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주년에 즈음하여

경상대 법학과 84학번 김종찬. 그가 지난 6월 18일 오후 10시 49분 삼천포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그에게 그날은 허영자 시인의 ‘어떤 날’보다 더 “아주 쓸쓸한 날”이어서 그가 벌판을 넘어 강변에서 머물지 못하고 기어이 생의 강을 건넌 것일 테다. 1984년 그는 대학내 진보적 독서토론서클 풀무회에 가입하여, 1985년 대학가을축제 풀무회 주관 학술토론에서 당시 시국에 대하여 주제발표를 하고 지체 없이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자기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풀무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실 열사정보에 의하면 향년 33세에 운명한 경상대 과학교육과 82학번 박문곤 노동열사가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훈련한 서클이기도 하다.)

그 뒤로 그는 유월항쟁 전후 시기까지 혹은 더 오랜 기간 동안 가좌동 자취방을 전전하며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도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먼저 후배들을 챙겼다. LP판으로 둘러싸인 그의 자취방은 몇 잔 소주에 섞여, 지친 벗들에게는 문화적 쉼터가, 실의에 빠진 후배들에게는 위로의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한 세대를 건너 뛴 그의 죽음은 외로웠겠으며 부고조차 이빨 빠진 새가 물어 나른 부실한 씨앗처럼 공중에서 흩어졌다. 심지어 나도 아슬아슬하게 접한 것이었으니까.

▲ 진홍근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

속설에 큰 축일과 겹치면 생일이나 기일을 잘 못 챙겨 먹는다고 했던가. 2019년 6월 그의 장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 머릿속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수선했지만, 오히려 바로 그 이유로 그의 기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우연과 필연의 변증이로구나!” 젊은 날 그가 우연과 필연에 대해 물었을 때 필연은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우연을 통해 나타난다고 답한 사람이 나였는데, 말이 씨가 되어 세대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눈물겨운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by-case)로 전개된 것이다.

김종찬이 생을 마감한 6월 18일이 32년 전 1987년에는 어떤 날이었을까? 무엇보다 그 전날 그러니까 6월 17일 이른바 남해고속도로 점거 및 가스차 탈취 사건 다음날이었다. 유월항쟁 20주년에 즈음하여 배포한 ‘유월민주항쟁 略史’(진홍근)는 이렇게 썼다. “11:00 민주광장에 집결하기로 했으나 학교당국이 조기방학을 선포하여 학생들이 교내에 거의 없다. 시내에서 가두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일부에서 반대하여 50여명의 핵심역량만으로 ‘연행학생 석방’ ‘독재타도’를 외치며 격렬하게 교문투쟁을 전개하다.”

또한 1987년 6월 18일은 6월 11일 결성된 「최루탄 희생자 대책위원회」가 ‘최루탄 추방의 날’을 선포한 거국적인 투쟁의 날이었다. 특히 명동성당 농성이 6월 15일 종료됨으로써 시위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날이다. 80년 광주가 왜 당했는지 어떻게 얼마만큼 당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조기방학이라는 악조건에 전날의 투쟁 후유증까지 더해 피로가 겹쌓였으나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날 진주교대생 400여명이 오전 8시 30분쯤 교내에 모여 「호헌철폐」,「학내언론자유보장」등을 주장하며 교내시위를 벌린 것은 적지 않게 위로가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주교대는 85년 이후로 밑으로부터 공을 지속적으로 들였었다. 진주교대가 당시 얼마나 보수적이었나 하면 외부인은 학교 정문을 함부로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에 내가 밑으로부터 조직을 확대 강화하는데 문진헌(고대 불문학 81학번, 현 내일신문 편집국장) 선배의 지도가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조직한 교대 학습서클을 내게 연결해주었던 것이다. 기약 없이 늙어가는 마당에 아직도 얼굴마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제는 중견 교사가 되었을 그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소위 6‧17 남해고속도로 점거 및 가스차 탈취 사건 다음 날 전국이 소강상태로 접어 든 가운데 부산에서 최대 규모로 시위가 일어난 것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다. 80년 광주처럼은 안 되겠구나,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김종찬의 장례에서 경남도민일보 김주완을 만났다. 유월항쟁 사기꾼이라고 농을 섞어 그를 놀렸지만 그가 20주년을 즈음해서 지역언론 관련 국가보조금을 받아 유월항쟁을 기술한 것은 잘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그가 객관을 자처하면서 여기저기를 무작위로 취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상업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그로서는 6월 17일 밤 당시 총학생회와 특정 단과대회장과의 의견차는 일시적 부분적인 것이며, 당시 학보사 기자의 수첩 메모는 당시 학보사와 해당기자의 한계가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없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내가 경상대 민주광장에서 86년 10월 26일 반합법 투쟁위원회를 발족하고 87년 총학생회장 송삼수와 칠암동 그의 자취방에서 같이 살다시피하며, 83학번 철학과 모씨의 해방신학 관련 학보사 투고가 삭제된 것을 매개로 학내민주언론쟁취투쟁이 전개된데 이어, 그해 4.2 인문사회대학생회 출범식을 매개로 학보사 및 총장실 점거농성을 어떻게 시도했는지, 이 과정에서 최익호(경상대 농학과 83학번, 88년 총학생회장)라는 대중적 영웅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이를 통해 교문투쟁을 매개로 기동전을 훈련함과 동시에 농성전을 어떻게 체득했는지 그가 어떻게 알 것인가? 이와 같은 교내 민주화투쟁이 유월항쟁과 같은 범국민적 민주주의 정치투쟁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잡는다는 옛말이 있지만, 산 김주완은 모르지만 김종찬은 알고 죽었다. 87년 그 해 5월 18일 일요일 새벽 수정동 집에서 짭새들이 나를 잡아간 날, 나를 수사하던 모 간부 경찰이 학교가 아니라 진주경찰서로 출퇴근하는 당시 총학생회 간부를 목격하게 했다. 그런 엄혹한 시절에 우리는 시위를 넓은 지역에서 엄밀하게 조직해야 했다. 중간 거점들을 내어준 이름 없는 영웅들을 누가 알겠는가. 전교조 이민제 선생은 알아도 김주완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김주완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김종찬은 김종찬만이 아니었다. 87년 유월항쟁 당시 진주시청을 장악했을 때 그 앞 김밥집에서 시위 군중에게 앞장서서 마음껏 물과 음식을 나눠 준 분은 아직까지 그 근처로 옮겨 충무김밥집을 하고 계신다. 나는 이 분들을 총칭하여 민주주의의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 부른다. 2005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6‧15공동선언기념행사로 방북하여 분위기 돋운다고 불렀다가 홍역을 치룬 북한노래가 있다. 북측 6‧25전쟁 영웅을 기린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의 주제가가 그 노래다. 반공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 삼을 만하다. 다만 배경을 떼고 가사만 반추하면 우리의 민주주의 영웅들에게도 어울린다. 민주주의는 이렇다.

 

남모르는 들가에/ 남모르게 피는 꽃/ 그대는 아시는가/ 이름없는 꽃

거치른 들길 우에/ 그 향기 풍겨올 때/ 그대여 알아다오/ 이 내 마음을

고요한 별 밑엔/ 나를 찾지 마시라/ 꽃피는 내가에도/ 찾지 마시라

눈바람 몰아치는/ 저 언덕 우에서/ 그대여 찾아다오/ 이 내 모습을

밤하늘에 말없이/ 반짝이는 별 같이/ 가시는 걸음마다/ 비쳐주리라

머나먼 저 산 너머/ 노을이 피어올 때/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

 

- 종찬에게

네 가고 난 이튿날

해 뜨는 동쪽바다 한 틈

벌어지지 않았다고

슬퍼하지 말거라

 

네 가고 난 사흗날

저무는 서산에 흠 하나

잡히지 않았다고

후회하지도 말거라

 

삶이 그러한 것처럼

죽음도 오고가는 것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온 것은 가는 법이다

 

그래도 남는 하나는

엊그제 이 세상 어디쯤

네가 사는 비범함을

내 이리 쉽게 잊었을까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가지도 않을 것을

캄캄한 밤 늦은 정이

萬里 밖 등불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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