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부동산, 소유보다 점유

“개인은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는 반면, 사람이 창조하지 아니한 것 즉, 토지, 환경 같은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귀속된다.”

이른바 조지주의(Georgism, 지공주의) 경제학파의 기조는 단순명쾌하다. 인류의 공유자산인 땅은 주인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지주의의 발의자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19세기에 활동한 미국의 저술가, 정치가, 정치경제학자이다. 대표 저서 『진보와 빈곤』을 통해 산업화의 부작용인 빈부격차에 대한 처방으로서 ‘토지가치세’를 주창했다. 19세기 후반, 자본과 토지를 구분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헨리 조지의 정신은 현대에 이르러 경기도의 이재명 지사까지 닿았다. 이 지사는 조지주의의 첨병을 자처한다. “토지공개념이 헌법에 도입된 지 수 십년이 지났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으면서 부동산이 특정 소수의 투기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그 구체적인 해결책으로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을 제시할 정도다. “모든 토지에 공개념을 도입해서 보유세를 부과하고 이를 국민에게 100% 돌려주는 기본소득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공멸에 이르는 불패신화, 아파트공화국

오늘날 한국에서는 땅은 물론 돈도, 심지어 인격마저도 상품화된 지 오래다. 그 천민 자본주의, 야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천박한 경제와 사악한 사회는‘돈 놓고, 돈 먹는’ 투전판 과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비정한 정글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함축해놓은 최적의 히트상품이‘아파트’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또 다른 이름은 ‘부동산 공화국, 또는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주거용 주택이 아닌 투기용 상품에 불과하다. 입주자들은 대개 분양원가도, 택지 가격도, 건축비용도 알지 못한 채 아파트를 맹목적으로 구매하고 소비한다. 전적으로 공급자인 건축업자들 마음대로 시장질서가 돌아간다. 정부는 업자들의 파행을 방관하거나 은근히 보호한다. 다들 원가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어차피 ‘아파트 불패신화’의 난장판에서 매매 차익만 남기면 되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니까.

설사 빚을 내서 ‘갭투자’ 꼼수로 아파트 몇 채를 보유한다고 해도 부담이 되지 않는다. 보유세는 선진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양도소득세도 터무니없이 저렴하다. 세금을 아무리 많이, 자주 낸다한들 시세차익 불로소득‘한방’이면 금세 만회할 수 있다. 그렇게 한국에서 땅이나 건물 등 부동산은 공유재나 공공재가 될 수 없다. ‘돈 놓고 돈 먹는’매력적인 고수익 투기상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국에서 집은 사는(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buying) 것일 뿐이다.

 

부동산 자산 양극화의 ‘젠트리피케이션’ 시대

한국에서는 이제 초등학생들조차 ‘지주’나 ‘건물주’를 장래 희망직업으로 꼽는다. 말세다. 부와 명예, 그리고 그 사람의 능력과 인격이 부동산이나 화폐를 보유하는 수나 량으로 계량화되어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지 땅이나 건물을 소유했다는 극히 사사로운 이유 하나로, 땅과 건물이라는 공유재가 발휘하는 모든 사회적 권리와 공동체의 가치를 독점할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소득 양극화 못지않게 자산 양극화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주택소유통계’에 따르면, 2018년 11월 기준으로 1123만 4천 가구의 주택보유자 가운데 상위 10%의 평균 주택 자산가액은 9억7700만원인 반면, 하위 10%의 평균은 2600만원에 그쳤다. 약 38배의 격차를 보인다. 공표된 주택 자산가액은 공시가격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시가를 기준으로 하면 상‧하위 격차는 더 심각하게 벌어진다.

2014년 정의당 박원석 의원실의 부동산 보유현황 조사도 한국사회의 자산양극화 심각성을 실증한다. 한국 상위 1% 부자가 보유한 부동산(2013년 공시가격 기준)이 전체의 16%, 상위 10%가 전체 부동산의 46%를 차지하고 있다. 상위 1%의 부동산 총액은 하위 55.6%가 보유한 부동산과 맞먹을 정도로 자산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택부자 상위 10명은 1인당 평균 703채, 공시가격 605억원 규모의 주택을 가지고 있었고, 토지부자 10명의 토지는 1인당 214만㎡, 3,605억원 규모였다. 부동산 상위 1% 개인은 1인당 평균 32억원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하위 10% 계층의 1인당 평균 부동산보유액보다 640배 많은 금액이었다.

 

▲ 원주민이 외부 관광업자에게 땅과 집을 빼앗기고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투기장, 베니스 [사진=정기석]

 

현대판 ‘인클로저 운동’을 끝장내야

이 같은 자산 양극화는 소득 양극화로 이어지고 이게 다시 자산 양극화로 연결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그래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새로운 사회문제, 도시문제까지 등장했다. 도시의 부동산으로 ‘투기 수익’을 좇는 천민자본이 몰려들면서 자산과 소득 수준이 낮은 원주민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자산부자, 소득부자가 차지하면서 도심 공동화가 심화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 북촌과 서촌, 전주의 한옥마을이 대표적인 피해지역이다.

인류의 공유재, 공유지로 대접받아야 마땅할 토지가 이처럼 투기상품 사유물로 전락한 비극적인 역사는 16세기 영국 등 유럽의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에서 비롯된다. 당시에도 힘을 가진 특정 지배층에 의한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저항은 토지를 상실했거나 토지에서 추방된 농민의 반란으로 구체화되었다. 소극적인 저항은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층은 농업 이외의 노동을 거부하는 ‘유랑’의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지배층은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구빈법’으로 농민들을 응징했다. 1834년, 최저생계비 이하 노동자 생활수당제의 ‘스피넘랜드법’에서 무원조 원칙의 ‘신구빈법’으로 개악한 것이다. 땅도, 고향도 잃고 유랑하는 농민들은 잠재적 범죄자처럼 낙인을 찍고 교도소에 수감, 강제적으로 기계적 노동에 적응하도록 요구했다. 자연의 벗이자 땅의 주인이었던 농민은 비참한 임노동자,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땅을 잃은 인류의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54년 독일의 4대 녹색계획(Green Plan)을 보면 땅을, 자연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농촌의 자연, 문화 경관은 모든 국민이 즐길 권리다. 국도변, 아름다운 호숫가에는 상점도, 간판도 들어설 수 없다”면서 국민의 공유재인 자연과 농촌의 문화경관을 보존하며 다양한 동식물을 보호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제주도 가시리에 가면 공유지로서, 공동의 자산으로서 땅의 소중함을 체감할 수 있다. 2백만여 평의 마을 공동목장에 이른바 ‘주민참여형 풍력발전단지’를 세웠다. 목장의 소유주인 가시리 새마을회는 풍력발전단지를 운영하는 제주에너지공사로부터 연간 수억 원의 임대료를 받아 지역주민들과 주민복지 등 마을공동체사업을 위해 나눠 쓰고 있다. 골프장이나 리조트를 건설하려는 외부업자의 매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마을의 공동자산이 땅을 지켜낸 결과다.

수년 전, 태생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표본에서 지주, 건물주, 부동산 자산가 신세가 되었다. 무주 산골마을의 작은 누옥을 용케 점유, 소유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서는 원룸 방 한 칸의 보증금도 되지 않을 초저가상품이다. 그나마 절반은 은행에 저당을 잡혔고. 황토방과 마당과 작은 텃밭을 포함해 100여 평 정도인 이 작은 땅 덩어리 정도면 살아가기에 분에 넘친다. 그 소중하고 신비스러운 한 뼘의 땅 위에서, “왜 땅이, 집이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상품이 되어야 하는지” 깊이 걱정하고, 오래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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