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포근하고 산과 들에 초록과 웃음소리 흘러넘치는 이 좋은 봄날이 보릿고개 마지막 세대인 우리의 어린 시절은 겨울나기보다 더 혹독한 계절이었다.

겨우내 씨고구마나 씨감자를 몰래 꺼내 구워먹다 들키면 농투성이는 굶어 죽어도 종자 베고 죽는다며 혼달림을 하시던 아버지가 씨나락 가마니를 풀어 됫박쌀을 찧고 어머니가 들이며 산을 헤집어 눈만 내민 것이라면 뜯고 캐 오신 풋것으로 멀건 풀떼기 죽이 밥상에 오르면 아이들도 배고픈 봄날의 시작임을 알았다.

뒷산으로 솔가리나 삭정이 하러간 남자애들은 칡뿌리를 캐고 송기를 벗겨 갉아 먹었다. 봄나물 뜯는 계집아이들은 삘기를 뽑고 찔레순을 꺾어 먹었다. 아이들이 해온 것들까지 모아 죽을 쑤고 쑥버무리로 허기를 달래고 송기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밀서리 해먹다 들켜 시커멓게 밀 검댕이 묻은 입술이 터지도록 맞고 들어온 아들에게 다시 부지깽이를 드는 어머니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든 하늘이었다.

“어르신, 아침 자셨습니꺼?”

“오냐, 니도 밥 묵었나?”

오죽하면 인사조차 끼니 안부를 물었다.

“할배~ 보리 베요!” 라고 우는 새소리를 들어 보셨는지, 새도 보리 베는 철을 기다리던 시절 우리들에게 밥은 하늘이었다.

▲ 사진 / 강호진

70년대 초등학교엔 무료 급식빵이 있었다. 할아버지 목침같이 생긴 빵이었는데 큰형이 학교에서 먹지 않고 책보에 싸서 납작해진 빵을 꺼내 놓으면 불에 구워 먹기도 하고 학교에서 먹고 올까봐 학교까지 가서 오후 내내 기다렸던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육성회비 밀렸다고 빵 배급을 받지 못한 몇몇은 저녁내 칭얼대다 쫒겨 나와 사립문 안쪽에 대고 악을 썼다.

“낼 학교 안가끼다이! 씨...”

그 무료 급식빵이 3학년 때부턴가 유료로 바뀌면서 기억에 확실히 남는 흉터가 생겼다.

몇몇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좀 더 맛있어진 빵을 돈을 내고 사먹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나마 검은 빵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다. 육성회비조차 제 때 내지 못해 무료 급식빵조차 제대로 못 먹은 터에 저녁 밥상머리 투정으로 밤새 부모님 잠자리를 뒤척이게 했다.

사는 집의 그 친구들이 정기 구독하던 <OO동무>나 <소년OO>같은 어린이 월간지는 구슬이나 딱지 몇 개 잃어주면 쉬 빌려볼 수 있었지만 빵 한 조각 얻어먹자고 내민 손이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만들었다.

먹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쳐다보는 친구들을 외면 못해 조각조각 나눠먹던 친구, 짐짓 모른 체 하지만 급히 넘겨 버리려다 목이 매여 캑캑거리던 친구...그들에게도 상처가 남았다.

어린이날이라고 선물 투정을 하는 아이에게 무슨 선물을 원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돈으로 주면 제가 필요한 것을 사겠단다.

놀이동산 가자는 녀석을 사람들에게 치인다는 핑계로 보다 덜 상품화 되어 있는 곳으로 역사 여행이랍시고 하루 종일 끌고 다녔더니 입이 서 발이나 나왔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가 필요하다면 뭐든지 들어 준다. 부족하다거나 아쉽다는 걸 모르고 자란다. 강한 ‘하지 마라.’나 ‘안 돼.’도 없다. 그럼에도 게임 좀 그만하라는 엄마 잔소리에 볼이 붓고 밤늦도록 연락도 없이 나돌아 다니느냐는 아버지의 꾸지람에 소리 나게 방문을 닫는다.

오냐 오냐 하다 보니 감정을 삭이고 곱씹어 생각하지를 않는다. 아이들 마음의 속살이 너무 보드랍다. 흉터가 남을 상처는 입으면 아니 될 일이지만 작은 생채기는 오히려 속 깊은 사람으로 자라게 해주지 않을까?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내 아이에게도 생길까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가 되어 버렸다.

도민, 시민을 진정 위해 소명을 갖고 일하는 목민관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에 눈 먼 한 정치꾼이 정치적 야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꺼내든 학교 급식 지원 중단이 돈을 내고 먹는 아이, 돈을 내지 않고 먹는 아이, 급식비 지원을 받는 부모, 안 받는 부모 모두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고 그 산하 정치꾼들은 치료는커녕 헤진 곳에 소금까지 뿌린다.

메르스, 사스야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고 사라지지만 저 정치꾼이 남긴 상처는 내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서도 흉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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