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골령골의 피학살자 유족 전미경의 72년 뼈저린 이야기”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 용산리 등 20여곳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단디뉴스는 민간인 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또 현재도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연재한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필자는 2020년도 10월 말경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골령골) 10차 발굴이 한참 진행 중에 발굴에 참여했다. 대전 골령골은 전국에서 최대인원이 희생된 지역이다.(7,000여명 추정) 그래서 발굴 기간과 횟수도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유족분들을 만나지만 사적인 말씀을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가까운 지인이 대전유족회장을 소개해 해주셨다. 대전유족회장 전미경(72세)과 이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골령골 학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린다. 무덤의 길이가 1km 이상이다. 골령골은 빠르면 2022년까지 늦으면 이듬해 상반기까지 발굴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래서 대전유족회장은 현재 부여에 거주하시고 발굴할 때면 대전 골령골로 오신다. 행자부는 골령골 유해 발굴장 옆 주택 한 채를 대전유족회가 임시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게 제공했다. 유족회장은 부여가 멀어, 바쁘시면 골령골에서 주무실 때가 많다. 밤이면 칠천여 명의 희생자 영혼들과 함께 지내는 셈이다. 다른 유족들은 오후 4시 정도 되면 무섭다고 집으로 가버린다. 한 여인(전미경)의 통한을 담아낸 대하소설 같은 70여 년 현대사의 뼈저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 2020년 11월 대전 골령골 3번째 발굴하는 어느 날

발굴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1시간 간격, 10분간 휴식 시간에 텐트에서 간식을 찾고 있는데 언뜻 중년 여자 두 분이 지나가는 듯 보였다. 필자는 그때까지도 대전유족회장이 누구인지 만나지 못했던 터라 잘 모르는 상태였다. 홍실장이 삶은 밤을 드시라고 했다. '웬 밤?'하면서 한 줌을 쥐고 까먹는데 필자가 테어나서 먹어본 밤 중 그렇게 맛있는 밤은 처음이었다. 파삭하고 달콤하니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이 밤 누가 가져오셨어요?”물었더니 "'대전유족회장'이 가지고 오셨어요.“ 라고 한다. 이 밤을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휴식 때도 밤은 그대로 있었다. 아무래도 이틀 밤 지나면 밤이 쉴 것 같아서 홍실장 보고 호텔에 가져가서 먹든지 냉장고에 넣으라고 하곤 밤과의 인연을 끝냈다.

 

▶ 대전유족회장과 첫 대면 하는 날

 

2021년 8월 골령골 4번째 발굴을 마치고 한 달 후, 드디어 지인께서 대전유족회장을 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나게 약속을 해주셨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유족 세 분과 함께 계셨는데 첫 대면부터 70여년의 뼈저린 삶이 고스란히 얼굴에 그려지듯 보였다. 유족회 사무실에서 차를 주시면서 대화 중 자신이 쓴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를 한 권 주셨다. 그리곤 대전 골령골에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더 주셨다. 책들을 받고 나오다가 '아 참 회장님, 지난번에 가져오신 밤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집이 먼 관계로 주신 책을 챙겨 서둘러 진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서로 먼 거리상 전화 통화로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된다.

 

▶먼저 시집의 이름(전숙자)와 현재 이름(전미경)의 사연

아버지(전재흥)는 삼촌(전재원)이 당시 연희전문출신으로 인공시절 활동이 문제가 되어 피신해야 할 처지가 된다. ‘삼촌을 살리기 위해서 본인의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어 전재흥은 피신하다, 경찰서에 두 번째 잡혀가서 희생된다.’ 그리곤 전미경은 할머니(구덕환) 할아버지(전봉준) 슬하에서 자란다. 큰아들은 희생되고 둘째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닌 할아버지가 차일피일하다가 손녀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못하였다. 4살 때 이장에게 호적을 올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아버지가 ‘전미경’으로 이름을 지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호적계에 도착한 이장은 전미경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는 전화도 없고 호적계 직원과 의논하여 요즘 숙자가 유행이니 전숙자로 호적에 올리고 말았다. 결국 전숙자로 70여 년간 살다가 이제야 아버지가 지어주신 ‘전미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전미경 대전유족회장과 첫 번째 사연

〈통화1〉

"회장님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예 선생님! 저녁은 드셨어요." "예 회장님 아버지는 무슨 사연으로 골령골에서 희생되셨나요" 라고 통화를 시작했다. “저기요. 우리 아버지는요. 동생의 피신 때문에 덩달아 천방산(집근처)으로 몸을 피했다가 ‘딸 미경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온 거여유. 들뜬 마음으로 집에 온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지 3일만에 곧바로 경찰에 붙잡혀 충남 시초 지서로 연행되었어요."

1949년 1월 8일이었다. 엄마 장복순(1924년생)은 아버지가 잡혀갈 때 경찰과 아버지를 따라서 허리까지 오는 눈길을 헤매며 10리길을 걸어서 시초 지서에 도착하여 지서장에게 항의했다.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에 가두는 거냐?’하니까 ‘당신 시동생 때문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대요. 엄마가 항의 했지만, 지서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데유. ‘내 남편 풀어주지 않으며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유’하면서 엄마는 묵비권을 행사했는디유. 경찰은 해산한지 3일밖에 안 된 것을 알고 자리에 앉으라고 달랬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데유, 3일간 날밤을 새고 심지어 대소변을 선 채로 봐 버렸데유. ’그러니깨 경찰들이 기겁하여 아버지께 각서를 받고 석방시켰데유"라고 하신다. "예, 진짜 엄마가 대단한 분이시네요." "예, 우리 외증조할아버지가 참봉(종9품)벼슬을 지냈던 집안의 따님이셨데유.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 예뻐하셨데유."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버지를 살렸군요." "예, 한편 저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엄마 젖을 먹지 못해 할아버지가 우유를 먹였어유."라고 했다.

 

▶ 언니, 오빠의 죽음

"회장님 언니, 오빠가 있었어요?" “‘예!’언니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데유. 그런데 오빠(전생현)는 4살 때 홍역을 앓아서 심하지는 않고 눈곱이 째끔끼일 정도였데유. 아버지가 동네 한약방에 약을 짓기 위해 갔는데 한약방주인은 아버지한테 약을 지어주지 않고 아버지보다 뒤에 온 손님을 먼저 지어 주었데유. 다음 아버지 약을 지어주는데, 아주 신중하게 짓 드래유, 집에 와서 그 약을 먹이니까 오빠 몸이 불에 타듯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데유.”

"그래서 아버지는 석방 후 저를 안고 명세를 했데유. 위에 자식 둘을 잃었기에 저를 더욱 끔찍하게 아껴야겠다고, 아버지가 죽으면 이 자식이 어찌 살라고 안된다.’ 하면서 결심을 했답니다. 한약방주인은 우익 사람이라 저의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고 경찰에게 신고를 했데유. 빨갱이 잡아 가두라고, 그래서 아버지를 조사하니까 죄목이 거의 없으니 석방시키려고 하니깐 우익인사들이 ‘탄원서’까지 넣어서 아버지를 석방 못하게 하였데유. 독약을 지어준 죄로 아버지가 풀려나면 한약방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던 거지유. 아예 우리 집안을 몰살해버리도록 작정을 한 것 같아유. 그래서 ‘자신이 살인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모진 고문과 구타 끝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까지 고문을 하여 강제 살해자로 조작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던 것 같아유. "

 

▶ 두 번째 잡혀간 아버지(전재흥)의 행방은?

"회장님! 그다음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는데요?" "엄마의 목숨 건 항의로 지서에서 풀려났지만 계속 아버지는 피신하면서 살았시유. 어느 날 아버지는 제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데유. 태어난 지 두 돌이 되었건만 아직도 서서 걷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래유. 그러다가 먹을 것을 가져간 엄마가 ‘미경이가 섰어요’라는 소식을 전했더니 그날 밤늦게 전재홍은 마을로 내려와 집으로 들어가서 딸의 걸음마를 보며 기뻐하던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데유. 경찰들이 군홧발을 신은 채로 방문을 열며 전재흥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간 그날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유."

"잡혀가신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요?" "예 잡혀간지 몇 개월 후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이장 ‘라권집’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유.”라고 한다. "회장님 무슨 살해요? 아버지가 누굴 살해했다고요?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잠시 정적이 돈다. "아버지가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을 동료 수감자의 증언으로 익히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강압수사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것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의 재심 결정에서 밝혀진 바 있시유. "라고 한다. "회장님 뭐라고 예? 재심 결정요?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한숨을 쉬시더니 “제가요, 우리 아버지를 경찰과 군법회의에서 빨갱으로 몰아서 살인자로 조작하여 사형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우리 아버지를 62년 만에 명예 회복을 시켰시유.” 하시곤 전화기 저편으로 '흐흑 흐흑'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는 많은 희생자 사연을 들어 봤지만, 회장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 “2010년 10월 29일 아버지의 기록 찾아 전국을 헤매다 “육군본부 계룡 대에서 판결자료”를 찾던 날 회장님의 일기장에서”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스산한 가을바람

앙상한 가로수 휘몰아쳐

마지막 잎새 떨쳐 버리던

2010년 10월 29일

계룡대 육군본부 민원실

아비 죽어 오십팔 년

가슴 저린 세월

고등군법회의 사형이란

판결문 받아 들고 망연자실

하늘인지 땅인지 깜깜절벽

피눈물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불효 여식

인권은 간곳없고

일 열은 사형 이 열은 무기

사형은 무엇이고

무기는 무엇인지

뜻이나 알고 한일자로 찍어진

그것을 놀렸더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한반도 골짜기마다

유골밭으로 만들어 놓고

동작동에서 현충원에서

저들은 저리도 당당한가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죽은 자 뼈를 갈아

아버님 영전에 바치고

산 자 정의와 진실이란 이름 앞에

두 무릎 굻리지 않고는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딸 바보” 아버지(전재흥)가 희생된 과정과 절차

〈통화2〉

사진2 희생자 전재흥(23세) 모습
사진2 희생자 전재흥(23세) 모습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대전 시굴은 어느 정도 진전이 되고 있어요?", "아직 유해가 나오지 않고 있어 걱정이여유.. 그래도 계속 시굴을 해봐야죠. 도로공사 할 때 유해가 8가마니가 나왔데유 글쎄 동네 사람들이 그래유. 그리고 거기 고랑있지유? 한해 홍수가 났는데 그 고랑이 넘쳐 밭바닥이 유해로 하얗게 덮었데유. 그래서 유해가 많이 소실되어 그런가 싶어유.", "너무 걱정마세요. 아직 시굴 안 한 곳이 더 있으니 나올 겁니다.", "예 그래야지유" "회장님 아버지가 희생된 과정과 절차를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어요.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유’. 오랜 세월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얘기는 샘물 솟아지듯 줄줄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유."

“아버지는유, 서천경찰서를경유해 대전형무소에 수감 되었시유. 할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면회 갔을 때 아버지는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데유. 고문과 구타를 20일간 당했다고 하더라고유. 삼촌한테 도민증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 아버지를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누명을 씌운 거래유. 어느 날 서천경찰서 경찰이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전 재산을 바치면 아들을 풀어주겠다'고 하더래요. 다음번 면회 때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데유.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재산을 바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만간 석방될 테니까요'라고 하시고, 할아버지는 듬직한 아들의 이야기만 믿고 기다렸지만, 영원히 아들을 볼 수 없었데유.“ 

전화기 저편으로 또 울음소리가 난다. 필자도 함께 운다. 전화기에서는 눈물을 훔치고 닦는 소리만 들린다.  “저는요. 70년이 지나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봇물 흐르듯 줄줄 흘려유.” 하신다. 필자가 회장님 울보라고 별명을 지어도 될까요? 하니 회장님은 순간 웃으시며 "그럼유 그렇게 불러유"라고 하신다. 서로 잠시 웃다 다시 사연으로 이어간다.

“피고 전재흥은 할 말 있는가?” "……." "피고 전재흥은 1951년 2월 21일 대전에서 군법회의가 열려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기에 사형을 선고 받았시유." "군사재판이 열린 지 11일 만인 1951년 3월 4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전재흥(1926년생 26살)은 다른 부역혐의자들과 함께 골짜기 안의 나무에 세워졌데유. 엄동설한에 신발과 옷도 얇았을 텐데 끌려가서…" 또 울음소리가 난다. '발사' 소리와 함께 '탕탕탕!' 총소리가 이어졌다. 26세 젊은 청년 전재흥은 빨갱이 짓을 했다는 혐의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 전미경의 어린 시절의 고난

〈통화3〉

회장님 아버지가 살인자로 사형당했다는 사연은 충격적이었다. 말문이 막히는 상황에서 "회장님 그 고난의 세월을 어찌 살았습니까. 저 같으면 못 살아요. 저는 못살았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회장님 아버지의 사연은 끝이 없고 힘겹고 고난의 삶의 연속이었다. 통화를 하면 보통 사람으론 상상할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 나왔다.

“저는요. 2살 때 아버지가 희생된 후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친구였기에, 서로 의논하여 제가 3살 때 생모를 재가시켜 버려유. 그 후 저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조모, 조부 슬하에서 자라유. 두 분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버지 희생에 대해 말씀하시지 안 했시유. 아버지가 끌려갈 때유 저는 군홧발에 차였고 할머니는 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맞아 탈골되었고 고막도 터져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청각장애자로 살았시유.”

"제가 11살 때인 1958년도 면사무소에서 직원과 경찰들이 인구조사를 하던 때였는데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어디 갔냐? 작은아들한테서 편지가 왔느냐?'며 시시콜콜 물었어유.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네놈들이 우리 아들을 죽여 놓고, 뭐가 어째?'하며 쇠스랑을 들고 '이놈들 다 죽인다'며 달려들었시유. 기겁한 공무원들은 달아났지만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정신은 임종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았시유. 그래서 할아버지 대∙소변을 3년 6개월간 받아내었시유. 아휴 말도 못해유. 제가 그렇게 험난하게 살았시유. 제 인생을 생각하문유. 너무 억울해서 잠을 잘 수가 없시유. 제가 그렇게 살았시유. 회고해보면 제 인생은 아무것도 없어서 억울해서 잠이 안 와요." 전 회장님을 위로해 줄 단어와 언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회장님 도대체 어떻게 사셨어요?" 하면 “그래도 살아냈시유. 그리고 이렇게 살아있시유.” 하신다.

 

▶ 담임 선생님의 회초리 사건

〈통화4〉

"회장님 안녕하세요." "히히히 예 안녕하세요." 둘이는 또 한참 웃는다. 사연은 슬프지만 둘은 자꾸 웃는다. 이제 통화가 더 길어진다. 식사 시간을 놓칠 정도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편해진 것이다. 사실 유족 입장과 유족과 무관한 사람 입장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회장님의 사연이 끝이 어딜까?' 싶다. 통화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이런 험난한 삶도 있을 수 있구나. 과연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제가요 11살 될 때까지는 그래도 행복했어요. 할아버지가 ‘내가 잘못해서 우리 애기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셨어유. ‘내가 죄인 중 죄인이다’하시면서 저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어떤 행동과 말을 해도 다 받아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실 정도로 애지중지 보호하셨시유. 오죽하면 친구들이 ‘나도 우리 엄마 아부지 죽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살고 싶다고 할 정도였시유. 제가유 5살 때부터 아버지 큰 신발을 싣고 다니면서 무릎이 성한 날이 없었시유. 그래서 할아버지가 무릎 보조대를 해주셨시유. 아무리 신지 말라고 해도 아버지 신발을 끌고 다니더래유."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끝나고 고난이 시작됐시유. 할아버지는 경찰이 다녀간 후로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정신도 온전하지 못해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어유. 늘 집안이 시끄러웠지유. 고모는 니 때문에 니 보려와서 오빠가 잡혀가서 희생되었다고 맨날 저 탓으로 돌려서 그렇게 저를 미워했시유.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퉁방울눈을 하고 아무 말 없이 눈알만 좌우로 굴렸어유. 뭔가 할 말이 있는 둣했어유. '할아버지 뭐 불편한 거 있어요?' '……' '큰 거 보셨구나!' 저는 할아버지 바지를 내렸시유. 순간 시큼하면서 지독한 똥 냄새가 진동했고, 똥 묻은 바지를 광주리에 담아 터벅터벅 걷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순식간에 얇은 옷을 파고들었시유. 똥 묻은 바지는 마을 개울에서 못 씻고 1키로미터 떨어진 논 웅덩이에서 씻어야 했시유. 돌을 가지고 웅덩이 얼음을 깨고 맨손으로 바지를 빠는 것은 어린 저에게는 고역 중의 고역이었시유.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며 빨래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손가락은 파란 심줄이 돋고 손등이 얼어 터져 피가 흘러시유.

집안일로 그날은 쪽잠을 잤으니 늦게 일어났고. 얼른 할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고 학교를 향했는데 2교시가 지난 뒤였어유. 슬금슬금 자리로 가 앉았지만 담임선생은 불효령이 떨어졌어유. '전미경 뭐하고 이제 와? 썰매 타다 늦었지. 이리 나와.' 젖은 치마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다그쳤지만, 가정형편의 상황을 전혀 말씀드리지 않았시유. 그땐 친구들 앞에서 그런 말이 정말 싫었시유.

선생님은 대답이 없자 '손 내밀어!' 라고 하며 대나무 회초리로 손을 내리쳤시유. 회초리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고 손바닥이 터질 것 같았어유. '하나, 둘, 셋,……열' 열대를 맞고 제자리에 앉으니 머리가 핑 돌았시유. 그날 밤 손이 너무 뜨거워 방문을 박차고 장독대에 쌓인 눈에 손을 넣었는데, 눈이 녹으면서 김이 나왔어유. 순간 콧등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시유. 몇 개월 후 4학년에서 학업을 멈추어야 했시유. 동네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돌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는 일이 잦아서 할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시유.“

 

▶1959년 7월 어느 날 회장님 일기장에서

《아버지 동갑 친구》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논 가운데 연못에서 할아버지 빨래를 하며

유성기에서 배운 앵두나무 처녀를 소리쳐 불렀다.

”미경아“

들에 가시던 아버지 친구

제동이 아저씨가 불렀다.

”좋으냐“

”예 아저씨“

”여름에는 손도 안 시리고 시원해서 좋아요“

그런데 할아버지 바지가 너무 커서 짤 수가 없어요”

신발을 벗어 놓고 물속으로 들어오신 아저씨

내종아리에서 피를 빨아

새끼 손가락 같은 거머리를 떼어

논으로 던지고

빨래를 짜

길 위로 올려 주고

하늘을 올려

“재흥아, 네 새끼 보이느냐, 이 나쁜 놈”

 

1959년 7월 어느 날 일기장에서...

 

▶전답과 본가를 팔아버리는 고모와의 갈등

〈통화5〉

"안녕하세요. 회장님 히히히" “예 잘 계셨어요? 대전 시굴은 계속하고 있나요?", “예 그런데 아직도 유해가 안 나와유. 이제는 반대쪽 산기슭으로 파본다고 하네유. 지켜봐야지유.” 구구절절한 사연은 계속된다. “아니 일년내내 농사꾼 뒷바라지하여 수확한 농작물은 고모들의 차지가 되었시유. 고모(2명)들은 할아버지와 저가 연명할 최소한의 농작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가져갔시유." ”제 살아온 세월이 이랬시유. 하시면서“ 또 전화 속에서 우는 소리가 난다. 필자도 함께 따라 운다.

"예? 친정아버지와 어머니 돌봐주는 어린 조카에게 고마워는 못할망정 어린 조카가 농사지은 것을 어른인 고모들이 다 가져가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회장님!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는 방황하기 시작했시유. 삶의 의미도 없고 상실감에 사로잡혀 수면제(20알)와 쥐약(1명)을 마셨지유. 누군가 위 세척을 시켜서 간신히 살았지만 2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즉,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인 저를 고모들이 13살이나 연상인 남자에게 강제 결혼을 시켜버렸시유."

"예? 강제 결혼예? 도대체 고모들이 왜 그랬어요?" “아마 재산을 자기들이 챙길려고 그랬던 것 같아유. 고모들은 땅 10마지기와 세 식구가 살던 집을 모두 처분하여 할머니만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버시유.” "그럼 회장님은 어디서 살아요?" ”친구네로 쫒아버렸시유. 어린 제가 고모들이 재산을 가지고 가니깐 '그 땅 우리 아버지꺼다' 하면서 팔아가지 말라고 소리치며 반항 했시유. 고모들이 저를 무척 싫어했시유.“

 

▶ 백마강에서 귀신이 되길…

〈통화6〉

"안녕하세요 회장님!!" "예 안녕하셨어유! 통화 가능하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부여유. 예 가능합니다." “내일은 MBC에서 한국전쟁 72주년 기념으로 '대전 골령골' 발굴장과 대전유족회 전미경의 삶을 다큐멘트리 촬영으로 부여의 집과 대전 유족사무실을 촬영하고, 발굴매장지 드러나는 모습도 촬영한데유.“ "아 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아구 저야 뭐 괜찮은데 촬영하시는 분들이 고생이지유”라고 하신다. "회장님 결혼해서 어떻게 사셨어요?" “예 결혼하고 보니 13살 연상인 남편과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어유. 그래서 다시 한번 삶을 포기하려고 백마강에 뛰어들었시유. 풍덩 소리와 함께 몸이 강바닥으로 쭉 가라앉았다가 하류로 둥둥 떠내려지유.

그러다가 모래톱에 걸려서 의식이 돌아온 저는 다시 한번 강물로 뛰어들려는 순간 강물속에서 웬 귀신을 만났시유. 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온 귀신이 써늘한 얼굴을 한 채 저를 쳐다보고 있었어유. 기겁을 한 저는 농사짓는 땅콩밭으로 돌아와서 원두막에 잠자고 있는 자식의 모습을 본 순간,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 신세가 이런데,, 내가 죽으면 저 자식도 똑같은 신세가 되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죽음의 기운을 몰아냈시유. 백마강에 비친 귀신은 바로 제 자신이었시유.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일을 했시유. 보따리 장사, 여관 식모 등 전전했시유 그러다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용실 기술을 배웠시유. 1980년 100만원을 대출 받아 미용실을 차렸시유. 낮에는 생업인 미용실 일하고 밤에는 소머리해장국을 끓여 선동리 노인들을 만나는 일과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시유. 미용실은 번창하여 세 자녀 대학까지 가르치고 노후생활을 준비하게 해 준거여유."

 

▶시댁 식구들에게 빨갱이 새끼라고…

"고모들이 할머니만 모시고 가버렸는데, 할머니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보고 싶었죠. 할머니가 보고 싶었는데 차비(45원)가 없어서 못 갔시유.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조기를 소금간을 해서 우리 애기가 좋아한다고 단지에 넣어서 부여시장에 오는 인편으로 보냈시유. 그 생선을 반찬으로 올려놓으면 시어머니는 저를 애비 잡아먹고 빨갱이 집안에서 준 거라고 먹지 않았시유.

어느 날 땅콩밭에서 일을 하는데 까치가 머리 위에서 울었시유. 그런데 저녁에 전보가 왔시유. 할머니 돌아가셨다고유. 출상을 치루기 위해 가야 되는데 큰아들 기저귀가 없어서 이불깃을 잘라서 기저귀를 만들어 채우고 초상집에 갔시유. 그동안 할머니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추석이 지나도 우리 애기가 안오네' 하시면서, 매일 정자나무 밑에서 담배 피우시면서 손녀가 언제 올까 기다리다가 화병이 걸려서 돌아가셨데유.“ "그 소식을 들으니 설움이 더욱 북받쳤시유. 그 동네에 함께 시집을 온 새댁이 '부여 미장원(전미경) 여자만큼 불쌍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없을기여 아구 불쌍해! 아구 불쌍해! 정말 불쌍해!' 그랬시유."

 

▶“진실을 노래하라” 시집 중 진주 시편

《그 아픔의 흔적》

첩첩이 쌓인 먹구름 찢어 가르며

장맛비 장대처럼 쏟아지던 그 여름

애국충절의 혼이 요동치는 남강의 푸른 물줄기

살인마의 총칼 앞에 육신은 난자된 채

검붉은 선혈 흘러 흘러 물들고

핏빛 여명 헤치고 울부짖으며

썩은 나무토막처럼 죽어 뒹구는

용산치 진성고개 초록빛 산하

뼈를 묻고 살을 묻던 콩밭골 숯막 지역

꺽꺽 차오르는 분노 목 안으로 밀어 삼키며

죽어야 했던 너덜겅 폐광 지역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

기어이 가고 마는 저기 저 황천길

끔엔들 잊을손가 그날을 잊을소냐

어찌 짓밟아 묻으려 하느냐

 

2011.5.7. 진주 희생자를 추모하며

 

▶맺는 말

어느 날 회장님은 51년 만에 대전 골령골 암매장지가 아버지가 묻힌 땅임을 알게 된다. 매장지 현장은 술 한 잔 부어 놓을 곳 없이 더러운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 유골이 어디쯤 묻혀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망연자실한 회장님은 “반백 년을 훌쩍 넘게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지를 찾아왔건만 땅이여 거기 누구, 내 아버지 가실 적에 본 사람 없소”라고 통곡했다. 그는 이때부터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의 시집은 '개인의 삶 외에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고모 등에 이르는 가족사이자, 나아가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유족을 대변하고 위로한다.', ‘역사가 개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신랄하고 정제된 시어로 고발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꾸짖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되묻고 있다.

 

(2부에서 계속)

 

 

참고도서: 전숙자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인권평화연구소, 2017년 3월 9일.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다음 달 25일 14회 계속(2부)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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