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저울처럼 형평(=평등)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꿈꾼 형평운동이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4월 22일부터 지역 내외에서 다양한 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단디뉴스는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형평운동의 과정과 역사적 의의,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불평등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형평, 저울처럼 공정함을 의미하는 이 말은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이 지향했던 사회상이다. 형평사 주지에 쓰여진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는 말처럼,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 형평운동의 시작이었다.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누어지던 시대, 보편적 인권을 화두로 내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으로 평가되는 형평운동은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시작됐다. 기본적으로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궁극적 목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형평사는 이 점에 기초해 여러 활동을 이어갔다.

형평사의 이 같은 활동은 작금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오랜기간 형평운동을 연구해온 김중섭 경상국립대 명예교수는 “인간이 차별과 억압 아래 굴욕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며 “형평운동은 바로 그러한 억압과 굴욕에서 벗어나 사람답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가장 인간적인 호소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소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러 형태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차별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의 정신이 “더욱 절실하게 요망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평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형평운동의 정신을 일깨워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며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을 강조하고 실천한 형평운동의 역사는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진=국립진주박물관]
[사진=국립진주박물관]

△형평사의 태동 –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면 대안동의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는 시작됐다. 이날 백정을 중심으로 모인 70여명의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백정들을 향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인간 대우를 실행하고자 했다. 다음날 형평사 발기 총회가 열려 형평사 창립 취지를 담은 ‘형평사 주지’ 등을 통과시켰다.

형평사는 백정 권익을 위한 단체였지만, 비백정 출신의 지역 사회활동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진주 3.1운동을 주도한 강상호, <조선일보> 지국장을 맡고 있던 신현수 등이다. 물론 진주 중앙시장에서 정육점을 하고 있던 이학찬 등과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백정출신 장지필 등의 백정들이 형평사의 중심이었다.

형평사는 경남 진주에서 시작됐지만, 전국으로 확장돼 신분차별 해소 운동에 불씨를 지폈다. 1923년 5월 13일 진주극장에서 열린 창립 기념회에만 백정 지도자 400여명이 참석했고, 1923년 말 무렵까지 본사 1개, 지사 12개, 분사 67개의 조직체가 생겨났다. 1930년에는 그 수가 165개로 늘었으며, 형평사 측은 최대 40만 명의 사원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진주였나 - 1923년 경남 진주는 인구 1만 5천 명에 미치지 않는 작은 고을이었다. 진주가 오랜 세월 유학의 중심지였고, 백정 차별이 북부지역보다 남부지역에서 더 심했다는 흔적도 있지만,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진주농민항쟁, 동학농민운동 등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추진세력이 진주에 많았던 점이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된 이유로 꼽힌다.

알려진 바로 백정들의 신분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갑오농민항쟁(=동학농민운동)’이었다. 갑오농민항쟁에 앞서 일어난 진주농민항쟁 역시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사람은 하늘과 같다’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믿는 이들로, 갑오농민항쟁 뒤 나온 갑오경장 개혁안(=가죽 다루는 사람을 천민에서 벗어나게 해준다)의 이행을 바랐다.

진주 3.1운동도 형평사 창립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은 여러 형태의 사회운동이 지역에서 시작되는 씨앗이 됐다. 3.1운동을 주도한 젊은이들이 사회, 교육, 자선단체 등을 구성했고, 이들 단체의 등장이 민족 해방은 물론 불공정한 사회제도와 관습을 바꾸어가려는 동력이 됐던 이유이다.

 

형평운동기념탑. 지금은 경남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평운동기념탑. 지금은 경남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평운동의 성과 – 12년간 진행된 형평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인권 증진’이었다. 특히 호적에 남은 신분표시를 없애게 된 것은 형평사의 구체적 성과로 평가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철폐가 이루어졌다지만, 이때까지 백정은 호적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돼, 사회적 차별을 겪고 있었다. 형평사 간부들은 경찰부 등을 방문해 신분 표시를 없앨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형평운동은 공동체운동으로써, 교육·여성인권 증진 부분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원 자녀의 학교 입학을 적극 권장했고, 자녀들이 학교 내에서 겪는 업신여김을 없애려 노력했다, 야학이나 강습소 같은 비인가 학교를 꾸리기도 했다. 여성 대의원의 존재나 독자적인 관련 여성 단체가 생긴 점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여성인권 신장을 의미했다.

특히 형평운동과 관련한 충돌사건이 1923년부터 30년까지 꾸준히 증가한 점은 차별과 관습에 저항한 형평운동의 인권 증진 활동이 점차 활발해져 왔음을 보여준다. 김중섭 교수의 저서 <형평운동>에 따르면, 1923년 17건이었던 반형평운동 충돌사건은 1930년 67건까지 늘어난다. 형평운동의 활성화, 형평사원들의 의식 개선을 짐작할 수 있다.

형평사의 활동은 1920년대까지 활발히 진행된다. 1929년에는 잡지 정진(正進) 창간호 발간이 이루어졌으며, 민족해방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신간회 등 다른 사회단체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특히 일본에서 부락민 해방을 위해 건립된 단체 수평사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대외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늘려 나갔다. 아시아 최초의 국제교류 인권운동으로 거듭난 셈이다.

△반대에 부딪힌 운동 – 형평운동의 취지와 목적은 높았지만, 운동은 내내 반대에 부딪히고는 했다. 1909년 선교사 리알 목사가 백정 신도들도 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자, 백정이 아닌 교인 200여명이 예배당을 뛰쳐나간 사건이나 형평사가 창립된 1923년 5월쯤 지역 농청 대표자들이 형평사 반대를 다짐하고, 쇠고기 불매운동을 벌인 일 등이다.

특히 반대자들은 사찰 ‘의곡사’에 모여 형평사 활동을 못하게 하겠다며, 형평사에 관계하는 사람은 백정과 동일한 대우를 할 것, 쇠고기를 사먹지 않을 것, 진주청년회나 노동단체가 형평사와 관계 맺지 못하게 할 것, 형평사를 배척할 것 등을 결의했다. 노동공제회 등의 중재로 이 같은 활동은 멈춰졌지만, 형평운동 반대 움직임은 간헐적으로 지속됐다.

 

형평운동가 강상호와 소년운동가 강영호.
형평운동가 강상호와 소년운동가 강영호.

△형평사의 몰락 – 1923년 11월 대전에서 열린 대표자 대회에서 형평사 본사가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 뒤 내부분열을 겪던 형평사는 결국 1924년 8월 형평사 본사를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진주 본사는 경남지사로 격이 낮아졌고, 진주 지도자들이 형평운동에 미친 영향력도 줄어들게 된다.

그러던 형평사는 1930년대 들어 이념적 갈등을 시작으로 점차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이른 바 ‘해소론’이 제기되면서, 형평사를 해체한 뒤 각 부분별 계급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난 것이다. 날로 침체되던 형평운동은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이라는 공산주의 운동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더욱 쇠퇴한다.

일제 재판부는 1936년 이 사건이 날조됐다고 판단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던 중 형평운동은 인권운동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잊은 채 이익단체로 전락해갔다. 1935년 형평사는 형평사 간판을 내리고, 명칭을 ‘대동사’로 바꾸었다. 대동사는 소수의 경제적 이익 집단으로 전락해, 향후 일제에 협력하는 등 부역세력으로 기록됐다. / 단디뉴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