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년을 담은 다큐멘터리 '바람의 세월' 문종택 감독
지난 2월 세월호 유가족들과 진주를 걸었던 그날처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하늘도 슬픈가 보다’라는 생각도 잠시, 얼마 전 산청작은영화관에서 본 영화를 떠올리며 인터뷰를 준비했다.
4월 29일 진주에서 <바람의 세월> 공동체 상영을 앞둔 오후 4시, 엠비씨네 카페에서 문종택 감독을 만났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방송 416TV를 운영하는
단원고 2학년 1반 17반 문지성 양 아빠 문종택입니다.
저를 지성이 아빠라고 불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바람의 세월>은 어떤 작품인가요?
다큐멘터리 <바람의 세월>은 2014년부터 촬영한 영상물로 만들어져 있고요. 세월호 미디어 활동가인 김환태 감독님과 제가 공동 연출로 제작한 10년의 기록이 담긴 다큐멘터리입니다.
단원고 학생들이 등교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신 이유가 있나요?
첫 장면에 우리 단원고 학생 두 명이 학교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이 되는데 연출된 부분입니다. 단원고 후배들의 모습을 담을까 고민했지만, 그 아이들한테 상처가 될까봐 다른 친구들을 섭외했습니다. 아이들 등교 모습은 우리 단원고 후배들이 정문을 올라가는 장면을 찍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날입니다.
그 장면은 제가 골랐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들의 본래의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원래 그렇게 웃고 살았던 엄마 아빠였을 텐데, 그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 웃음을 잃어버린 10년이 되어 다시 찾고 싶기도 하고, 저런 웃음이 또 언제 올 것인가 저한테는 슬프기도 하고, 저런 웃음을 빨리 찾았으면 싶기도 했습니다.
지성이가 어떤 딸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다들 질문하시는데 대답을 잘 안 합니다. (한참 후 그는 말했다) 자녀가 4녀 1남인데요. 우리 지성이는 딸 중에서는 막내입니다. 우리 늦둥이는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게끔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이 덕에 이렇게 잘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직접 내레이션을 하시잖아요. 목소리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영상 컷에 대한 설명은 제가 할 수밖에 없어서 전체적으로 풀어서 구성작가에게 드렸죠. 어아름 구성작가가 제가 드린 원고를 멋지게 써주신 거예요. 저는 열심히 읽었죠.
언제부터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나요?
저는 2014년 8월 8일부터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방송 416TV’ 개국일입니다. 그날 국회에서 단식하는 날이었습니다. 유민이 아빠 아시죠? 유민이 아빠가 오랜 세월 생사를 넘나드는 단식을 했는데, 같은 날 시작되었습니다.
영화 제목을 <바람의 세월>로 하신 이유는?
봄바람이 될 수도 있고요. 긴 세월의 여름바람 가을바람 시린 겨울바람도 되지만, 간절하게 바라는 우리들의 그런 간절함,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너무나 바라고 있다는 그런 바람에서 ‘바람의 세월’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상영하고 있지만 가는 곳마다 제목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번쩍번쩍 듭니다. 진주 같으면 ‘험지의 세월’ 광주 같으면 ‘혈육의 세월’ 이렇게 지역별로 다르게 부르고 싶습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위원회 때 예은이 아빠 유경근 씨가 절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예은이 아버님이 안 하셨으면 제가 했겠죠. 화면에는 안 잡혔지만, 뒤에 부모님들이 서 계셨는데 누군가는 했겠죠. 부모님들 마음이 다 그랬으니까요.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함께하셨던 분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나고, 언론들도 떠났습니다. 저 혼자 남아 카메라를 들었죠. 그래서 누구도 담지 못할 장면들이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왼쪽 팔을 주무르시는데, 카메라 때문에 아픈 건가요?
카메라보다는 컴퓨터를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영상을 찍고 그걸 수십 번도 넘게 보고 또 봅니다. 하루에 열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4시 16분이었다.
그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시간에 알람은 울려야 합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4시 16분에는 세월호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찌 4월 16일뿐이겠는가.
10년의 세월 3654일 한순간도 그날을 잊을 수 있었을까.
영화 제작 과정에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제가 찍은 영상 50테라를 7테라로 줄이는 과정이죠. 이건 저밖에 알 수 없는 거예요. 5천 개의 영상이 104분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제가 찍은 거라 이렇게 앞꼭지만 봐도 뒤에 생각이 떠오르니까 가능했습니다.
대략 3개월 동안 잠을 못 자고 안 먹었습니다. 지성이 아빠가 아니었으면 이 작업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진상규명 때문에 카메라를 잡고 있지만, 중요한 장면이 있으면 되돌려 보기를 수백 번 하기도 합니다.
가장 아끼는 장면이 있다면?
영화 초반에 해경들이 바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팽목항에 임의로 만들어 놓은 철판 다리가 있어요. 119대원들이 받침대에 아이들을 눕혀서 다리를 건너옵니다. 구급대원들이 걸어가면 저벅저벅 소리가 나거든요.
저는 팽목항에 갈 때마다 그 구름다리 밑에서 나오는 소리를 찍거든요. 쇠로 만든 구름다리 밑에서 소리가 납니다. 아이들 시신을 들고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와 전혀 다른 119구급대원들의 발소리도 들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 발견할 것 같네요.
그래서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면 좋겠습니다. 정말 한 장면 한 장면, 자막 하나하나에 정말 사력을 다했거든요.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혀 소리가 안 들립니다. 적어도 두세 번은 봐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영화가 아닙니다. 가슴으로 보고 심장을 열어야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지성이 아빠로서 감독으로서 10년의 기록을 담아낼 수 없어서 몇 장면에 제 감정을 실어놓은 게 있거든요. 그것을 못 찾아내면 <바람의 세월>을 보신 게 아닙니다.
문재인 정부 때 진상규명이 될 거로 생각했잖아요. 거기에 대해 소회가 있다면?
많은 분들이 세월호가 왜 정치화됐냐고 그러는데, 그런 분들은 이 영화 꼭 보셔야 합니다.
정치가 세월호를 올라탔고 정치가 영향이 없으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세월호를 내렸습니다. 우리가 정치화가 된 게 아니고 정치가 세월호를 올라타고 끌어들인 거죠. 언론이 거기에 한몫하고.
영화에서 동수 아버님이 얘기했듯 박근혜 정부라면 차라리 싸울 수라도 있었지, 문재인 정부는 희망고문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희망고문의 5년을 보냈습니다.
세월호 문제에 있어서 문재인 대통령은 반드시 사과해야 합니다. 제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사과받으러 갈 예정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정부 관계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가족들의 입회하에 그냥 오픈시켜버리면 사실은 끝납니다. 기무사가 가지고 있는 자료, 국정원이 가지고 있는 자료 말입니다.
특히 국방부 해군이 가지고 있던 기록들은 꼭 봐야 합니다. 누군가 무슨 군사 기밀까지 들여다보나 하는데, 그날 3개국 군사합동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기록이 있었다고 봅니다. 실제상황이 아니고 훈련이기 때문에 날씨나 바다의 환경 등이 잘 기록이 돼 있을 겁니다.
관객과 대화에서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을까요?
‘416TV’에서 10년 동안 방송한 것을 압축해서 만든 게 <바람의 세월>이거든요. 거꾸로 <바람의 세월>을 펼쳐버리면 10년의 세월을 다 볼 수 있는 겁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선생님 같은 분들 때문에 진상규명이 더디다”고 이야기합니다. 10년 동안 오로지 세월호만 방송한 ‘416TV’를 보시라고 얘기합니다.
또 “유가족분들 어떻게 지내시나요”라고 물어봅니다. ‘416TV’에 우리 엄마 아빠들 볼일 보는 거 말고 다 있습니다. 시장 보는 거, 화초 가꾸시고 힐링하는 거, 진상규명하는 거, 도보하는 거, 삭발하는 거, 악 쓰는 거, 술 마시는 거 등 없는 게 없죠. 주변에 연탄 봉사도 하고 쌀 나눔도 하고 저희보다 힘든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먼저 달려가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 영화는 사람들을 울리려고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제가 작정하고 우시게끔 만들었으면 10시간 내내 통곡하거나, 10시간 내내 분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극렬한 장면들은 다 걷어냈습니다. 대부분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을 내보내지만, <바람의 세월>은 단원고 앞 벚꽃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벚꽃이 흔들리는 소리에 우리 아이들이 있습니다.
또 세월호 창문에 비가 내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서 있는 위치는 아이들이 있던 객실입니다. 창문에 내리는 게 비일 수 있고, 핏물일 수 있고, 한맺힌 눈물의 응어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영화에서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있으면 들릴 거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조사 기구도 기간이 끝난 지 오래됐고요. 그렇다고 정부에서 해줄 일은 더 만무합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그걸 피해자가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죽으면 제가 하던 일을 누군가가 달려들어서 할 겁니다. 세상은 그래요. 우리가 말로 하는 것들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는 곳에 가면 ‘잊어주세요’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행동 없이 얻어진 게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제가 10년 노숙을 하면서 촬영한 ‘기록’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엄마 아빠들이 삭발하고, 안산에서 팽목까지 도보하고, 삼보일배하고, 밤새도록 촛불 들어서 그나마 얻어진 것들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고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이 기사를 많은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라고, 다음 세대의 누군가는 볼 거라고 했다. 지금 환경이 어렵고, 내 삶이 지치더라도 기록은 오래 살아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영상으로 10년의 세월을 기록했고, 그 기록의 힘이 <바람의 세월>을 있게 했다. 그가 영상에 담지 않았더라면, 중도에 포기했더라면 이 영화는 애초 없었을 거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참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을 울리려고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라고 했던 그의 말만 맴돌았다. 그의 인터뷰 사진을 보니 10년, 말로는 다 못 할 그 시간이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 영화를 볼 때 운다고 보지 못한 장면들이 두 번째 관람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왜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봐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는 떠났지만, 왜 죽었는지는 알아야 했기에
우린 더 바삐 움직였고, 그때마다 시민들이 함께했습니다.
<바람의 세월> 내레이션 중에서
그는 딸이 왜 떠났는지 알아야 했기에 10년의 세월 동안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아니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이기 전에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딸의 아빠이기에.
* [세월호 유가족 방송 416TV] www.youtube.com/@Remember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