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의 진화와 평양냉면, 진주냉면의 유래

메밀국수인 냉면이 유래한 지역은 평양과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인 듯하다. 많은 자료들이 거기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평양과는 거리가 먼 한반도의 남쪽 진주가 '평양냉면'과 함께 '진주냉면'이라는 고유성을 획득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역적 차별을 극복하고 중앙에 진출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공통점과 중앙에서 거리가 먼 변방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두 지역이 접대문화, 교방문화, 기생문화를 발달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이들 문화와 교방음식 국수가 만나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의 멸망으로 교방문화 기생문화가 사라졌어도 척박한 농업환경으로 인해 쌀농사가 어려운 평양과 평안도에서는 메밀음식 평양냉면이 서민음식으로 계속 살아남아 진화 발전했다. 하지만 쌀농사 중심의 진주지역은 메밀 음식 문화가 서민 식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진주냉면은 교방문화 기생문화와 함께 맥이 끊어져 사라지게 된다.

'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을 연구한 정치영은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조선 초기의 농경지 규모와 분포를 분석하였다. 평안도를 언급하는 가운데 "경지 면적이 가장 많은 도는 평안도였으며, 그 다음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순이었다." 그러나 "가장 논이 많은 지역은 전라도였으며, 그 뒤를 차례로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가 이었다. 밭은 평안도가 가장 많았다."라고 하였다. 평안도는 경지 면적은 넓었으나 논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밭이었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를 한 오수창은 ''평안도의 지력이 삼남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은 시기에 관계없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라고 하면서 중앙정부에서도 세금을 가볍게 하여 변방 평안도를 배려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 평안도는 밭농사 중심이었으며, 기후, 강수량 부족, 떨어진 지력 등 ''토지가 척박하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농업을 포기하고'', ''정치적으로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문반 관인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상업에 대거 종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평양과 평안도 지역은 자연지리적 조건의 열악, 정치적 차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 겹치면서 조선 초기부터 힘들고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평화시기가 오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국제관계가 안정되자 청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해졌고, 사신의 왕래가 잦아졌다. 그 중심에 평양과 평안도가 있었다. 조선 후반기 ''평안도가 경제적 여유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의 몫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지리적 변방에서 상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관과의 결탁과 관리의 접대'가 절박한 생존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황해도 이남 지역에서는 논농사가 가능했지만, 강수량이 부족하고 추운 평안도 이북 지역에서는 밭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자연스럽게 평양과 평안도 지역에는 밭에서 나는 메밀이 풍부했고 따라서 메밀을 이용한 국수 등 메밀 음식 문화가 발달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쌀농사를 짓기 어려운 평안도에서 주력 작물인 메밀을 가을에 추수해 겨울에 먹었던 서민음식이 '평양냉면'의 유래인 것이다. 이렇게 자연지리적 조건 때문에 서민들의 음식문화로 유래한 메밀국수가 '관과의 결탁과 관리의 접대' 문화인 기생문화와 만나면서 야참과 음주후의 해장 별식으로 용도가 변하고, 내용이 진화 발전하면서 '평양냉면'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황규민 약사
황규민 약사

서역에서 시작된 밀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국수문화를 낳았고 그것은 다시 중국으로 이어졌다. 국수문화는 송나라 때 꽃을 피우며 절정에 이른다. 송나라 이전 고대국가 수도들은 정치 군사 중심의 폐쇄적인 고대 도시였다. 하지만 북송 수도 카이펑은 이동과 장사가 가능한 개방적인 국제무역 도시, 밤문화 생활이 활발한 상업 도시였다. 국수는 비즈니스로 바쁜 국제 상업 도시 카이평에서 밤이나 낮이나 즐길 수 있었던 최초의 패스트푸드였던 것이다.

그 밀국수가 국경을 넘어 평양과 평안도에서 메밀을 만나 메밀국수로 탄생했다. 그것은 다시 유흥과 음주의 접대 문화에 흡수되어 유흥 중의 야참으로, 음주 후의 해장을 위한 패스트푸드로서 재탄생했다. 평양에서 임기를 마치고 중앙으로 돌아온 관리들은 그 메밀국수를 '평양냉면' 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패스트푸드와 기생문화는 진주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논농사 중심의 진주지역에서는 밀 뿐만 아니라 메밀도 흔한 작물이 아니어서 서민 음식 문화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접대를 위한 교방음식의 일부로서, 기생문화와 함께하는 야참과 유흥별식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진주 양반들은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다. 평양과 평안도처럼 지역차별에 의한 소외가 아닌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진주를 중심으로 한 북인 주요 세력이 인조반정과 이인좌의 난으로 몰락하였으나 이후 다수는 서인과 남인으로 흡수되어 중앙 관리로 진출합니다."라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재기에 성공한다. 재기의 발판을 놓는데 진주냉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평양과 평안도에서는 상업을 통해 축적한 부의 확대 재생산과 지역차별 극복, 중앙진출을 위한 접대 문화로서 기생문화가 발달했다면, 진주지역에서는, 농업경제로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기 위한 접대문화로서 기생문화가 발달했다. 정치적 재기 수단 중 하나가 논개를 활용한 우국충절의 고장임을 각인하는 여론전이었다면 또 다른 하나는 기생과 냉면이라는 교방문화를 벤치마킹한 유흥과 접대를 통한 각개격파였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어 서인과 남인으로 변신해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진주는 경상남도의 중심지로 관찰사를 비롯해 수많은 관리들의 부임지였습니다. 이들이 진주 근무를 마치고 상경한 뒤 고위관리층으로 성장하면서 진주냉면의 위상이 높아진 면이 크다고 봅니다." 평양냉면이 그러하였듯 "진주를 거쳐 간 중앙 정계 관리들의 입담"이 진주냉면을 유명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메밀국수는 평양과 평안지역의 서민음식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기생문화와 만나게 된 그 메밀국수는 평양에서는 '평양냉면'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역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평양과 평안 지역 유력자들의 비즈니스 수단이 되었고, 진주에서는 '진주냉면'이란 이름을 달고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진주 양반들의 재기를 위한 로비 수단이 되었다.

* 이 글은 쓰는 데에는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경상대 사학과 박사 수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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