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망종(亡種) 홍 모를 징치(懲治)하고자 한다

***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했던 그 분은 ‘부드러운 진보’의 대명사이다. 오랜 세월 투명인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청소노동자들이 대열의 맨 앞에서 그 분을 통곡으로 맞을 때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 했다. 투쟁의 최전선에서 청춘을 보냈고 진정한 민주주의 구현에 일생을 바친 그 분은 이 시대의 전태일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잊힐 것이다. 그게 세간(世間)의 상정(常情)이다. 급기야 홍 모라는 덜떨어진 인간이 입에 담지 못 할 망언을 내뱉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기에 뒤늦게나마 졸문(拙文) 하나 급히 지어 천하의 망종(亡種) 홍 모를 징치(懲治)하고 그 분을 위로하고자 한다.

민중. 세상의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게 몸 하나뿐인 민중이다. 먹이사슬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개미처럼 일해 모든 것을 이뤄낸 주체이면서도 인정은커녕 민중은 오랜 세월 탄압만 받아왔다. 민중의 피를 빨아 그들은 천민자본주의의 거대한 성채(城砦)를 이루었고, 민중의 피를 빨아 그들은 지금 삭막한 도시에 번영의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있다. 그들만의 번영이자 그들만의 조명이다. 하지만 민중. 우리 모두인 민중이 있어서 역사는 수레바퀴를 굴려 조금씩 전진해 왔고, 모든 게 엉망인 이 땅이 민중이 있어서 그나마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있다.

시민사회. 정치적으로 자각한 민중이 시민사회를 잉태하고 최소한의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시민사회가 작동하면서 세상은 그나마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고 억울해서 죽어버리는 사람의 숫자도 조금은 감소했다. 그들은 인정하기 싫어하고 귀찮아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건강해지는 데 시민사회는 필수조건이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환경운동을 하고 낙선운동을 하고 자본을 감시한 결과로 그들은 번영을 누리고 체제를 유지해 왔다.

진보세력. 제3지대의 견제와 감시활동에는 그러나 민중적 시각에서 한계 또한 뚜렷하기에 진보세력이 나왔다. 지난 90년대부터 진보세력은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해 의회민주주의 테두리 안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개척해 왔다. 진보세력의 현실정치 참여 역시 한계는 있지만 지지율만 따져도 제1야당을 위협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 민중의 희망이 진보세력인 것은 확실하다.

▲ 박흥준

지난 한 주는 민중과 시민사회, 진보세력, 이 세 바퀴의 삼륜영구차(三輪靈柩車)가 그대의 주검을 실어 눈물의 영결(永訣)을 한 뜨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영결은 그냥 조금 오래 가는 이별일 뿐, 그대를 씨앗으로 이름만 다른 그대가 나이와 세대를 달리하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기에 그대와의 헤어짐이 결별(訣別)은 아니다. 아울러 그대를 추모하는 것이 그대와 함께하는 것이기에 추모가 계속되는 한 그대는 우리와 결별할 수조차 없다.

마지막 재산, ‘하나 남은 몸’을 마지막으로 던져 세상을 구하려 했으나 세상은 단순하지 않아서 그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남아 있는 우리의 어깨를 처지게 한다. 4천은 고사하고 4억 이상, 40억 이상을 꾸준히 받아먹은 놈들이 잠시 몸조심과 입조심을 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불로소득 수십억, 자본소득 수백억을 해마다 앉아서 빨아먹는 놈들은 그대의 죽음에 겉으로는 조의를 표하지만 이 순간 실은 어이없어 하고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그대이기에 그들이 그대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홍 모라는 어느 인간이 더러운 입을 놀려 입에 담지 못 할 망언을 한 번 더 내뱉은 지금, 그대 주검엔 더운 피가 한 번 더 좔좔 흐르고 있다. 죽지 못해 연명하고 있는 우리를, 더 나아가지 못 하고 망설이는 우리를 그대는 죽어서도 깨우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신들은 당당하게 계속 가라”고. 아니다.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앞장서서 가고 있다. 그대의 더운 피가 새 길을 열고 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늪을 메우며 한 발 한 발 앞서 가고 있다.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역사가 되었지만 그대는 지금도 우리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고 있다.

그대의 영혼이 구천(九泉)을 떠도는 것은 아직도 그대가 이 세상을 사랑해서이다. 아직도 걱정이 많아서이다. 그대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천도(薦度)에도 그대는 구천을 벗어나지 않으려 할 것이기에 그대는 남아 있는 우리를 걱정하지만 우리는 그대를 걱정한다. 세상의 피비린내를 그대의 피비린내로 씻어내고도 해야 할 무엇이 더 남아 있기에 그대 멈추지 않는가. 한평생 온 몸을 던져 앞장섰던 그대 아닌가. 이제는 그대 혼자 졌던 짐을 우리에게 내려놓아야 한다. 그 짐을 우리가 나누어 져야 한다. 그대는 쉬어야 한다.

성루(城壘)의 깃발이 저 멀리서 악착같이 펄럭이고 있다. 그대가 깃발을 힘겹게 휘두르고 있다. 죽어서 깃발이 되어버린 그대. 오천(五天)의 계단이 허물어져 파편이 되었는가. 그 파편이 그대를 먼지와 함께 뒤덮어 그대 여전히 힘겨워 하고 있는가. 역사는 진보하는가. 그렇다. 역사는 그대와 함께, 우리와 함께 진보한다.

수천 개의 만장(輓章)이 거리를 메우고 수만 명의 상주들이 삼륜영구차를 줄지어 따르더라도 그대의 행장(行狀)을 다 적기에는 모자란다. 피맺힌 통곡이 만가(挽歌)를 이루어도 그대의 삶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 어떤 눈물의 조시(弔詩)도 그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 한다. 이번에도 그대는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겠지만 그대는 이루었다. 우리를 깨우쳤기에 그대는 이루었다. 민중과 시민사회, 진보세력의 삼륜영구차에 실린 그대는 영원히 우리와 하나이다.

낡아서 헤질 대로 헤진 한 켤레 구두로 남은 그대. 오카리나의 청아한 선율로 남은 그대. 그대는 이제 쉬어야 한다. 남은 것은 남아 있는 우리의 몫이다.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역사를 이루기 위해. 그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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