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 부자의 고마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시혜비(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252-7)를 찾은 남지여중 청소년기자단
윤씨 부자의 고마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시혜비(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252-7)를 찾은 남지여중 청소년기자단

강원도에서 시작한 물길이 경상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낙동강은 어떤 아픔의 역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낙동강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봤다.

1950년 6월25일 시작된 한국전쟁, 8월초에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낙동강 둘레에 살고 있던 창녕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가까운 밀양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4,5일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 하고 떠난 피난이었지만, 10월초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창녕에서 밀양으로 한꺼번에 몰린 피난민들은 잠자리와 먹을거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온나라가 전쟁이라 창녕 피난민들을 위한 구호 대책은 있을 수 없었다.

보리를 거둬들여 여름을 나고 있을 때, 밀양 사람들도 피난 온 창녕 사람들에게 나눌 줄 식량은 부족 할 수밖에 없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식량을 아낌없이 나눠 참나눔을 실천한 사람이 밀양 초동면 신호리에 살고 있던 윤세관 윤정현 부자였다. 전쟁중에 참나눔을 실천한 윤세관 어른과 그이 아들 윤정현은 피난민들이 잘 곳이 없어 연못 제방에 노숙을 하고 있을때, 보릿짚을 나눠주거나, 집에 있는 곡식을 나눠주었다. 피난민들에 곡식을 다 나눠주고 본인들도 죽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윤씨부자세관정현병인난시혜비
윤씨부자세관정현병인난시혜비
윤씨부자 시혜비 뒷쪽에 있는 모은각
윤씨부자 시혜비 뒷쪽에 있는 모은각

전쟁이 끝난 뒤 1956년 11월에 윤씨 부자를 위한 위로연 자리를 창녕 남지에 마련했다. 창녕 7개 읍면에서 약 300여명이 참석하여 윤씨 부자의 참나눔에 시나 글로서 그 고마움을 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마움을 잊지 못해 그동안 얻은 곡식을 돌려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윤씨 부자를 찾아갔지만, 곡식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973년에 윤씨 부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은계를 조직하여 모은각과 시혜비를 창녕 남지읍 고곡리에 세웠다.

 

시혜비와 모은각이 세워지고 난 뒤 1975년 6월 25일 한국일보에 실린 윤씨 부자 이야기
시혜비와 모은각이 세워지고 난 뒤 1975년 6월 25일 한국일보에 실린 윤씨 부자 이야기
윤씨부자 시혜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박진전쟁기념관. 전쟁을 기념한다고 찾는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전시관
윤씨부자 시혜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박진전쟁기념관. 전쟁을 기념한다고 찾는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전시관
박진전쟁기념관 옆 산에 있는 박진전투전적비
박진전쟁기념관 옆 산에 있는 박진전투전적비

해마다 6월이면 한국전쟁과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한다. 전쟁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갔다. 윤씨 부자 참나눔 이야기를 <창녕이 겪은 6.25전쟁- 창녕문화원발행>에서 보고 한국전쟁 당시 부패한 정치군인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 속에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이 떠올랐다. 어려운 전쟁 중에 실천한 윤씨 부자의 참나눔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이 교과서에 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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