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학살지∙구금장소와 약산 김원봉의 네 형제가 학살 당하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CIC(특무부대),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에 의해 100만 명의 “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다. “진주지역은 매장지 27개소 중 현재까지 발굴한 지점이 마산 여양리, 진성고개, 명석면 용산 고개 등 9개소”이다. 학살 대상은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서 제1차~16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 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연재한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금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경상남도는 2021년 유족의 뜻을 이어받아 2년에 걸쳐 각 시∙군(18개) 유족들의 상흔을 녹취하여 증언록을 발간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천혜의 환경조건을 갖춘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있어 빨치산(유격대)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에 더욱더 보도연맹원∙민간인학살∙정치사범이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필자는 '70년 만의 증언'을 토대로 18개 시∙군의 유족들 사연과 매장지를 현장 답사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민간인 피학살지의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달 기사는 밀양편 1~2부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남유족 증언집 1~5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남유족 증언집 1~5권

▶경남지역 사건은 두 가지로 구분

 

〈표-1〉 신기철, 「한국전쟁 전후 백만 민간인 학살의 진실」,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2017년 3월 16일.

▶밀양지역 국민보도연맹 피학살자의 요지

밀양지역은 한국전쟁 발발 후 “국군이 방어에 성공한 지역”이다. 하지만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밀양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은 밀양경찰서 및 관할지서 경찰과 경남지구(CIC)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 통보를 받고 자진 출두해 옛 삼랑진 면사무소 건물, 삼랑진 지서, 삼랑진역 홍익회(전신 강생회) 지하창고 등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8월 중하순경 삼랑진읍 미전고개, 안태리(동촌마을) 송지리(죽곡마을), 검세리(작원관지), 청도(곰티재) 등으로 끌려가서 억울하게 집단 학살을 당했다.

▶밀양지역 학살 전 구금장소와 학살장소 찾기

밀양지역은 대략 1차례부터 5차례 학살지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학살지마다 상세히 조사해 보고자 한다. 밀양지역은 학살책임자들이 정확하게 밝혀진 드문 사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학살 책임자의 직책 중 눈에 띄는 단어가 나온다. “해군CIC, 해양공사, 해군헌병대” 등. 해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의외이다. 아마도 낙동강 하류 “작원관지 수장” 피학살자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밀양지역의 자료를 살펴보고 답사한 결과에 의하면 피학살자는 820여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증언자 이정우는 삼랑진읍에 살았기 때문에 ‘전역 학살지’의 학살 인원을 가름하기 어렵지만 보도연맹원들을 기차에 태워서 데리고 왔다면 인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밀양사람뿐만 아니라, 덕산, 진영, 한림정, 낙동강, 삼랑진역을 거치면서 역마다 태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어요.”주1) 라고 한다. 1차례부터 5차례 학살지를 소개하기 전에 밀양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약산 김원봉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민간인 학살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밀양역사 중 근현대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약산 김원봉' 네 형제가 약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끌려가서 학살된 사건을 다루기 이전에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알고는 있겠지만 약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부장관) 등으로 활동했던 반일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필자는 2012년부터 약산 김원봉과 그 외 항일독립운동사 관련하여 역사교사들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와 밀양독립운동사 연구소'가 주관하는 중국항일독립운동사 답사를 몇 차례 다녀왔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오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약산은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가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민간인학살(보도연맹원) 밀양편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약산의 네 형제가 학살된 사연이 언뜻 떠올랐다.

추석 전부터 밀양 유족들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한 분은 뇌종양으로, 한 분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약간 불안했다. 경남유족회장님께 소식을 여쭸더니 아마도 돌아가셨을 것 같다고 한다. 아차! 늦었구나! 이제 겨우 두 개의 시편을 준비 중인데 유족들의 사망 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유족분들이 연로하셔서 증언이나 만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영철(88세) 유족의 마지막 증언이 필자의 가슴을 울리게 한 말씀, “내가 죽고 나면 이 진실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보는 기라, 밀양에 대해서는!!주3)을 되새기며 "양영철 어르신, 제가 조금이나마 진실을 밝혀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해본다.

밀양지역 답사는 유족분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셔서 동행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대신 일반인 두 분을 섭외하였다. 이정우(전직 공무원) 증언자와 이준설 '밀양 의열기념관 학예사'이다. 두 분과 9월 13일, 16일 양일간 밀양답사를 시작했다. 13일 1차 학살지인 미전고개, 역사적 진실의 현장으로 향했다.

▶미전고개의 학살지에 약산 김원봉선생의 4형제도 포함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산11번지 (미전고개) 학살지 표지판 모습(2013년.12)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산11번지 (미전고개) 학살지 표지판 모습(2013년.12)
국도 58번 도로 김해→삼랑진→청도 가는 길 / 도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학살지 모습
국도 58번 도로 김해→삼랑진→청도 가는 길 / 도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학살지 모습

미전고개 학살지에 도착하니 허름한 표지판이 세 사람을 반겼다. 9월 13일 날씨는 가을 나락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위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무덥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발로 풀을 헤치고 들어가니 조금 깊다고 느낄 정도의 계곡이 바로 보였다. “어디예요. 학살지가예?” 이정우가 손가락질하면서 가리킨다. “여기가 학살지예요!” 다시 물었다. “예! 바로 여기 계곡에 학살했어요.” 필자는 순간 가해자들의 대담성과 과감성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도로변 바로 옆 계곡에 사람을 세워놓고 총을 쏘아 시신이 계곡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다.

보통 학살지는 도로나 길에서 200~300m이상 올라간, 도로변에서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서 정한다. 학살지의 특징은 묘하게 도로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막상 도로에서 학살지를 바라보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전고개 학살지는 도로 바로 옆이다. 학살 당시 상황이 다급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계곡 속으로 시신을 떨어뜨렸으니 덮거나 뒷수습이 필요 없어 보였다. 적어도 이곳에서 200명 이상이 학살당했는데, 계곡에 시신이 가득 채워졌을 것이고 계곡은 검붉은 핏물로 물들어 흐르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다. 그때 이정우와 이준설은 서로 팔을 들고 모기한테 물린 곳을 긁고 만지고 서 있었다. 필자는 속으로 웃으면서 나는 안 물렸는데…하곤 구금장소로 향했다.

▶예비검속자 구금한 장소(구 임천출장소)를 찾아서

 

현재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부지 / 삼랑진읍 청학리 50번지(구 임천출장소 부지)
현재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부지 / 삼랑진읍 청학리 50번지(구 임천출장소 부지)

구 임천출장소에 도착하니 구금장소는 대나무 숲으로 우거진 채 조용한 산기슭으로 보였다. 연맹원들은 보도연맹 교육 시킨다고 나오라고 해서 모두 자진해서 갔단다. 학살자들은 갑•을•병으로 분류하여 집단수용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전고개 학살지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 중 약산 네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산의 네 형제의 기구한 사연은 2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제 가장 많이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다가 구속시킨 구 밀양경찰서로 향했다.

▶옛 밀양경찰서 보도연맹원들 구속장소

옛 밀양경찰서 밀양시 내일동 174-2(밀양 내일전통시장 주차장)
옛 밀양경찰서 밀양시 내일동 174-2(밀양 내일전통시장 주차장)

옛 밀양경찰서 장소가 밀양시종합사회복지관으로 새로 지어져 옛 경찰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복지관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까 당시 구속했다는 장소가 주차장으로 남아있었다. 지상에서 깊이가 3m정도 되어 보였는데 복지관 건물이 지상으로 높이 올려서 대지를 높이지 않고 건축하였다. 그래서 푹 꺼진 장소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다음 답사지인 삼랑진읍으로 향한다.

▶ 감금장소 삼랑진 지서(파출소), 홍익회(전신 강생회)와 삼랑진역을 찾아서

 

삼랑진 옛 지서 장소(송지리 155-16) / 삼랑진역과 지서 옛 그대로 위치함
삼랑진 옛 지서 장소(송지리 155-16) / 삼랑진역과 지서 옛 그대로 위치함

밀양에서 25분 걸려 삼랑진 파출소 앞에 도착했다. 삼랑진 파출소는 당시의 살벌했던 감금장소였음을 잊은 듯 조용해 보였다. 바로 옆 삼랑진역 앞에 멈췄다.

 

삼랑진역(송지리 155-16) 새로 지어져 깔끔한 모습
삼랑진역(송지리 155-16) 새로 지어져 깔끔한 모습

삼랑진역을 바라보는 순간 필자는 옛날 일이 생각났다. 76년 6월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2박 3일 수학여행을 갔다. 내려오는 길에 삼랑진역에서 기차가 정차하였다. 그때 기차 안에서 담임선생님께서 “점심을 나누어 줄 테니 기차 정차 때 먹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조금 후 동그란 주먹밥 하나와 노란 단무지 몇 개를 주었다. 필자는 주먹밥 쳐다보고 “반찬 없이 단무지만 갔고 우찌 밥을 먹노!!” 그때 역무원의 안내방송 목소리가 나온다. “여기는 삼랑진역입니다. 여기는 삼랑진역입니다. 잠시 선로 변경으로 열차가 정차하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 소리가 귓전에 맴돌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철도역에서 운영하는 홍익회(전신 강생회)터, 당시 2층 건물로 지하창고가 구금장소다
철도역에서 운영하는 홍익회(전신 강생회)터, 당시 2층 건물로 지하창고가 구금장소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삼랑진역 건너편에 사진8 “홍익회(전신 강생회) 지하창고가 있는 장소로 갔다. 증언자 이정우는 지금은 풀밭으로 남아있는데 원래 홍익회 건물터는 지면이 푹 꺼져있었고 창고 지하실은 넓어서 구금장소로 사용되었고 낙동강 하류가 가까이 있고 삼랑진역이 있으니 수장지로 가는 교통수단으로 기차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증언했다.

 

옛 삼랑진 면사무소(송지리 402-6), 행정복지센터 및 문화센터 건립사업 중. 오른쪽 사진이 구금장소
옛 삼랑진 면사무소(송지리 402-6), 행정복지센터 및 문화센터 건립사업 중. 오른쪽 사진이 구금장소

옛 삼랑진 면사무소는 형체도 없이 허물어져 버리고 현재 행정복지센터 및 문화센터 건립사업 중이었다. 그런데 공사 저편에 옛 면사무소 창고로 사용했던 허름한 건물이 보였다. 구금장소가 그날의 살벌함을 알려주듯 초라하게 남아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삼랑진 답사 마치고 나니 왜 밀양에서 삼랑진 주변 관공서를 감금장소와 학살지로 정했을까! 궁금해졌다. 증언자 이정우는 “지리적으로 삼랑진은 밀양으로 가는 교통편이 열차밖에 없었어요. 밀양강을 건너는 다리는 1970년 중반 삼랑진 양수발전소를 만들면서 세워졌어요. 그래서 철도를 많이 이용하다 보니 삼랑진은 부산이 생활권이 되면서 밀양에서 약간 소외된 지역이었어요. 아마도 감금은 엄밀한 곳으로 적합한 삼랑진을 선택한 것 같아요" 라고 증언했다. 다음 답사는 16일 다시 시작하여 '안태리 동촌마을'과 '작원관지'로 정했다.

▶안태리 동촌마을 학살지를 찾아서

 

16일 서둘러 밀양 안태리 동촌마을 학살지를 향했다. 동촌마을에서 2km정도 이상 가파른 길을 구불구불 첩첩산중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학살지 장소로 적합했을 것 같아 보였다. 대밭 옆 허름한 축사에 개를 사육하고 있고 길이 좁아서 축사 마당에 차를 정차시켰는데 차에서 내리니까 개들이 어찌나 짖어 대는지 무서워서 혼났다. 축사 바로 옆 '대밭 계곡이 학살지'라고 한다. 대밭 속을 자세히 보니까 계곡이 아주 깊어 보였다.

증언자 이정우는 손을 좌우로 흔들며 대나무가 왜 잘 자란 이유를 말로 표현하지 않고 손과 머리로 표현하였다. 필자는 금방 눈치를 채고 아예! 시신의 살과 피를 빨아먹고 잘 자랐다는 뜻이지요? “예!!” 하면서 몸서리를 치고는 “섬뜩하고 현기증이 날 것 같다”고 한다.

 

사실 증언자 이정우는 2019년 이틀에 걸쳐 답사 경험이 있다. “동네 형님을 통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물어서 학살지 장소를 알게 되었어요. 동네 형님이 안태리 동촌마을에 살아서 잘 알고 있었거든요. 이곳은 골짜기가 언 듯 봐도 첩첩산중 계곡이 많지요? 당시 최소한 여러 곳(최소한 3곳)에서 학살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골짜기마다 내려오는 검붉은 핏물이 동네 개울로 줄줄 흘러내렸다고 형님이 얘기했어요.”

“이곳에서 학살이 일어난 뒤 시신을 찾았는데 '머리에 대못이 박힌 시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장면은 잔혹함과 증오감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증언한다. 필자는 다시 대물었다. “못이 머리에 박혀요?” “예!” 세계적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캄보디아 킬링필드에서는 총알이 아까워 도끼, 낫, 칼, 괭이 등으로 사람을 쳐 학살한 걸 알고 있었지만, 대못을 머리에 박아 죽인 것은 처음 들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건 잔혹하지 않은 것 없다. 필자는 안태리 학살지에 표지판 하나 없이 구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섬뜩한 안태리 학살지를 뒤로 하고 '작원관지''수장지를 향했다.

▶낙동강 하류 “작원관지”주4) 수장지를 찾아서

 

작원관지(삼랑진 검세리 산134-2번지) / 4대강 사업 전 지도 양산군 원동면 중리마을 모습
작원관지(삼랑진 검세리 산134-2번지) / 4대강 사업 전 지도 양산군 원동면 중리마을 모습

낙동강 하류 수장지를 찾아가면서 필자는 증언자 이정우에게 어떻게 작원관지(낙동강 수장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냐고 물었다. 증언자는 초∙중학교 때 원동면 중리마을에 큰 이모님(최태호)이 살고 계셔서 기찻길 따라 걸어서 이모님 댁에 자주 다녔다고 했다. 이야기는 이모님한테 들었다고 했다.

 

기차 터널 아래 굴다리 앞에서 드러나는 낙동강 하류 강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모습
기차 터널 아래 굴다리 앞에서 드러나는 낙동강 하류 강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모습

필자는 굴다리 걸어 들어가는 순간 낙동강이 살며시 내미는 물결이 너무 아름답고 멋있어서 내가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하고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굴다리를 빠져나가니 낙동강의 거대한 은빛 물결이 반겼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낙동강이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한 곳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수장시킨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 모습 (폭 150m~200m), 높이 20m, 물의 깊이 4~5m)
수장시킨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 모습 (폭 150m~200m), 높이 20m, 물의 깊이 4~5m)

작원관지에서 낙동강 하류 약 36km까지는 자전거 도로로 잘 단장되어 전경이 아주 멋있었다. 이곳은 민간인을 오밤중 기차로 데려와 옹벽 위에 세워 총을 쏘아 수장한 곳이다. 또는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죽은 사람을 낙동강 물에 던져서 고기밥으로 만든 곳이기도 하다.주5) 증언자 이정우는 “작원관지에는 기차 터널이 작원마을 쪽 짧은 터널과 시루봉을 지나는 긴 터널이 있는데 긴 터널 지나면 양산시 원동면 중리마을이 있다. 시루봉 긴 터널 앞에 약 20m 높이의 콘크리트 옹벽이 강으로 바로 맞닿아 있는데 여기서 두 손을 뒤로 묶은 후 강으로 밀어 넣어 보도연맹원들을 수장했데요.”라고 말했다.

 

이정우가 4대강 자전거길 테크 위에서 옹벽 아래의 낙동강 깊이를 바라보는 모습
이정우가 4대강 자전거길 테크 위에서 옹벽 아래의 낙동강 깊이를 바라보는 모습

“작원관지 출발점에서 옹벽을 지나 중리 모래톱까지의 거리는 2.5km정도 이구요. 그중 강이 바로 맞닿아 학살해서 수장할 수 있는 곳은 여기 옹벽(150m~200m) 구간 뿐이예요. 자세히 보세요. 여기 구간 이외 옹벽들은 직접 강에 닿지 않아서 사람을 밀어 넣으면 땅바닥에 닿거나 나무에 걸려 수장이 될 수 없는 곳이잖아요. 2019년 6월에 답사 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 외는 없었어요. 사전에 엄밀히 계획하고 준비한 사건이었어요.”라고 한다.

필자는 옹벽과 시신이 떠내려와서 걸쳐 있었던 모래톱을 가는 도중에 두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아! 자전거 도로가 너무 멋있게 닦아져 있는 낙동강 하류 강변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다. 나도 이곳에서 자전거 타고 싶고 라이딩맨들 지나가면 부러웠다. 중얼거리는 말에 증언자 이정우는 아무 대꾸가 없다. 아마 속으론 답사 와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산책로에서 강물 아래 내려다보니 아찔하고 무서운데 철길 위에서 세워놓고 총까지 쏘아 강물에 밀어 넣었으니 인간의 공포에 극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시신이 떠내려왔다는 중리마을 모래톱으로 향한다.

 

▶마지막 시신이 떠내려와서 걸려있었던 모래톱을 찾아서

 

옛 모래톱 모습 / 4대강 사업 후 현재 모래톱의 모습
옛 모래톱 모습 / 4대강 사업 후 현재 모래톱의 모습

증언자 이정우가 “저는 초∙중학교 때 철길 따라 걸어서 이모댁에 자주 다녔어요. 모래톱은 아주 넓어서 높은 곳은 포도, 수박, 고구마 등 작물을 심었고 낮은 곳은 재첩, 조개 백합, 잉어 등 잡으면서 수영도 하고 놀았어요. 어릴 때 (양산시 원동면 중리마을) 이모댁에 자주 갔는데 모래톱에 이모님 밭이 있었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모래톱 밭에 나가보니 작원관지에서 수장된 시신들이 모래톱에 걸렸더래요. 장사는커녕 빨갱이로 몰리는 살벌한 시기라 집에서 가지고 나온 장대로 시신을 낙동강 물에 밀어 넣어 떠내려 보냈어요”라고 증언했다.

이들 시신은 어디로 갔을까요? 하니까 “한번 생각해봅시다. 낙동강에서 다대포를 지나 시속 3~4km로 가면 다대포에서 대마도까지 거리는 50km 정도인데 하루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겠네요.” 한다. 그래서 “경남지역 마산, 통영, 거제, 낙동강 등 중부 경남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바다에 수장된 경우가 많았다. 수장을 얼마나 많이 시켰는지 시신 중 일부가 물살이 드세기로 이름난 대한해협을 지나 일본 대마도 해안까지 밀려가서 일본 어민들에 의해 시신이 인양되어 현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네요.”주6) 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한다.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전경(옹벽에서 바라본 강 건너)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전경(옹벽에서 바라본 강 건너)

밀양답사 마무리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건너편 도요리 마을은 고요하고 인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장 당시 한밤중에 기찻길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총 쏘는 소리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증언자 이정우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진주로 향했다.

 

맺는말

그 당시 집단수용되어 있는 동안 인권침해, 특히 고문의 과정에서 그리고 학살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엘리 위젤의 『나이트』의 구절이 떠오른다.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이 되고 제복차림의 잘 훈련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세계, 죄 없는 어린이와 허약한 노인이 죽어가는 얼음장같이 차디찬 미친 세계를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밀양편 2부에서는 유족의 사연들과 특히 약산 김원봉 동생 네 명 형제의 사연, 1960년대 부관참시 당한 사건을 전하고자 한다.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내용 및 사진은 저작권법에 따라 원작자(김영희/전직교사)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