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 용산리 등 20여곳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단디뉴스는 민간인 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활동했고, 현재도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필자는 2018년 아산 설화산 발굴 후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257-2번지(비성골)에서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레었다. 누가 부르는 듯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비성골로 향했다. 이 지역은 1950년 7월 초 조치원경찰서에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약 100여명을 트럭으로 싣고 가 연기군 남면 공정리 은고개에서 집단학살한 후 비성골에 매장하였다고 알려진 곳으로, 당시 은고개 일대에는 1지점과 2지점에서 학살이 있었는데 1지점은 여자를, 2지점에서는 남자를 학살하고 매장했다고 밝히고 있는 지역이다. 비성골 매장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 충청남도 보도연맹원 사살의 가해자와 지휘명령주체는?

충청남도는 전쟁 발발 다음 날 상급기관인 충남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6월 25일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을 시작으로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등 보도연맹원 포함 예비검속을 단행한다. 당시 충남 각 지방경찰서에 하달된 지휘∙명령체계를 살펴보면 내무장관 백성욱(1950.2.7.~7.17)→치안국장 장석윤(1950.6.17.~7.17)→충남경찰국장 이순구(1949.6.20.~1950.7.20.) →각 경찰서장 →각 지서 주임 순으로 내려졌다. 이러한 지휘∙명령체계는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에는 경찰도 군의 지휘∙명령체계에 속하게 되어 계엄사령관(정일권)이나 헌병사령관(송요찬)의 지시를 직∙간접적(계엄법 제9조)으로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1) 그리고 북한군의 주공격 선상에 있던 지역에서는 후퇴하던 제17연대도 부분적으로 가해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지역에서 활동했던 특무대라면 방첩대(SIS) 대전 소속으로 추정된다.

한편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육군무관 밥 에드워드의 보고서”에는 미군에 의해 촬영된 현장사진이 설명과 함께 동봉되어있다. 이것은 사살 현장에 미 대사관 직원과 미 극동사령부(FEC)소속의 장교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 정부도 충분히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런던 주재 미국대사관은 위닝턴의 이야기를 ‘학살조작(atrocity fabrication)’이라며 부인하였다. 미국은 자국민의 기자를 조작자로 모독한 것이다.

▶세종시 비성골 학살(국민보도연맹)의 배경

연기 보도연맹사건 희생자의 매장 추정지로 알려진 연기군 산울리 257-2 지역은 행정중심복합도시 6-3생활권 내에 있다. 도시개발이 진척됨에 따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지(비성골)에 대한 유해의 존재 여부를 조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한국토지주택공사 세종특별본부는 이 지역에 대한 유해 시∙발(굴)조사를 인류진화연구소(박선주 단장)에 의뢰하여 실시하였다. 비성골 학살은 1950년 1~2월경 연기군 보도연맹결성 후 예비검속은 6월26일부터 7월8일까지 시작되었고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은 조치원경찰서로 이송되어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인원이 너무 많아서 임시창고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7월 8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학살된 인원은 200여명이었다.

▶비성골에서 형의 학살 장면을 목격한 동생!

비성골에서 형(兄)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은 ‘산등성 부근에 참호를 약 60~70m이상 길게 판 후 사람들을 꿇어앉힌 채 총으로 사살하여 파묻었으며, 현장에는 약 100여구 정도의 시신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지금은 매장 추정지가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사건 당시는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현장 상황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인과 경찰이 후퇴한 후에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갔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마을로 돌아왔더니 마을은 이미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인민군들이 주민들을 동원해 아직 수습되지 않은 시신들을 수습하도록 독려하였다고 한다.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일부 유족들은 비성골 이곳저곳에 가매장을 하였다가 나중에 이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나 타지역은 깊은 산골짜기에 매장지가 분포되어있고 시신을 찾은 사람은 거의 1%도 안 된다. 반면에 충남 연기군 비성골은 민둥산이라 형이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숨어서 보았다고 한다. 학살 장면을 가까이에서 보았을 그 심정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이다.

 

▶발굴지에 주인 잃은 고무신들의 행렬

비성골은 끝없이 검정 고무신만 출토되었다. 필자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궁금해서 단장께 여쭈었다. ‘왜 이 지역은 고무신만 나오냐고’ 단장님 말씀 “이 지역은 인민군이 시신을 찾아가도록 주민을 동원해 독려하여 모두 찾아갔다고 한다. 순간 이런 일도 있을 수가 있구나 싶었다.” 경상도는 언제 어디서 학살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태반인데 이곳은 시신을 찾아가다니 참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발굴을 시작하자 자꾸만 검정 고무신만 출토되었다. 필자는 다시 맘을 가다듬고 힘을 내어 흙을 파기 시작했다. 살포시 검정 고무신 밑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너무나 반갑고 힘이 솟는 듯 혼신을 다해 흙을 파고 또 파기 시작했다.

 

순간 살며시 비지고 나오는 신발에서 ‘증’이란 상표가 있는 고무신이 출토되는 순간 하늘 나르듯이 기뻤다. 위 사진 중 오른쪽 사진에는 ‘송’이라는 성이 새겨져 있다. 자신의 신발을 알리기 위해 표시해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희생자들 중 지식인이거나 부유층일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고무신은 일반 검정 고무신이 아니다. 고급스럽고 상표가 거의 새겨져 있다. 너무나 신기해서 단장께 또 여쭈었다. ‘왜 신발에 상표들이 새겨져 있고 그리고 굽이 있습니까?’ 단장님 말씀!! 여기에서 출토된 고무신은 국산보다 외국에서 수입한 신발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학 다녀오는 길에 구입하여 가지고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어릴 때 얇은 검정 고무신은 보았지만, 굽이 있는 고무신은 처음 보았고 밑창과 고무신 전체가 얇았다는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출토된 신발은 밑창이 아주 두껍고 전체적으로 고무가 단단해 보인다. 수입품 신발이면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은 신기 어려웠던 고무신이라고 한다.

 

▶비성골 발굴지에 안개와 가랑비 내리는 날

비성골 발굴기간 동안(2018년 6월 20일~ 6월 25일) 장마철이라 안개와 비가 잦았다. 발굴장에서는 비가 오는 것이 가장 곤혹스럽다. 유해가 비를 맞으면 빨리 부식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성골은 유해가 적게 출토되었다. 가랑비가 휘날리는 날 발굴장을 바라보니 대부분의 시신은 찾아갔지만, 무연고인 유해는 쓸쓸히 혼자 남아있다. 이제야 발굴되어 안식처를 찾게 되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아닌가 싶어 매우 쓸쓸하고 착잡했다. 발굴장을 둘러싸고 있는 쭉쭉 뻗은 버드나무들도 발굴지를 감싸고 있었지만 이제 복합도시건설로 사라지게 되겠지 하면서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안경호 국장이 발굴장 전체 배경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포크레인에 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위험을 감수하고 발굴에 전념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비성골의 사살과정과 시신을 수습한 증언의 목소리

당시 갈운리 ‘수멍재’ 현장 아랫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신순용(당시 13)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사살 당일 저녁 때 쯤 경찰들이 와서 ‘사격훈련하니까 집에서 나오지 마라, 나오면 큰일 난다’며 주민들을 전부 집으로 들어가게 한 후 엄청난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 지역의 희생자 유족들은 대부분 시신을 수습한 경우가 많았는데 사살 현장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참고인 송재진‘은 구덩이 속에는 두 사람씩 손이 철사로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다’고 했다.

▶비성골의 발굴지에서 위령제 및 안치

드디어 세종시 연기면 비성골 발굴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유해와 유품 중 유일하게 검정 고무신만 많이 출토된 신발도 함께 추모의 집에 보관되었다. 주인 잃은 검정 고무신 유품들은 희생자들의 신분과 직업 등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맺음말

충청남도 지역의 희생자들은 보도연맹원과 좌익혐의 등을 이유로 예비검속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좌익활동과 무관하게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장이나 이웃의 권유로 가입된 사람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에 살해행위를 담당한 경찰과 헌병 그리고 제17연대는 희생자의 불법행위 유무에 대한 확인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사살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사살명령이 언제 누구로부터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공식적인 문건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러나 예비검속에 이은 총살행위가 대전∙충남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된 점과 상명하달식의 군∙경 지휘명령체계를 고려한다면, 불법사살에 대한 지시나 명령은 상부기관인 내무부와 국방부 및 계엄사령부로부터 위임된 것이며 따라서 그 책임은 이들을 관리해야 할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주1)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희생지(비성골)유해 시(발)굴 조사용역 보고서』. 한국토지주택공사 세종특별본부∙인류진화연구소. 2018.7.

 

다음달 25일 13회 계속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