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외조카인데도 ‘약산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어머나! 어쩜 저렇게 약산 선생과 꼭 닮았노’라고 주변 교사들과 손으로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정 박사가 연락이 왔다. 김 회장은 필자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보곤 친조카(김용건)의 연락처를 주셔서 필자의 손에 친조카 김용건의 연락처를 받게 되었다. 항상 유족과의 통화는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마침 김용건은 사전에 김 회장과 연락을 취한 터라 필자가 전화했을 때 반갑게 받아주셨다. 남양주에 거주한다고 했다. 70년의 상흔을 어찌 몇 시간 통화로 쏟아 낼 수 있겠는가! 장시간 통화를 하고 끊었다. 통화 후 가슴이 멍해진다.

 

약산의 친조카와 외조카임에도 불구하고 혈통임을 위 사진이 뚜렷이 증명한다. 약산이라는 거목의 그늘 아래서 70여년 넘게 묻혀있던 네 형제의 학살당한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그전에 약산 행적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약산 김원봉의 해방 후의 정치적 행적

약산은 의열단 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등으로 활동했던 일제하 반일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해방 직후를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金若山장군으로 불렀으며, ’혁명애국투사‘로 칭송하였다.(주1) 때문에 그가 귀국하기 전 개최하였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전국인민위원’ 5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주2)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의 군무부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주3) 약산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을 통해 충분하게 알려졌으며,(주4) 역사적 평가와 관련한 논란이 거의 없다.

▶약산 김원봉 월북한 이유

1946년 2월 21일 좌익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그 댓가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폭행과 구금’을 당하는 등의 ‘테러 위협’ 상황에서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 후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서거를 애도하며 “정치적 주장이 다른 것을 구실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그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그의 죽음을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커다란 창상을 남기는 것”으로 기리며,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지도자를 넘고 끊임없는 “투사의 전진은 계속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주5)

1947년 8월 2일 미군정은 〈제5호 행정명령〉을 통해 8월 11일에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 소속 단체 등에 대해 폐쇄와 일제 검거를 단행한다. 8월 12일 새벽 수표동 소재 약산 자택도 수색당하고 체포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승엽이 무일푼으로 지내고 있는 약산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약산은 신변 위험(주6)과 함께 생활고도 컸다고 한다. 1948년 4월 9일 민전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인민공화당은 김원봉 외 7명이 새로운 정치무대인 평양으로 출발하였다.(주7)

‑참고로 송진우 동아일보사장 1945.12.30. 암살, 여운형 1947년 7, 19 암살, 김구 1949년 6.26. 암살, 장덕수 1947년 12, 2 암살, 조봉암 1959년 7.31 사형 등 이승만의 반대 세력은 형장 이슬로 사라진다.-

▶약산 김원봉(백부)의 형제사

약산의 형제사를 소개하면 9남 2녀 중 아래 표와 같이 네 형제가 약산의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잡혀가서 구금되어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에 학살당했다.

 

▶ 약산 김원봉(큰아버지) 가족은

1부에서 소개했듯이 약산은 1916까지 밀양에서 거주하였고 1916년 봄 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약산은 1931년 의열단장으로 활동 중 박차정과 결혼한다. 박차정은 1938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당한다. 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함. 그 후 약산은 최동선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는데 가족과 함께 월북(1948.4.9.) 이후 현재 가족의 생사는 모른다.

▶학살당한 다섯째 백부 김용봉 가족은

학살된 김용봉은 당시 32세였다. 슬하에 3남 1녀 두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김용봉을 끌고 갔다. 김용봉의 장남은 당시 9세로 아버지가 잡혀가는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다행히도 용봉 자녀들은 어머니 박순남의 친정인 외가집이 재력이 있어서 어머니가 담배 점포를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살았다. 그리고 김봉철(백부)의 도움도 받았으며 외가 덕분에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도 시키고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한 유일한 가족이며 밀양에서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연좌제 감시로 숨죽여 살았다.

▶학살당한 일곱째 백부 김봉기 가족은

학살된 김봉기는 당시 28세였다. 슬하에 1남1녀 두었는데 밀양군 단장면에서 살고 있을 때 잡혀갔다. 장남은 부산으로 이사 간 후 천일여객에 취직하여 근근이 살았고 집은 판자집에서 남의 담을 끼고 있는 허술한 구멍가게로 연명하였다. 항상 '아버지 없는 세상 연좌제 등에 지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싶네요.’ 한다.

▶학살당한 여덟째 백부 김덕봉 가족은

학살된 김덕봉은 당시 25세였다. 자녀 1녀를 두었다. 딸(경애)은 큰집에서 살았고 거의 식모 노릇을 하면서 눈칫밥을 얻어먹었다. "아버지가 학살당하자 어머니는 봉철 큰아버지를 찾아와서 재혼해야겠다고 하여 허락받고 재혼하고 경애의 삶은 그저 허드렛일만 하면서 연명하였어요" 라고 말 문을 닫으셔서 필자는 시 한편으로 경애의 삶을 표현하고자 한다.

 

▶학살당한 아홉째 백부 김구봉 가족은

학살된 김구봉은 당시 22세였으며, 부산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1남이 앞에서 소개한 약산의 친조카 김용건이다. 김용건의 일대기는 3부에서 소개하겠다.

▶학살당한 백부의 자녀들의 속마음

약산이 1948년 4월 9일 가족과 함께 월북할 때 부모님과 형제와는 상의 한마디 없었다. 과연 약산은 남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연좌제나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 서린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약산 월북 후 사촌 형들에게는 경찰들이 가끔씩 찾아왔고 암암리에 감시당하고 살았다.

▶네 명의 백부가 잡혀간 이후 부모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나

사실 백부님들은 약산이 1958년 4월 9일 월북한 후 다른 보도연맹원과 달리 ‘요주의인물’로 분류되어 몇 차례 검거당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꺼번에 끌려갔다. 할머니가 어느 날 밀양경찰서에 국밥을 사서 먹인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딱히 상의할 곳도 없어 막막했단다. 밀양경찰서는 구금 인원이 넘치자 일부는 허름한 창고에 구금 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당했는지 매장지가 어디인지 철저히 은폐했다. 밀양은 방어지역으로 집행 날짜가 다른 지역보다 늦었다 제사 날짜는 음력 6월 30일로 (양력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 정해 모셨다.

▶나머지 네 명의 백부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김익봉(4남)은 어릴 때 요절하였고 김춘봉(3남)김경봉(2남)은 부산에 가서 살았기에 학살을 면했다고 한다. 마지막 김봉철(6남)은 형제가 잡혀갈 때 소식을 듣고 남천강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살아남아 밤중에 마산으로 도망쳐서 어느 마을 폐가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곳까지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세 명의 자식을 보고 잡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봉철(백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항만 노역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전쟁 기간 내내 돈을 모았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성공하여 험한 세상이 잠잠해졌을 때 밀양으로 들어와 최고의 부자 소리 들을 정도였으며 군 의원직도 역임했다. 백부는 학살당한 형제들의 처형지를 찾아 유골이라도 거두기 위해 백방 수소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 치하에서는 헛수고였고 마침내 4∙19혁명이 발발하면서 철옹성 같은 이승만 정권도 무너졌다.

▶막내 고모 김학봉의 시련

김학봉은 한국전쟁 당시 18세였으며 오빠들은 약산(큰아버지)과 내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잡혀가고 오고를 반복했다. 고모도 몇 차례 잡혀가서 허름한 창고에 구금당하고 있을 때 화장실이 없어서 고생했다고 한다. 그 후 1947년 8월 미군정이 행정명령을 내려 약산 자택을 수색하던 날 고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산 집에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서 경찰에 잡혀가서 물고문과 모진 폭행을 당했다. 4부에서 고모(학봉) 차남 김태영 일대기 편에서 자세한 사연을 쓰고자 한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정치사는

모진 세월을 숨죽여 살다가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과도 권한대행 체제를 거쳐 6월 15일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양원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 체제 때 장면 정권이 들어선다. “전국에서 유족들의 분노”가 들끓어 오르자 제4대 국회는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경남과 전남 등 학살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까지 했다.(주9)

▶4∙19혁명(주10)직후 밀양 유족들의 들끓는 소리

당시 밀양 유족들도 밀양경찰서에 몰려가서 항의하자 사찰 계장 나모 씨가 삼랑진 미전고개와 청도군 곰티재에서 학살했다고 자백한다. 그 소식을 들은 유족들은 ‘소복을 차려입고’ 직접 매장지를 찾아서 유해를 찾기 시작하였다. 김봉철(백부)은 장례위원장을 맡아서 장례식을 추진했다. 그 결과 미전고개에서 150구 곰티재에서 180구 모두 330구를 발굴하여 밀양공설운동장에 모셔놓고 밤새워 개체수를 분리하고 수십 개의 목관을 만들어 유골을 관에 넣고 위령제와 군민합동장례식을 지낸 후 약산 김원봉 선산(부북면 용지리 163-2) “합동묘지”을 만들어 안치했다.

 

▶1961년 5∙16쿠테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발생⦗결정사안⦘

그러나 박정희 5∙16 쿠테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이 피해자들을 예비검속한 후 ‘혁명재판소’에 회부하여 소급법인 특별법을 적용, ‘소급효금지의 원칙’ 및 ‘증거재판주의’를 위반하여 사형 등 중형을 선고하여 복역케 하고 적법한 절차 없이 군경에게 집단 살해된 피학살자들의 유골과 합동묘∙비를 경찰이 강제로 훼손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를 중대한 ‘인권침해행위로 확인하고 진실규명’으로 결정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한 사례(주8)를 적용시켰다.

▶약산의 혈육으로 지독한 이념의 고리

이듬해 1961년 5∙16쿠테타 세력은 김봉철(6남)에게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주도한 인물로 체포하여 ‘혁명포고령 위반죄’를 적용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김봉철은 사형선고 받고 규명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서 재심 소송비용으로 사용하여 항소심에서 6년 7개월로 감형받았다.

 

당시 약산이 숙청당한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혈육의 이념의 고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김봉철은 1968년도에 출소해보니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내가 살던 정든 땅 밀양에서 내 어이 이 땅을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한탄하였다. 군사독재의 감시 속에서 하루하루 여생을 술과 함께 박정희 욕을 섞어 고래고래 지르면서 살다가 끝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은 조카들도 모두 연좌제에 신음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었다.

-김용건 친조카는 1기 진화위에 김봉철 백부와 세 분의 학살당한 백부의 ‘진실규명 신청’하여 “5∙16쿠테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2009.12.4.)”에서 4~5년에 걸쳐 승소하는 고난의 사연은 3부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

▶끝나지 않은 살생부의 흔적 합동묘지(부관참시와 화형)를 찾아서

 

합동묘지에 안치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5∙16쿠테타로 권력을 탈취한 박정희 일당이 ‘합동묘지’를 파헤쳐서 '부관참시(剖棺斬屍)와 화형(火形)’시켜 ‘330여구의 유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빈터만 남았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것도 모자라 두 번 죽이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찾아갔다. 필자가 두 번째 답사로 이곳을 찾았지만, 전화상으로 합동묘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용건께 밀양 선산에 내려와 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드렸더니 쉽게 허락하여 세 번째 답사 날 10월 16일 드디어 밀양역에서 상봉하기로 약속한다.

필자는 통화만 몇 차례하곤 처음 뵙는 김용건을 밀양역에 30분 전부터 가서 기다렸다. 괜히 긴장되고 묘한 감정이 교체한다. 기차가 도착하고 초조하게 기다려도 나오시지 않는다. 혹시 알아보지 못할까! 물론 서로 사진만 본 상태였다. 조금 후 필자를 먼저 알아보고 바로 앞으로 오셔서 인사를 하신다. 오랫동안 만나왔던 지인처럼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 여자 두 분과 남자 한 분이 더 있었다. 잠시 소개한다. 사실 부산에서 사촌 모임이 있었는데 오늘 밀양 간다니까 ‘오빠! 밀양은 왜 가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산에 간다고 했더니 ‘그럼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하여 함께 온 것이란다. 6남(김봉철)의 두 따님과 큰 사위와 함께였다. 일행과 함께 사전에 약속한 대로 김주익 할아버지 제적등본을 발급받기 위해 밀양시청으로 향한다.

 

제적등본을 발급한 김원봉 제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제적등본을 발급받고 바로 선산을 향했다. 합동묘지 장소를 찾으면 임시표지판을 설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간단히 내용을 써서 준비하였다. 합동묘지 장소를 찾는데 동행한 큰딸이 당시 초등학교 1학년 때 ‘공설운동장에서 아버지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시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유명하신 분이구나 생각만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공설운동장에서 시발택시를 타고 합동묘지까지 따라왔어요.’라고 한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합동묘지 자리가 바로 여기라고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김용건도 이곳이 맞는데 주변에 새로운 타인들의 새 묘지가 생겼고 오랜 시일이 지나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두 분의 기억으로 겨우 장소를 찾았을 때 매우 감동적이었다. 60년이 넘게 흔적을 찾지도 못하고 방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장소를 자세히 보니 파묘흙이 인위적으로 양쪽에 솟아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 준비한 자료를 설치하고 간단히 막걸리 한잔을 올리고 절을 하였다. 김용건과 ‘역사적인 한 장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게 되어 필자는 매우 만족스럽고 흐뭇했다. 간단한 채록과 질문지를 준비하여 뜻있고 의미 있는 장소인 의열기념관으로 출발한다.

▶밀양 의열기념관으로 향한다.

 

만남의 장소를 찻집으로 할까 하다가 의열기념관이 의미가 있을듯하여 학예사(이준설)와 상의하여 의열기념관 옥상에서 채록하기로 하였다. 1시간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채록을 마쳤다.

 

그리고 의열기념관에서 기념 촬영도 하였다. 의열기념관은 약산이 태어난 생가터이다. 김용건은 의열관을 보면 "그래도 밀양땅에서 이 정도만 있으면 되었구나! 싶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한다. 큰아버지로 인한 가족들의 상흔을 생각하면 때론 원망도 했지만, ‘역사 교과서에 서술되어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기분이 좋다고 한다.’

 

마침 의열기념관에서 홍익대 부속고교에서 견학을 온 학생들을 만나게 되어 약산의 친조카라고 소개하니까 학생들이 환호와 손뼉을 치는 모습이다. 이 또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이 약산의 친조카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뜻있는 만남을 뒤로 하고 여동생들이 큰어머니 묘지에 가보고 싶다고 하여 박차정 묘지를 향했다.

▶약산의 처 박차정 묘지를 찾아서

 

필자는 5~6년 전에 박차정 묘지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묘지가 허름하고 아주 초라하였다. 그런데 밀양시청에서 노력하여 잘 단장된 모습으로 바꿔서 아주 흐뭇하였다. 매년 시민단체에서 성묘하는 모습도 봐왔다. 해질 무렵이라 서둘러 내려와서 함께 식사후 김용건은 서울행 6시50분 열차를 탈 수 있도록 밀양역에 모셔다드렸다. 문자로 확인한 결과 밤 12시 넘어서 댁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70년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만남은 기약 없이 막을 내렸다.

▶맺은 말

필자는 전국으로 자원봉사 유해발굴을 다니면서 한탄이 절로 나왔지만, 경남지역의 학살지와 유족을 만나고 찾아다니면서는 분노와 한탄이 서린 마음이 더욱 들끓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족들을 두 번 죽이는, 1961년 5월 16일 쿠테타 이후 박정희 일당은 경남 전역에 합동묘지를 총화(銃火)와 휘발유로 쏘아죽이고 태워 죽인 사연과 묘지를 찾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느 민족도 그렇게 ‘무차별 사살’을 ‘두 번’이나 하지 않았다. ‘학살당한 자는 조국을 무어라 부르며 쓰러졌을까’ 유족들은 혁명재판’에서 사형이나 구형이 선고되었다.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사님이 경남∙경북지역은 유일하게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건이 은폐되고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규정한다. 사실이다.

경남도민 여러분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아픈 역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음 18회 밀양편 3부(김용건), 4부(김태영) 계속됩니다...

 

 

⟦각주⟧

주1) 대표적인 것이 조선건민회 회장 이극로의 평가이다. 자유신문 1947년 4월 5일, 「革命愛國鬪士 賤待는 憂慮事」). 해방 직후 김원봉에 대한 소개 글로 李如星, 「金若山論」,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4일; 김오성, 「金元鳳論」, 指導者群像 1, 대성출판사, 1946; 李鉉相, 「김원봉 장군론」, 노력인민 1947년 6월 25일 등이 있다.

주2) 매일신보 1945년 9월 7일,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

주3)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 「인공의 정부 부서 발표」.

주4) 대표적 연구성과로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이원규, 약산 김원 봉, 실천문학사, 2005; 한상도,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 역사공 간, 2006;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 창, 2008; 염인호, 「김원봉: 의열투쟁 과 무장독립운동의 선구자」, 한국사 시민강좌 47, 일조각, 2010 등이 있다.

주5) 김원봉, 「몽양 려운형선생의 비보를 듣고」, 노력인민 1947년 7월 25일.

주6) 1948년 3월 8일 열린 장덕수 살해사건 군사재판에서 테러범들은 “김원봉 박헌영도 죽 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고 증언하였다(동아일보 1948년 3월 9일,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주7) 서울신문 1948년 4월 14일, 「민전 산하 각 단체 대표 80명이 남북협상 참석차 평양 출발 발표」.

주8) 〈1기 위원회→ 제3부 제3소위원회 사건〉,「5∙16쿠테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진실∙화 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12.04.

주9) 김기진 지음,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역사비평사, 2004년, 6월 1일.

주10) 1960년 4∙19혁명 요지(3월15일 이승만 부정선거,제1차 마산 시위, 4월11일 김주열 학생 시신 발견, 제2차 마산 시위→전국시위확대, 4월18일 고려대학생 피습사건, 4월 19일 혁명 발발, 4월 24일 자유당 총재직 사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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