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는 늘 마시던 마티니를 주문한다. 고든스, 보드카, 키나 릴렛을 섞어 그 위에 얼음과 레몬 슬라이스 하나를 올린. 하지만 그는 다른 투명한 액체가 더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본드는 마티니 한 모금을 들이킨다. 다시 한 모금을 더 마셨을 때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집중력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심장도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그는 유리컵과 소금통 하나를 움켜쥔 채 화장실로 뛰어간다. 식은땀으로 수트는 이미 차갑게 젖고, 현기증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컵에 물을 받아 소금을 들이부어 마셨지만 헛구역질만 내뱉을 뿐, 그의 위장은 그가 마신 마티니를 다시 뱉어내지 못한다.

▲ 제임스 본드와 르 쉬프르

본드는 밖으로 비틀거리며 뛰어가 MI6 본부에 연락한다. 본드의 생체신호를 확인한 MI6 본부 의사 둘은 심실성 빈맥이라고 진단한다. 원인은 디곡신. 아주 극소량으로도 심실성 빈맥을 일으켜 심정지 및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심근수축력이 감소한 심부전 환자의 치료약이기도 하다. 본드에게 의사1은 심실 제세동기를 양쪽 가슴에 연결하여 빨간 버튼을 누르라고 소리친다. 의사2는 해독제 키트에 들어있는 파란색 펜주사기를 경정맥에 주사하라고 지시한다. 본드는 지체 없이 자신의 목에 주사기를 꽂고, 셔츠를 뜯어 양쪽 가슴에 제세동기의 패드를 붙이고 빨간색 버튼을 부서져라 누른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더욱 요동친다. 순간 선이 단자에 연결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 본드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30초쯤 지났을까, 본드의 이상한 행동에 뒤따라 나온 본드걸은 제세동기의 선을 연결하고 빨간색 버튼을 힘껏 누른다. 본드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하고, 그는 다시 포커판으로 돌아가 “올 인” 을 외친다.

디곡신은 하루 0.125~0.25 mg 의 상용량으로 심부전을 조절하는 약이다. 단 0.1 mg 만을 더 복용하더라도 치명적이다. 디곡신의 제형에는 정제, 캡슐제, 그리고 엘릭서제 세 종류가 있다. 이 중 디곡신의 엘릭서제가 마티니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엘릭서제는 감미 및 방향이 있는 에탄올을 함유하는 맑은 액상의 내용제이다. 에탄올을 함유하기에 마티니에 더 잘 섞여 들어갔을 테고, 감미와 방향은 마티니의 타 들어가는 맛 뒤에 숨었을 것이다. 두 의사가 말한 제세동기와 주사는 디곡신 중독 시 해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다. 파란색 펜주사기에는 리도케인 (lidocaine) 이 들어 있었다. 이 약은 심장의 과도한 수축을 저해하여 심실성 부정맥의 치료에 사용된다. 심실 제세동기는 심장에 직접적인 전기충격을 가하여 과도한 흥분상태를 정상 상태로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제 임상에서는 리도케인 투여가 심실 제세동기 사용에 우선한다. 이와 달리 영화 속에서는 본드걸이 파란색 펜주사기를 집어 들지 않았다. 본드의 가슴에 선을 연결해 버튼을 눌러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였다.

▲ 털 디기탈리스 (Digitalis lanata)

디곡신은 인위적으로 합성된 약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자연에서 발견된 성분이다.털디기탈리스 (Digitalis lanata) 는 현삼과에 속하는 식물로 그 잎에 디곡신을 함유하고 있다. 초여름 경부터 털디기탈리스는 도라지 꽃처럼 종모양의 하얀색 꽃을 피운다. 꽃말이 '열애' 또는 '나는 애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다. 꺼져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약이니 그 꽃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독살은 총, 칼 혹은 주먹이 오고 가는 격투신에 비해 그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육체적인 싸움은 주인공이 쉽사리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한다. 독살의 경우, 주인공이 긴장을 늦춘 상태에서 일어나 관객들의 애가 타게 만든다. 독약은 적의 성격에 따라 혹은 영화의 분위기에 따라 선택된다. 가령 잔인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내출혈을 일으키는 와파린 (warfarin) 을 쓸 것이고, 느와르적인 독살로는 호흡마비를 일으키는 페노바비탈 (phenobarbital) 이 있겠다. '007 카지노 로얄' 의 악당 르 쉬프르는 천식을 앓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눈물을 흘린다. 주기적인 천식발작으로 육체적인 싸움으로는 본드와 맞설 수 없었을 것이고, 피눈물을 흘리기에 다른 사람이 흘리는 피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르 쉬프르는 큰 수고 없이 본드를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마티니에 디곡신을 탄 것이다.

[참고] 1. Lippincott Illustrated Reviews: Pharmacology 6th edition.

      2. Pharmacotherapy: A Pathophysiologic Approach, 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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