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면 장대산 능선 봉강리 학살지를 찾아서”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CIC(특무부대),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에 의해 100만 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서 제1차~16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 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연재한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경상남도는 2021년 유족의 뜻을 이어받아 2년에 걸쳐 각 시∙군(18개) 유족들의 상흔을 녹취하여 증언록을 발간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천혜의 환경조건을 갖춘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있어 빨치산(유격대)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에 더욱더 보도연맹원∙민간인학살∙정치사범이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필자는 '70년 만의 증언'을 토대로 18개 시∙군의 유족들 사연과 매장지를 현장 답사하여 청산되지 않은 학살지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달 기사는 최근에 발굴 작업이 있었던 진주편 집현면 봉강리 발굴지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진주시에서 처음으로 유해발굴 예산을 지급하다

그간 진주지역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매장지 24개소 중 8개소가 발굴됐지만, 지자체에서 발굴비용을 지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2022년 진주유족회장(정연조)가 진주시청을 여러차례 방문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진주시가 이에 화답하면서 5월 말경 예산집행이 이루어졌다. 하여 2022년 6월 2일부터 23일까지 봉강리 유해발굴장을 대상으로 한 조사와 발굴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필자는 진주시장(조규일)과 행정담당자, 진주시의원들이 진주유족의 애절한 마음을 살펴 발굴 비용 예산을 편성한 것에 경의를 표한다. 진주시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다. 반면 아프고 슬픈 역사 암흑의 역사도 존재하는 도시이다. 즉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지' 중 진주지역이 '보도연맹원' 피학살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도시이다.

진주시가 좀 더 ‘건강한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픈 역사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슬픈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청산할 수 있는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건강한 시민의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아픈 역사를 안고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유족들이 고령이고, 1세대는 부모와 형제들의 억울함을 청산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에 이 사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진주시의 적극적인 관심이 있을 때 진주시민도 아픈 역사를 청산하는데 앞장서는 진주시 의 정책을 공감하고 지지할 것이다.

 

▶집현면 봉강리 시굴 아닌 시굴 날

집현면 봉강리 매장지는 봉강마을 입구에서 장대산 북서자락 능선을 따라 500m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10여 년 전 봉강리 마을에 사는 윤〇〇 증언으로 전 진주유족회장 강병현과 유족들이 직접 매장지를 파보았다고 한다. 70cm정도 팠지만 유해가 나오지 않아서 윤〇〇에게 유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윤〇〇가 직접 올라와서 “더 파야한다카이 내가 그때 딱 본 기라 그래서 안다 아이가 1m 정도 더 파야 나온다니까!”라고 하셨단다. 다시 1m 정도 더 파니까 유해가 드러나서 확인 후 그대로 묻고 표지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10여 년이 흐른 2022년 6월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간단한 측량과 조사가 이루어지던 날 필자는 매장지를 찾아가기 위해 장대산 매장지 입구에서 유족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장대산 매장지 입구에 도착하니 33번 국도 아래였다. 북쪽방향으로 집현면 현대아파트가 보인다. 유족들은 긴장한 채, 찹잡한 마음으로 장대산 매장지를 향했다. 필자도 뒤 따랐다. 유족들에게 "이곳에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습니까?" 물었더니 다들 한결같이 손과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 아니! 우리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학살당했는지 전혀 모른다 아이가!!” 라고 한다.

 

유족을 뒤따라 한참을 오르니 숲속 표지판이 우리를 반긴다. 왜 이제 왔냐고 원망하는 듯했다. 표지판은 훼손되지 않고 깨끗하게 매장지를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짠한 마음이 들었다. 여느 산속 숲과 똑같아 보이는 이곳이 매장지라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매장지 옆에 매우 큰 소나무 몇 그루 우뚝 서 있어 애사롭지 않게 보였다. 나중에 발굴하다 보니 유해 발 뱡향 옆에서 유해의 혼을 양분 삼아 자란 것 같았다. 이 소나무는 그날의 참담함과 처절한 현장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번 봉강리 발굴은 유족에게 첫 기쁨

며칠 후 개토제가 시작되었다. 진주시에서 처음으로 발굴예산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10여 년간 알고 있으면서 발굴도 못 한 채 가슴앓이만 하고 있던 유족들에게 단비가 내려진 것이다.

 

▶봉강리 매장지는 몇 명이 학살되었는가? 한 트럭? 두 트럭?

봉강마을 사람들의 목격과 증언이 정확하지 않다. 몇 구가 드러날지 궁금하고 긴장되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며칠은 포크레인 작업을 해야 하니까 발굴 자원봉사자는 며칠 후 오라고 하였다. 며칠 후 발굴장에 도착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고 한탄만 나왔다. 필자가 다닌 발굴지 중 가장 정확하고, 훼손도 덜 되고, 개체수도 육안으로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유해는 나란히 드러나 있었다. 유해는 72년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폭 1m 50cm, 깊이 1m, 길이 15m 긴 구덩이에 50여 명의 유해는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가해자는 다리 방향에서 일렬로 서서 머리를 향해 격발하여 학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권총으로 확인 사살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결국 한 트럭에 실려와 40~5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 권총 탄피와 칼빈 탄피로 보아 학살자들은 군인과 경찰로 추정됐다. 탄피가 100여 개 이상이 나왔다는 것은 한 사람당 2발 이상을 쏘았다는 뜻이다.(주1) 길 다란 구덩이가 선혈로 물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고 섬뜻하다.

 

▶필자는 이름 모를 1, 2번 두 분의 유해와 만나다

발굴장에는 규정이 있어 아무 곳에서나 발굴할 수 없다. 발굴단장이 지시한 곳에서만 발굴을 할 수 있다. 원장이 필자에게 북쪽 위쪽에 있는 유해 1번 2번(발굴장에서 정해지는 번호) 두 분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발굴 도구를 준비하여 흙에 앉으면 “안녕하세요. 저와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서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께요”라고 인사를 하고 발굴을 시작했다.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두개골 형태가 잘 드러나 있었고, 한 분의 유해에는 총상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신체도 건장하고 장신이었으며, 치아 금니가 노출되었다. 한 분은 가슴뼈도 남아있었다.

 

사실 가슴뼈와 좌골과 골반은 약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드문데 41구 중에서 유일하게 한분이 노출되었다. 목 부위 흙을 계속 파니까 하얀 치아와 금니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며 노출됐다. 매우 반갑고 설레였다. 발굴자만이 느끼는 묘하게 흥분되는 순간이다. 발굴장에서는 특별하고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부위나 유품이 노출되면 환호와 관심도가 집중된다. 검은 선이 살며시 드러나면서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고 계속 흙을 팠다. 길다란 전선이 확인됐다. 손목과 손목을 결박한 상태는 2인 1조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수법인데, 진주지역 발굴장의 특징이다. 골반 사이로 4혈 단추가 나왔다. 여름이라 옷감은 흔적조차 없고 키가 장신이라 구덩이 폭이 좁아 발목이 접혀서 신발이 구겨져 있었다. 학살당시 발을 제대로 뻣지 못했던 것 같다. 1번 2번은 신발도 검정 고무신이지만 구두형, 즉 굽이 있는 신발이었다. 고급신발과 금니치아 등 유품을 보니 부유층의 사람으로 추정이 됐다. 유품은 학살당한 자들의 직업이나 신분, 성별, 연령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집현면 봉강리 발굴은 성공적이다

이번 봉강리 발굴 노출 현장을 보면서 유해 41구와 유품 416점이 발굴되어 ‘역사문화재연구원장’의 발굴의 능력이 매우 우수함을 입증하는 증거라 생각됐다. 필자는 봉강리 발굴현장을 보면서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지역 매장지 24개소 중 12개소(명석면 10개소, 집현면1, 수곡1)가 구 진주형무소(상봉서동)에서 반경 20km 이내에 위치한다. 발굴한 유해 중 봉강리 발굴장에서 드러난 '유해 상태가 가장 양호'하였다. 72년 세월 동안 매장지가 훼손되지 않고 원상 그대로 존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외 3개소에서 발굴된 유해는 뒤섞어 노출되었기에 DNA 검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봉강리 발굴지는 DNA검사가 가능한 모습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DNA검사 통해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의 실체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의미가 있는 발굴지라 할 수 있다.

 

▶봉강리 매장지에 학살당한자들은 누구인가!

1950년 7월 21일~26일,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기간이다. 봉강리 매장지는 학살 당시 용수를 쓰고 올라왔다는 증언도 했지만, 유골과 유품을 검토 확인한 결과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현장이라고 한다. 일부는 출퇴근이나 등하교길에 끌려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유해 41구가 확인되었고 두개골이 39점, 유품 416점이 발굴되었다.(주2)

 

 

봉강리 발굴장에서의 노출된 유품들

사진 ①는 양은 그릇과 빗 그리고 전선이 흐트러진 유해와 함께 노출된 모습이다. 빗은 미군의 제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그때 참빗 정도 사용할 때이다. ②는 약병 종류다. 당시 약병도 중요한 단서다. ③버클과 단추도 고급스런 쇠로 만든 큰 단추이다. ④옷감은 당시 7월이라는 날씨와 맞지 않은 두툼한 옷으로 확인되었고 ⑤미군복 색상의 옷은 해방 후 미군정 시기 미군 제품이 통용되어 한국인이 구입하여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주3) ⑥두개골의 훼손 상태가 심하고 손목뼈 옆에 손목을 결박한 전선이 노출되어있다.

 

▶봉강리 발굴장의 유품 중 특징은

이공(理工):이리공업고등학교’이란 한자가 새겨진 단추와 ‘가쿠란’이란 교복칼라 속에 넣는 제품이 출토되었다. 가쿠란이 출토되었을 때는 어디에 사용된 유품인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단추와 결합해보니까 당시 일제식 교복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단추의 단서를 찾기 위해 ‘이리공업고등학교 22회 졸업생 정유순씨를 통해 이리고업고등학교 총창회에’에 사진을 확인한 결과 1940년대에 입던 교복 단추가 맞는것으로 확인했다. 당시 이리고는 명문학교로서 전국에서 유학 갈 정도로 유명한 학교였다고 한다. 단추와 가쿠란이 출토된 유해(07)의 신발이 운동화였다. 그러므로 학생신분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품이 진주 봉강리에서 발굴된 것은, 정확한 사유를 알 수가 없다. 진주에 거주하는 학생이 이리고를 진학하여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서 잡혀서 학살되었는지, 아니면 이리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이 끌려가서 학살당했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연령이 대략 10대~30대 정도가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주4) 안치식날 원장이 진주유족 중 1950년 당시 익산(옛지명 이리)에 살았거나 친척이 있으신 분을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다음 유품은 신발류이다. 위에서 보듯 구두와 미군전투화 등이 발굴되었다. 그중 각반이 발굴되었는데 이것도 발목을 고정시키는 미군 제품이라고 한다. 신발속에 발가락뼈가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미군 제품을 사용할 수 있었던 계급층은 부유한 가정의 자녀나 가족일 것으로 추정한다.(주5) 집현면 봉강리 발굴은 16일 만에 막을 내리고 세척과 감식을 위해 역사문화재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역사문화연구원에서 감식하는 모습

 

이번 봉강리 발굴장에서는 소중한 인연도 쌓았다. 이덕원 연구원과의 만남이 그러했다.  유해를 보는 시각과 유해 관련 지식을 차원 높게, 깊이 있게 전해들을 수 있어서 아주 기쁘고 보람 있었다.

 

▶2022년 7월 28일 봉강리 유해의 안치식날

2022년 7월 24일 봉강리 유해는 세척과 감식을 마치고 명석면 용산리 425번지 임시안치소)에 도착하였다. 진주유족들은 유해를 조심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박스씩 컨테이너에 나르고 있다. 유해 41구 중 우리 아버지와 형제일지도 모르는 유해들을 장례식 지내는 마음으로 정성껏 예를 갖추어 안치식을 행한다. 필자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유족이 다들 고령이라는 점이다. 유족 행사할 때 안쓰러운 마음이 짠하다. 이제는 위령제도 유족만 참석하는 것 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 살에 대한 국가기념일’을 정하여 국가 차원에서 온 국민이 기리는 행사가 되길 바란다. 봉강리 유해 발굴은 안치식으로 막을 내린다. 필자가 항상 유해와 발굴장에서 인사하는 말 다시 만나는 그날(또올께요) :벌노랑이꽃을 연상한다.

 

▶처음 접해보는 DNA 검사하는 과정

발굴팀인 ‘역사문화재연구원’에서 이덕원 연구원(이 연구원)이 연구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DNA검사를 하러 진주에 왔다. 필자는 이 연구원을 만나서 명석면 컨테이너로 향했다. DNA검사 경험이 없어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유해를 선택하는 방법은 가장 건강한 유해와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유해 그리고 보통인 유해 세분류 선택한다고 한다. 특히 건강한 유해 부위는 대퇴골이다. 선택한 유해를 전기톱으로 조각하나 자르는 것이다. 유해를 자르는 순간 유해 가루가 안개처럼 뿌옇게 품어나오는데 놀랬다. 연기처럼 쏟아져 날리는 유해가루는 바람 방향에 따라 이 연구원 온몸으로 뒤덮어 씌워졌다. 필자는 컨테이너 속에 피해 있었지만 바람 방향에 따라 가루는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또한 유해가 타는 누린내도 함께 품어낸다. 이 연구원은 "아! 이런 상태론 어디 못 가겠는데요. 사워 해야 갈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한다. 순간「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책에서 독일 나치들이 자행한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학살하여 태워죽일 때 가스실 주변 하늘은 매일 같이 뿌연 연기로 뒤덮어 맑은 하늘을 하루도 볼 수가 없었다는 아우슈비츠에서 생존자의 말이 기억났다.

이 연구원은 자른 유해를 자세히 보여주면서 설명해준다. 강철보다 더 강하고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뼈 속살을 보는데 충격이었다. 인간의 뼈 구조가 견고하게 형성되어있다는 것 새삼 깨달게 되었다. 역시 과학수사학과 출신인 이 연구원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참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4시간 이상 작업이 끝나고 컨테이너에서 내려오면서 필자는 농담과 진담이 섞인 말로 “이 연구원! 만약에 필자가 없고 홀로 명석 컨테이너에 와서 이 작업을 한다면 어떨까요?" 라고 물었다. "할 수는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저로서는 편안하고 의지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라고 말하며 웃는다. 필자가 이 연구원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봉강리 유해 DNA검사 결과는?

상태가 좋은 유해와 좋지 않은 유해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두 유해 모두 유전자가 정확하게 나왔다. 그렇지만 유전자 검사는 상태가 좋은 대퇴골로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세척방법이나 화학약품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덕원 연구원과 은사이신 성균관대학교 임시근 교수와 유전자 분석을 연구한 결과 미량에 상태가 좋지 못하여 어려움이 있었으나 유전자 분석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까지 발굴 이후 아세톤 세척을 거쳐 안치 중인 유해들의 유전자 검출이 가능함을 확인하였다.(주6)

 

▶나가면서

이번 진주봉강리 유해 발굴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예산도 진주시에서 집행하여 지급되었고, 두 번째는 유해가 흐트러지지 않고 발굴되어 DNA검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남도와 진주시는 진주유족 100여명과 유해 41구를 DNA 검사하여 ‘전국에서 최초로 72년 만에 유해가 유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주시길 당부한다. 아울러 미발굴지가 아직 2~3개소밖에 남아있으니 적극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한다.

 

⟦각주⟧

(주1)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2)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3)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4)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5)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6)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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