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동심이라는 말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속살은 흉측하다"

눈이 내렸다. 내린 시간은 짧았다. 하늘은 시커멓고 땅은 하얬다. 눈은 얇았지만 자동차 바퀴는 두꺼웠다. 땅윗것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눈들은 납작 엎드렸다. 얼어붙었다. 미끄러웠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놓았다. 운전대 잡은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눈사람 만들기 따위는 사치다. 눈싸움도 딴 나라 이야기다. 눈은 희지만 마음은 어둡다. 눈은 예쁘지만 그 속살은 고통일 수 있다.

1989년 10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어디쯤이다. 새벽 보초를 나가는데 총은 관두고 빗자루를 들란다. 내무반에서 방한화 신고 문을 여는데 찬 기운이 훅 끼쳐온다. 방한화가 내무반 앞 쇠판에 붙었다. 짧은 긴장을 풀어준 건 눈이었다. 축구장 한 개 남짓한 연병장은 온통 하얬다. 동심의 나라로 갈 뻔했다. 그런 눈의 장관은 난생 처음이었다.

보초를 서야 하는 두 시간 동안 부대 앞 작전도로에 쌓인 눈을 치웠다. 기다란 흙길을 뒤덮은 흰 눈을 쓸고 위병소까지 돌아오니 다시 그만큼 쌓였다. 작전명 ‘제설작업’의 시작이었다. 더 많이 내린 날은 모든 병사들이 조를 짜서 부대 앞 도로 제설작업에 투입되었다. 연대장, 사단장들은 일부러 새벽 시간에 그 길을 지나가 본다. 지오피(GOP)로 통하는 길이라서 그렇다지만 굳이 그럴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측지반은 작업병이었다. 원래 임무는 적진지와 우리 진지의 좌표를 측정하는 일이다. 동경, 위도, 표고 같은 걸 직접 잰다. 거리를 재고 각도를 재고 높낮이를 잰다. 그것을 계산하여 지도 위에 점을 찍는다. 나는 계산병 주특기 하나넷넷(144)이었다. 측지병들은 훈련할 때엔 굉장히 중요하지만 평시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부대의 자질구레한 일은 모두 측지반이 처리한다. 측지반은 작업반이다.

기다란 연병장 담벼락을 측지반이 주도하여 쌓는다. 소양강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 온다. 602트럭이 수시로 위병소를 드나든다. 블록을 직접 찍어볼 것이라고는, 사회에서는 생각도 못했다. 내무반 뒤편 비탈진 야산의 잡목들도 측지반이 벤다. 오뉴월 벌과 싸우기 위해 방독면을 쓴다. 얼차려도 아니고 군기교육대도 아닌데도. “이건 군대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중간중간 사다리타기를 하여 피엑스 추렴을 하는 재미라도 없었더라면 어찌 견뎠을까.

가을이면 싸리작업에 나선다. 싸리나무는 군대에서 꼭 필요한 월동장비다. 제설작업을 위한 것이다. 싸리는 우리 부대 것뿐만 아니라 전방 부대의 것, 연대의 것, 사단의 것까지 준비한다. 상납이고 상부상조다. 싸리비 만들기는 중요한 군사작전이다. 넉가래도 만든다. 당까라는 것도 만든다. 넉가래는 알겠는데 당까는 군사비밀용어 같다. ‘들것’이라고 하면 될 것을. 아무튼 가을 내도록 싸리작업을 하는데, 부대 인근 야산에 있는 싸리는 초토화해 버린다. 그래도 모자란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싸리꽃의 아름다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싸리작업을 나가면 취사반에 미리 이야기하여 점심거리를 챙긴다. 쌀, 김치, 햄, 당면, 잼, 빵 같은 것을 창고에서 보이는 대로 싣는다. 측지반원 가운데 요리 솜씨가 조금이라도 있는 병사가 불을 피우고 국을 끓인다. 나머지 병들은 싸리를 벤다. 장교는 트럭 조수석에서 낮잠을 잔다. 어쩌다가 더덕 군락을 만나면 횡재를 외친다. 더덕구이는 일품이다. 그날 밤 내무반에서 피어나는 향기로운 그 무엇은 더덕의 비명이다. 그런 재미라도 있었으니 싸리작업이든 블록작업이든 제초작업이든 제설작업이든 꾸역꾸역 해낸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명언을 속 깊이 감추고서 측지반 노가다 전우들은 웃었다.

눈은 어쩌자고 주말에만 온다. 목, 금요일 신나게 퍼붓는다. 그러면 토, 일요일 이틀은 제설작업밖에 할 게 없다. 주말마다 오전 전반전, 오후 후반전으로 뛰는 고참 대 쫄따구 군대스리그(축구경기)보다야 낫긴 하다. 연병장은 넓다. 무릎까지 쌓인 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땅은 질퍽거리고 전투화는 젖어든다. 발가락은 시리고 손가락은 언다. 볼도 얼고 귀도 언다. 얇은 야상과 덜 얇은 깔깔이에 의지하여 눈을 치운다. 입김은 하얗고 막사 지붕 고드름은 투명하다. 땀에 겨워 우통을 벗는 이도 있지만 몇 초 내에 다시 입는다. 배는 어찌 그리 빨리 꺼지던지.

강원도 인제군 눈은 양력으로 10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 말까지 계속된다. 가을부터 겨울 동안 온전히 눈과 싸워야만 봄을 맞이할 수 있다. 실제 전쟁이 나면,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병사보다 눈 치우다 과로사하거나 동상 걸려 죽는 병사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눈은 가장 강력한 적군이다. 어떠한 작전도 여하한 전술도 통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적군이다. 순백의 적군이다. 측지반이 없었더라면 79포병대대는 그 옛날 눈속에 파묻혔을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부려본다.

진주에 눈이 내렸다. 2012년 12월쯤이다. 온 세상이 하얗다. 이른 아침 끼니를 해결한 뒤 길을 나섰다. 자동차 운전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못한다. 버스도 오지 않고 택시도 오지 않는다. 시청 공무원들이 밤새 눈을 치운다고는 하지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길 위로 용감하게 나설 운전자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어딘지 모를 전화를 해댄다. 간혹 시청에다 전화하여 욕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오 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눈을 제대로 대비할 지자체는 없다. 버스회사에 전화하여 욕을 할 것인가. 부질없는 짓이다. 빨리 회사에 전화하여 지각 신고를 하든지 아예 휴가를 내는 게 상책이다. 아니지, 회사에서 그 전화를 받아야 할 사람 또한 다른 동네 다른 버스 정류장 여러 사람 틈에 섞여 오지도 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 아닌가. 그날 나는 등산화 신고 걸어서 한 시간 삼십 분 만에 제일병원 앞까지 갔고, 거기서 용케 택시를 합승하여 지각하지 않고 출근했었다.

자기 집 앞 눈은 스스로 치우자는 전근대적 계몽을 펼치기도 한다. 소용없다. 폭설에 대비하여 곳곳에 모래를 쌓아 놓는다. 부질없다. 자기 집 앞이라고 한들 누가 일찍 일어나 눈을 치울 것이며, 큰길 가에 쌓아 놓은 모래를 삽으로 흩어 뿌릴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갈 길 바쁘고 할 일 많은 현대 사람에게 조선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도덕과 양심을 요구하는 건 애당초 글렀다. 법을 만들어 강제로 눈 치우기를 독려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벌써 10년 전인 2007년 강원도 홍천군은 ‘건축물관리자의 제설 및 제빙 책임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인도와 건축물 주변에 내린 눈은 건축물 소유자 또는 점유자가 치워야 한다. 눈이 그친 때로부터 낮에는 4시간 이내에, 밤에 내린 눈은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치워야 한다. 자기 집 앞 눈 치우느라 일터로도 못 나갈 사람도 생길 것이다. 아무튼 잘되고 있을 것이다. 워낙 눈이 잦은 지역이니까. 애매한 곳엔 공무원이나 군인이 동원되기도 할 것이다.

올 1월 9일 충북일보 보도를 보자. “새벽 사이 쌓인 눈이 얼어붙어 골목길은 빙판길을 방불케 했다. 주택가 대문 앞 곳곳에서는 주민들이 나와 눈을 치우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지만, 치우지 않고 방치하는 곳도 있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골목을 지나가는 주민들은 빙판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도 종종 목격됐다.” 이 지경이다. 다른 데도 비슷할 것이다.

눈은 동심이라는 말과 연결된다. 하양, 백설, 은세계, 서설, 춘설 이런 말과 연결된다. 하지만 눈의 속살은 흉측하다. 반짝이는 은빛 세계 밑에 감춰진 더러운 오물은 무엇이라고 불러줄까. 눈 그친 뒤 땅은 질퍽거린다. 눈 때문에 미끄러져 허리를 다치고 팔ㆍ다리가 부러지고 눈 때문에 미끄러져 큰 교통사고가 난다.

눈 치우다가 창자가 터지기도 한다. 넉가래를 힘껏 미는데 돌에 걸리면 넉가래 자루가 배꼽을 찌른다. 창자가 터지지 않고 배길 수 없다. 눈 때문에 비닐하우스가 폭삭 주저앉고 눈 때문에 계획했던 여행도 취소한다. 눈 때문에 일어나는 피해나 손해를 생각하자면, 눈은 동심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기조차 하다. 눈이라면 넌덜머리를 내는 사람도 많다.

겉으로 인상 좋은 사람이 속에는 뱀똬리를 품고 있을 수 있다. 입으로는 민주와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제 잇속만 챙기고 뒤꽁무니로 뒷돈을 받아 챙기는 데 선수일 수도 있다. 민주를 외치는 만큼 독재로 회귀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만큼 불의에 젖어드는 무리도 많다. 우리 세상은 맑고 깨끗하다고 말하는 자 가운데 입안에 구정물을 머금은 자가 있을 것이고, 이웃을 위하고 가난한 자를 보살핀다며 너스레를 뜨는 자 가운데 분명 가소로운 악덕 기업가가 섞여 있을 것이다. 민주와 정의, 맑고 깨끗한 세상,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 같은 건, 새하얀 눈처럼 곱고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온갖 쓰레기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포병부대 측지반처럼 우리 사회에도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는 사람이나 조직이 있을까. 평소에는 적진지와 우리 진지의 좌표를 측정하여 지도에 점을 찍어주다가 그 일이 끝나면 싸리도 베고 잡초도 베고 모래와 자갈도 퍼오고 블록도 찍어내고 제설작업도 도맡아 해주는 측지반처럼, 우리 사회에도 평소엔 자기 맡은 일을 하다가 자연재해나 큰불 같은 일이 터졌을 때 즉각 달려와 제 일처럼 처리해 주는 조직이나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쉽게 공무원이나 경찰, 소방관, 군인들을 찾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일이 하도 많은 세상이라서 괜히 공상해 본다. 그렇다고 향토예비군이나 민방위대를 들먹거릴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 사회의 측지반은 큰눈도 치워야 하지만 큰 도둑도 잡아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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