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골령골의 피학살자 유족 전미경의 72년 뼈저린 이야기”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 용산리등 20여곳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단디뉴스는 민간인 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또 현재도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연재한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 골령골 여목사 이야기

- 회장님 처음으로 골령골에 방문한 건 언제인가요?

"그때가 1999년이었시유. 평소 뼈저린 삶 속에서도 항상 아버지의 상흔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 아니여유. 맨날 골령골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염원했더니 어느 날 아들이 골령골에 가 보자고 했시유. 설레는 마음으로 아들 차를 타고 골령골에 도착하니 교회 한 채가 보였시유. 교회 옆 텃밭에서 여목사가 밭을 매고 있어 가까이 가니 목사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시유"

"여기 한국전쟁 때 학살지 아니여유? 했더니 "아고 밭을 매면 치아와 해골바가지가 자꾸 나와 굴러다녀서 저기 신작로나 고랑으로 던져버린다니깐요" 하데유.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목사님 좀 보소 그래 당신 아버지 산소에 가서 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해볼까유? 했더니 목사가 슬슬 피해 도망을 치데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당신이 그러고도 목사냐고 소리 질렀더니 아들이 말려서 그길로 집으로 돌아왔어유. 그 후 알고 보니 그곳은 교회로 허가 나지 않는 곳인데 가축 기른다고 거짓말을 하여 허가받아서 교회 운영했는데 결국 망하고 나갔데유. 바로 사이비 교회였시유!" 하신다. 결국 교회는 발굴할 때 임시 발굴 감식장으로 활용하다 지금은 철거되었다.

 

 

[나는 상중이오]

작가 전미경

보도 듣도 못한

골령골 진달래꽃은 유난히 붉은데

학살지 민들레는 함박웃음 웃고

너의 발밑 반세기 전

자식 죽여 젓 담은 줄 모르고 웬 웃음

썩는지 삭는지

농부들 밭갈이에 몇십 번을 부서졌나

살아서 결박이요 죽어서 해해년년

뼈 부서지는 것은 무슨 죄목인가

결박을 풀어야 하늘이든 지옥이든 갈 것 아니오

임종은 고사하고 아비 죽어 반백 년

상 못 치르는 불효

나는, 나는 상중이오.

 

▶ 대전 유족과의 첫 만남

- 회장님! 건강은 어떠세요. 별일 없으신가요.

"예 괜찮아요."

근데 사실은 몸이 안 좋으시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듯 하다. 그 정도 수난을 겪었는데 안 아픈 것이 이상하다.

- 회장님 대전유족들과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2002년 7월 어느 날 대전 아들 집에 가다가 서대전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에 눈이 동그래졌시유. ‘한국전쟁기 대전형무소 학살자 위령제’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보였시유. 그 현수막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시유.”

 

"차를 돌려 위령제를 지낸 매장지 골령골을 찾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검고 조그만 비석만 저를 기다리고 있었시유. 저는 비석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었시유. 그때는 이미 위령제를 지낸 후였시유. 그때 결심했시유.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아버지 위령제를 모셔야겠다고유. 그해 추석 2002년 9월 21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차례를 지내고 대전 산내 골령골에 간단한 제물을 가지고 도착하니 8시경이 되었시유. 제물을 펼쳐놓고 큰절을 올리고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유족은 한명도 오지 않았시유."

"어찌 이곳에는 7,000여 명의 학살자들의 유족이 있을 텐데 명절에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 걸까. 허탈한 심정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위령제 주최단체를 수소문했시유. 그해 11월 딸이 여러 시민단체에 연락하여 알아본 결과 ‘대전 참여연대’에 연락해서 2개월 만에 유족 문양자씨를 만나게 되었시유. 그리하여 ‘대전유족회’를 결성하였고 매달 유족회의 및 위령제를 지내는 모든 제물과 점심을 부여에서 준비하여 트럭에 싣고 가서 행사했시유. 유족회 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고 그게 아버지 명예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시유."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출범 소식

- 회장님 1기 진화위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그게유. 고 노무현 대통령 시기 1기 진화위가 대통령 상설기관으로 출범되면서 유족회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시유. 저는 아버지 명단을 찾기 위해 진화위에 쫓아다녔시유. 2006년 3월 14일 아버지 전재흥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어느 날 등기가 와서 받아 보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온 우편물이었시유. 허둥거리며 우편물을 뜯어 보니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시유."

-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전재흥은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지만, 공권력의 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다' 라는 내용이였시유. 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된 것이 분명한데 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시유. 정신을 차리고 '불능 처리'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시유. 그때 문득 '군법회의에서 사형 확정판결' 받아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시유. 이때부터 저는 투사의 역할을 자임했시유. 진화위에서 불능 통보를 받은 2010년 10월 6일로부터 일주일도 안 돼 이의신청서를 제출했시유”

"요지는 '1951년 진행된 군법회의는 불법적이며 위헌적이다'였시유. 즉 제헌헌법에 군사법원과 같은 특별법원에 대한 규정이 없고 군사법원은 1954년에 관련법이 만들어지면서 합법화된 걸 이의신청 근거로 제시했시유. 아버지와 비슷한 예로 '진화위는 최능진(독립운동가)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즉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951년 1월 2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2월 21일 사형집행 된 최능진은 법적 근거도 없는 군법회의에 의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결정을 받은 바 있다.'를 근거로 똑같은 사건 전재흥 역시 불법적인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의해 판결되어 죽음에 이르렀기에 진실규명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시유."

 

▶ 청천벽력 같은 소식

"그래서 아버지 명단을 찾기 위해 부여군청과 대전형무소를 찾았지만 역시 명단은 없었시유. 다시 대전 국가기록원에 몇십 차례 방문하여 찾았지만 역시 명단은 없었시유. 국가기록원 직원이 저를 보고 안타까웠는지 그럼 육군본부로 한번 가보세요. 라고 해서 바로 육군본부로 발길을 돌렸시유."

"2010년 10월 6일 육군본부에 도착하여 신분증을 제출하고 명단 신청했시유. 조금 있으니 담당이 출장 가서 확인이 안 된다고 하데유. 저는 출장을 가면 업무를 대행하는 직원이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이래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곤 전화한 후 아버지 판결문이 있다고 하더라고유, 그러면서 시간이 좀 걸리는데 괜찮으시겠냐고 허길래 야! 괜찮어유! 저는 60년도 기다렸는데 뭘 못 기다리겠냐고 하면서 의자에 누워버렸시유.”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프차를 타고 온 여장교가 봉투를 내밀면서 직원에게 전달했고 곧 판결문은 제 손에 들어왔시유. 판결문은 30쪽 분량으로 상세한 내용과 앞면 뒷면 복사하였고 펜촉 글씨와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시유. 판결문을 받아 보는 순간 아버지가 강압수사와 모진 고문으로 사건은 조작과 은폐로 누명을 쓰고 ‘살인자’로 판결된 것을 확인했시유. 그동안 아버지가 보도연맹활동으로 학살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살인자라니!! 갑자기 하늘과 땅이 맞닿는 듯 하얏게 보였시유. 그리곤 육군본부 앞 벤치에 앉아있는데 판결문을 가슴에 안고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유. 평소때 잘 울지만, 그날 만큼 슬피 울어 본 적 없었시유. 눈물이 앞을 가려 육군본부에서 부여집까지 40km를 어찌 자동차를 끌고 집에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유. ”

 

▶ 하루하루가 지옥에서

- 회장님 판결문을 받은 후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셨어요?

"예, 판결문에는 제 눈에 확! 들어오는 단어 '주소 불능'이 있었시유. 그동안 아버지가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은 동료 수감자와 가족의 증언으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판결문에서 쓰여진 주소 불능은 자신이 사는 집 주소도 대답할 수 없을 정도의 혼수상태에서 살인자로 둔갑시켰다는 생각에 가슴 저리고 저려서 울음으로 나날을 보냈시유. 그 충격으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서 매일 밤 백마강 강둑 왕복 30km를 왔다갔다 하다가 새벽에야 집에 들어오곤 했시유. 그리고 트로트 노래를 그렇게 좋아해서 일할 때도 라디오를 들고 다니면서 따라 부르고 했는데 판결문 받고 난 이후로 노래도 부르지 않아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앞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시유. 이런 고난의 행군은 결국 몸에 이상을 가져왔고 온갖 스트레스로 치아가 모두 빠져버렸시유. 아래윗니가 모두 주저앉으면서 지금의 치아는 모두 임플란트여유.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판결문을 한글로 해석을 해줄 분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농민회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시유. 다행히 한자를 잘 아시는 사람을 소개받아 한글 번역했시유. 이제는 ‘참고인’을 찾는데 일념 할 것이라고 다짐 하게 되데유."

 

▶기적이 일어나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별일 없으세요?"

"아구! 선생님 제가 대상포진에 걸렸시유. 넘 스트레스를 받았나봐유!" 하신다.

"아휴! 일도 중요하지만 제발 건강이 먼저이니 편히 좀 쉬셔야지요." 하면서 대화는 시작되었다.

 

- 라권집(피해자)의 딸(라도정)을 어떻게 찾았어요?

"아버지가 살았던 동네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찾아가서 참고인이 될 만한 분을 백방으로 찾아다니기 시작했시유. 낮에는 미용실 일하고 밤에는 쇠고기국밥을 끓어서 증언자와 참고인에게 드리면서 참고인 좀 해달라고 사정하고 또 부탁하면서 찾아다녔시유."

"그중 참고인 5명을 세웠지만, 신빙성이 없다고 하여 또 다른 증언자를 찾아 헤매던 중 유연히 우익인사(라권집)의 딸(라도정)이 부여로 시집와서 산다는 소식을 듣게됐시유. 수소문하여 라도정의 집을 알아내었지만,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시유. 만약에 아버지가 정말로 라권집을 살해했다면 딸인 라도정(할머니)을 뵐 용기가 나지 않았시유. 그래서 대문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또 돌아왔시유."

"세 번째는 용기를 내어 이판사판으로 집으로 들어 갔시유. 라도정은 하반신을 못 쓰고 있었시유. 제가 들어가니 "누구냐"고 물데유. "선동리 동네 사람이여유." 했지유, 선동리가 라도정 고향이었시유. “할머니 저 전재흥 딸이여유”하니까“아구 전재흥 딸이 하나 있었다는 야거는 들었는디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는디 니가 바로 딸 미경이여? 어쩐 일이여?” 예, 대답하고 판결문을 보여드렸더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우리 아버지(라권집)는 1.4 후퇴 전 인민군이 서천등기소 옆 창고에 우익인사들을 감금하고 1950년 7월 27일 불 질려서 민간인 250여명이 타 죽일 때 같이 불에 타 죽었고, 시신은 금이빨을 보고 찾아서 절대 당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인게 아니유.'하신다.

“구사일생 우리 아버지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유. 라도정에게 증언해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진화위 조사관을 집으로 방문케 하여 참고인 증언을 했시유. 진화위 결정문을 받고 난 이후 3년여간 소고기국밥 끓려서 반찬과 김치 등을 갔다드렸어유. 라도정은 무지 구두쇠였고 하반신을 못 쓰는 것을 보고 침대까지 사드렸시유."

”예 회장님의 혼신과 일념이 이루어 낸 결실이 기적으로 일어난 것 같아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예 아버지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 일념이 기적으로 탄생한 것 같아유. 당시 라권집은 이장을 했으며 일본에 징용을 보내는 것에 큰 역할 한 친일이었시유."

 

▶진실위에 이의신청 후 ‘진실규명 결정문’ 발표날(2010년 12월 14일)

- 진화위 결정문 발표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예 진화위 1기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2010년 12월 27일 폐지되지유. 저는유 자료와 증언을 확보하니 만감이 교차했시유. 감정을 수습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진화위에 제출했시유. 진화위가 이의신청을 받아들었고 2010년 12월 14일 저녁 7시 마지막 회의가 아버지 진실규명 결정문이 확정되는 날이었시유."

저는 아침부터 진화위 복도에서 기다렸시유. 아버지 결정문은 회의 시작 후 30분쯤 지나니까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문을 박차고 나왔시유. 회의는 순조롭게 처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5분 발언을 신청했시유. 발언에서 그동안 상흔과 인고의 삶 그리고 진실규명을 위해 보낸 사연과 세월을 조목조목 설명을 했시유. "제발 전재흥 사건번호 2426이다. 60년간 여기까지 왔다. 자료 한번만 검토해 주시라"고 애원을 했시유.”

당시 위원장인 이영조(진화위 위원장)도 천정을 쳐다보면서 눈시울을 적시고 회의에 참석한 국회의원들도 모두 울었시유. 사실 한국전쟁민간인학살 자료는 뒤쪽에 쌓아서 제쳐놓고 검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상태였시유. 즉 1기 진화위가 곧 폐지될 것이니 자동으로 폐지시킬 계획이었던 것이지유. 이영조는 직원을 시켜 전재흥 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검토 후 전원 투표에 들어간다고 하데유. 다시 복도에 나와서 30분쯤 지났을까, 한국일보 기자가 "전미경씨 아버지 진실규명 받았어요. 축하드립니다.”라고 소리치며 알려주었시유. 결정 요지는 '군법회의 재판이 불법적'이다라는 점과 '전재흥은 라권집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시유.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 재심 신청

- 회장님 재심 결과는 어떻게 되었어요?

"예, 진화위 수정 결정문을 우여곡절 끝에 받아서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아버지 본적)재심 신청했시유. 재심 꺼리가 되나 안 되나 심의 결정 날 때까지 6개월 이상 걸리는 동안 피 말리는 나날들이었시유. 잠 못 이룬 밤이 수도 없이 많았고유. 드디어 변호사(이영춘)가 심의 결정이 났다고 연락이 왔시유. 이제 겨우 절반 고비는 넘겼다면서 재판 날짜를 알려주어 재판이 시작되었시유."

“재판 결정 내리는 날 2013년 11월 31일 1심에서 무죄로 판결 났시유. 검사가 항소를 안 했시유. 무죄 판결을 하면서 판사가 하고픈 말 있으면 하시라고 발언권을 주었시유. 10여 분간 칠십 평생 상흔의 흔적과 인고의 세월을 조목조목 말을 이어 나가니까 법정은 순간 정적이 흐르고 슬픔에 잠겼시유.”

"저는유 그동안의 원한이 눈물로 대신하듯 흘러내렸시유. 판사는 "지금 우리가 무슨 말로 도 저 유족에게 위로가 될 수가 없다.”라며 함께 마음 아파했시유. 변호사는 저에게 무죄판결 받고 2주간만 기뻐하라고 하데유. 왜유? 하니까 항소기간이 2주간이었기 때문이래유. 그런데 2주가 지났는데 검사측에서 항소하지 않았시유. 관례로 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무죄 판결받은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하데유."

"변호사도 그랬고 주변의 법조계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판결이었데유 글쎄. 하하하 한숨을 내쉬시며 웃으신다. 참 이런 기막힌 사연이 천하에 어디 있데요. 항소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래유. 라권집은 서천등기소 화재로 죽었고 시신도 금니 보고 찾아서 장례도 마쳤고 라도정(딸)이 아버지가 전재흥에게 살해되지 않았다고 이런 명백한 사실이 증명되었으니까유. 아버지의 무죄 판결문을 받고 나서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아버지 살인자 누명을 벗긴 것만 해도 황송했시유. 저는 일생을.. 흐흐흑.. 20여년 넘게 아버지의 사건에 매달려 살다가 가는 거여유. 제 인생이!!“

 

▶지금도 연좌제로 올가미를 엮고 있다

- 지금도 연좌제가 있다고요? 무슨 일이십니까?

이쯤 되면 회장님의 말씀에 놀라지도 않을 만한데 또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 그런깨 무죄 판결받고 3년이 지나 불현듯 '부당이익금 환수 통지'를 받시유. 즉, 한국전쟁민간인학살배상(민사) 소송배상금(2017년~2021.11.25)을 부당이익금임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통지였시유. 이거 때문에 결국 7년가량 다투게 되어유. 민사소송으로 배상받고 난 후 형사소송이 시작되었는데 민사에서 받은 배상금 일부가 부당이익금이라는 것이예유. 이게 무슨 날벼락이여유."

민사소송은 죄없이 학살된 자로 배상으로 받았고 형사소송은 살인자로 누명을 씌워서 무죄로 판결받고 받은 것인데 무슨 부당이익금을 환수하란 말인가?

"결국 소송은 시작되었고 1차 판결은 패소하여 다시 항소했고, 7년 동안 주택을 가압류당하면서 고난의 투쟁은 또 계속되었시유. 2차 판결에서 승소하니 육군본부, 검찰청이 항소하데유. 저는유 한번 결심하면 하는 사람이여유. 만약 내가 대법원 3차 판결에서 패소하면 내 억울함을 원고에 써서 전국으로 뿌릴 것이고, AP통신에다 ‘70년의 올가미’를 알릴 것이며, 대법원에서 목매달아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시유. 저는유 그때 상황은 폭풍전야에 조각배보다 못한 신세에 이르게 됐시유.”

"뜻밖에도 3차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 다 내어놓을 테니 우리 아버지 20대로 돌려놓고, 우리 어머니 인생 어디 갔고 우리 가족들 인생 어디 갔으며 그리고 전미경의 삶을 돌려놓아라"라고 외쳤시유. 내 소원은유 우리 아버지 청춘을 돌려놓으면 따뜻한 된장찌개 한 그릇 끓어서 잡수시게 하는 것이여유. 결국 저는유 민사소송, 형사소송 모두 20여년 가까이 투쟁 끝에 승소하였시유."

"예 회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필자는 할 말을 잃었다.

 

▶현재 골령골에서 '미발굴지 시굴 및 발굴사업'과 '전국민간인학살기념관 설립'에 혼신 다하여

지금은 골령골 발굴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MBC 다큐 '나는, 나는 상중이오' 다큐멘터리 촬영을 비롯하여 여러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를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육촌 조카가 암투병하고 있는데 전미경(고모)한테 전화하여 "고모의 고난과 인고를 보고 나도 암을 이겨보겠다고 다짐했어요." 라고 했단다

 

[칠십년의 올가미]

작가 전미경

돌아보니 세상에 온지가 길고도 멀 더이다.

살인자 누명 씌워

스물 다섯 살 아비 목숨 빼앗아

골령골에 척살하고

생후 24개월 된 어린 것 목에 씌워 놓은

연좌죄 올가미

강산을 돌고 돌아 일곱 바퀴

62년만에 무죄 판결

끝인가 했더니 자택 압류가 왠 말인가

아버님 억울한 죽음 가슴에 안고

한 평생 피 눈물로 살아온

인고의 세월을 그대들은 아는가

사형 보상금 삼천칠백삼만칠천사백원

살인 누명쓰고 육십이년, 자택 가압류 칠년

저승길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 끝을 보았으며

민사보상 형사보상 차마 억장이 무너져

고이 간직해 보관했으니

스물다섯 동안의 우리 아버지

내 앞에 모셔주면 내 모든 것 모두 주고

아버님 손 부여잡고 아버님 등 기대며

노숙자로 살면서

따뜻한 된장찌개 앞에 놓고

아버님 식사하세요

한마디 드리고 싶소

2021년 6월 22일 새벽 2시 자택에서

 

 

▶막내 삼촌의 슬픈 인연

전미경은 삼촌이 두 명 있었다. 둘째 삼촌(전재원)은 월북하고 막내 삼촌(전재환)은 전미경보다 다섯 살 위였다. 막내 삼촌은 어릴 때 함께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고기반찬 있으면 전미경이만 챙기시니깐 미경에게 살짝 와 "너 고기 다 먹지 말고 남겨서 나 줘야 한다."라고 말한 기억이 새록새록 날 정도로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치매 걸린 후 전미경만 빼고는 모든 사람을 큰아들(아버지) 죽인 우익 사람으로 보여 사람들을 만나면 도끼, 삽, 낫 등 닥치는 대로 들고 죽인다고 하셨는데, 불행하게도 막내 삼촌마저 우익 사람으로 보여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할 수 없어서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하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던 중 막내 삼촌이 월남전에 참전한 사이 전씨 집안의 불행한 역사는 시작된다.

전미경이 14살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고모는 전답과 본가를 모두 처분하고 전미경이 자살 시도로 혼수상태에 있는 사이 12살 많은 사람에게 강제 결혼시켜버린다. 그나마 의지하고 생활할 수 있었던 막내 삼촌은 월남전을 마치고 돌아와 고모를 만나서 고모의 이야기만 듣고 전부 전미경의 잘못으로 오해하게 된다. 쓰라린 세월을 보내는데 막내 삼촌은 강릉에서 결혼을 하고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막내 삼촌은 전미경의 오해가 진실로 드러나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처갓집이 아주 골수의 우익집안이라 갈등 끝에 극단적인 선택으로 46세 생을 마감한다. 삼촌이 자살한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모든 장례식을 전미경이 도맡아 하고 조부모 곁에 모셨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막내 삼촌 제사도 전미경이 모시고 있다.

 

▶맺는말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 유족 중 한 여인의 인생을 감히 소량의 분량으로 마치니 전미경 회장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필자의 20쪽 남짓의 지필 내용은 ‘빙산의 일각인 듯’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전미경의 비통한 사연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들 셋을 전부 잃어버린 조부모님의 심정을 노래한 시 한 편을 끝으로 전미경의 사연을 마무리할까 한다.

 

[조부모님]

작가 전미경

생전에 답답한 가슴 저승길에 털어 버리소서

천금 갖은 두 아들 전쟁에 빼앗기고

자식 잃어 아픈 가슴 표현도 못 한 채

죄인처럼 살다 가신 조부모님

생의 끝자락 기억의 끈 놓쳐 버려

앞에 간 두 아들 이름만 부르시다.

막내아들 옆에 기고 누우신 그 자리

살인자 누명 쓰고 육십 이년

오늘에야 밝혀진 진실 그리고 결정문

조부모님 영전에 바치옵니다.

억울해 눈 못 감고 가셔야만 했던 저승길

모든 원한 다 버리시고

쌓이고 쌓인 그리움 저 바다에 흘려보내시어

눈물 없는 밤 되소서

2010년 12월 15일 조부모님 산소에서

(아버지 무죄 판결 날 12월14일임)

 

다음 달 25일 15회 계속..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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