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시민, 운동에서 생활

마을에는 마을주민 말고 마을시민들이 많이 모여 살아야 한다. 특히 농촌마을에는 농부 말고도 다채로운 재주와 경험을 가진 마을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농촌은 농사일에만 매달리는 농장 일터가 아니라, 일과 삶이 하나 되는 사람 사는 마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시민’이란 근대 이후 사회에서 도시 지역이나 국가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원이었던 그 ‘시민(Citizen)’을 말한다.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의무를 가지고 발휘하는 존재인 바로 ‘깨어있는 시민’이다.

이 같은 시민의 개념은 18세기 봉건사회를 혁파하려는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프랑스혁명 등 ‘시민혁명’을 계기로 본격 등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조의 기본 원칙에서는 "인간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천명한다. 제2조는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민의 권리를 새기고 있다.

이처럼 시민과 민주주의는 본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시민이 곧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주인이기 때문이다. 시민이라는 개념의 탄생시점도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발원하고 있다. 바로 도시국가의 주권, 또는 참정권을 가진 계급이 시민이었다. 당시 시민의 개념은 공간적 시민, 경제적 시민, 정치적 시민 등 세 가지로 구분했다. 공간적인 개념은 시민의 형성 및 활동 공간으로서 도시의 거주민이다. 경제적 시민은 도시국가라는 공동체 내에 재산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는 개념이다. 정치적 시민은 공동체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 존재라는 것이다. 현대적 시민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 봉건 귀족의 쇠퇴기에 새로운 시민들이 대거 등장했다. 농업, 상업의 발전으로 자본을 축적한 신흥 유산계급들은 정치권력에서는 소외되고 배제되자 불만이 쌓였다. 정치 참여를 요구하며 시민혁명을 일으켰다. 산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 자본가들을 ‘브루조아(Bourgeoisie)’로 통칭했다. 자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다. 돈의 힘을 앞세운 이들은 구체제(Ancient Regime)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혁명적 성향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념적으로는 자본주의에 편승해 구체제의 억압으로 벗어나려는 '자유주의'로 무장했다.

하지만 세상이 진보하면서 ‘시민’은 모든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일컫는 말이 되었다. 심지어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게 국민 국가의 구성원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국가시민’처럼 국민과 동의어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민’의 의미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의사와 행동으로 근대 국가에 주체로서 참여하고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에 가깝다고 규정할 수 있다. 나아가, 지구촌 시대에 국가시민은 이미 세계시민으로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생활정치’로 새로운 시민사회를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서구를 중심으로 추구해온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실제로는 가공스러운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찾아서’를 통해 계급정체성이 약해지고 가족 유대가 불안정해지는 '개인화' 시대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이러한 위험사회를 극복하려면 급진적으로 개인화된 '정치적 시민(citoyen)'들이 기존의 제도들에 대항해 새로운 ‘생활정치’를 통한 새로운 시민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 유연화, 현대판 프롤레타리아인 워킹 푸어 증가, 자본과 시장에 권력을 빼앗긴 국가의 쇠퇴, 소비주의 문화, 가족의 해체, 여성, 장애인, 다문화 등 취약 계층의 사회적 배제,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네트워크에 매몰된 고독한 군중, 정치적 무기력증에 의한 사회적 무관심 등. 모두 사회적 인간이 몰락한, 위험한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모습이자 속성을 나타내는 병리적 증상들이다.

이런 불공정하고 비관적인 사회에서 민주주의 시민혁명의 주체인 사회적 인간은 실존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의 성공과 안위만 좇으며 경쟁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힌 고립되고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들만 양산될 뿐이다. 공동의 사회 문제는 사라지고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선무당들의 말장난식 힐링 처방전이 남발되면서 모든 책임은 개인의 문제로 전가된다.

사회학자 김윤태는 『사회적 인간의 몰락』에서 “사회적 인간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도 사라진다”면서 “개인의 자유가 증가할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이타주의, 사회의 공동선, 좋은 사회에 관심이 사라진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 사회적 인간이 몰락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바보로 전락한다며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권력과 자본에 맞서 행동하자고 당부한다.

그리고 그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급속히 대두된 ‘신사회운동’을 새삼스레 다시 꺼내든다. 생태공동체마을 등 신사회운동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복원을 추구하며 다양한 개인의 연대를 꿈꾸자는 것이다. 초계급적인 운동이며, 문화적인 가치, 정체성, 삶의 질의 차원을 중시한다. 조직이 수평적이고 유연하며, 의사 결정 방식이 상향식이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초국적 방식이라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 발전과 지구 시민사회를 발전시킨다.

 

‘마을시민’들이 자치하는 민회를

제주도에는 ‘제주민회’가 조직돼 있다. 43개 읍면동마다 구성된 주민대표기관이자 주민자치조직인 주민자치위원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른바 읍면동 단위의 풀뿌리자치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를 주민의 손으로 실현해보려는 노력이다.

‘민회’란 시민의 회의체 모임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도시국가인 폴리스들의 시민총회를 말한다. 아테네에서는 에클레시아(ekklesia), 스파르타에서는 아펠라(apella), 로마에서는 코미티아(comitia)라고 불렀다. 가령, 그리스의 민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아고라(agora)라는 이름의 민회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민회는 고대국가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도였고, 대개는 국가의 최고 권력기구로서의 위상을 지녔다. 그 진면목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전의 왕정, 과두정, 귀족정의 형식적인 민회와 달리, 시민들의 자유로운 참여, 빈번한 정기적 회합, 정치적·재정적인 제안과 수정, 토론이 허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아일랜드 시민회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시민의회, 아이슬란드의 국민회의 등 선진 시민사회에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광역 단위로 서울민회, 제주민회, 기초단위로는 강북민회가 있다.

‘민회’를 하려면 민회를 이끌어나갈 ‘시민’이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마을(Commune)에서는 마을시민들이 있어야 한다. ‘마을시민(Commune Citizen)’이란 말 그대로 마을에 사는 시민이다. “지역공동체적 사회자본, 혁신적 인적자본으로서, 마을 또는 지역사회공동체사업에서 주체적 역할을 감당하는, 농촌 및 지역 주민”을 뜻한다. 가령 마을공동체사업의 책임주체인 ‘마을기업’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역량을 갖춘 책임 있는 사업주체 역할과 책무를 감당할만한 유능한 인력이다.

무엇보다 마을시민이 살지 않는 마을은 마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선뜻 마을이라 부르기 어색하고 주저된다. 하물며 마을공동체는 제대로 구성되거나 작동하기 어려워 보인다. 농부들만 모여서 농사만 짓고 사는 곳은 마을이라기보다 사실 농장에 가까운 것 아닌가. 농부들이 먹고살려고 농사일에만 매달리는 힘겹고 우울한 공간이 아닌가. 우리 농촌의 현실이 그렇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부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미 우리 농촌마을에는 마을시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마을시민들이 살아갈만한 이유와 조건이 미비하거나 성립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우리 농촌은 충분히 공동화, 형해화된 상태다. 이런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선의를 품고 작심하고 하방을 감행하는 도시민조차 마을시민으로 살아갈 실제적인 준비와 훈련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을과 지역을 재생하려면 그 일을 책임지고 맡아 할 마을시민부터 발굴하고 양성하는 정책과 제도가 시급하다. 그래야 마을은 ‘깨어있는 마을시민들의 생활정치’를 통해 공동체도 이루고 사회도 고치거나 바꾸고, 우주 같은 ‘대동세상’으로 함께 전진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