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가 잊지 말아야 할 전문 예술인 ‘최순이’ 이야기
진주검무 이어온 진주 관기의 역사 '궁으로 간 최순이'
장미의 계절 5월이 되면 진주에서는 특별한 축제가 열린다.
일찍이 시인 변영로가 ‘양귀비꽃보다 붉은 마음’이라 노래했던 의기 논개를 기리는 논개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축제를 열고 즐기는 진주 사람들조차 논개제의 근원이 ‘의암별제’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설사 ‘의암별제’를 알더라도 전국에 유례가 없는 이 특별한 제사 의례를 되살리고 지켜온 사람들에 대해선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논개제를 1주일여 앞둔 지난 4월 25일, 진주문고 여서재에서는 논개제의 기원이 된 의암별제와 진주검무를 지키고 다듬은 한 여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상국립대 인문학연구소 양지선 학술연구교수(51)가 지난해 펴낸 <궁으로 간 최순이> 북콘서트이다.
저자 양지선 교수는 교방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술교수이면서 전통예술을 체득하고 있는 진주검무 이수자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양 교수는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예술인 최순이의 삶을 좇는 동안 그녀의 삶에 빙의 되는 듯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최순이는 공식 역사서에 단 네 줄 등장한다. 진주 관기 출신인 최순이가 13살에 선상기에 뽑혀 고종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다. 양 교수는 일제강점기 신문자료와 진주 교방문화를 정리한 고서들을 이 잡듯이 뒤져 예인 최순이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양 교수는 책에서 단순히 성(性)을 팔고 술을 따르는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기생에 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노력한다. 책은 조선시대 공무직 예술인으로 살았던 관기의 직업적 성취와 독립성을 강조하고, 자주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진주 예인 최순이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최순이는 70여 년 진주에서 살았던 실존인물
최순이는 1892년 7월 7일 봉곡동 351번지에서 태어나 1969년까지 진주에서 살다간 실존인물이다. 아버지는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관기여서 종모법(從母法)이라는 당시 신분질서에 따라 최순이도 관기가 되었다. 교방에 입학한 어린 관기들은 춤과 노래, 악기, 시서화를 7~8년 동안 배우고 익힌다. 그런데 최순이는 교육과정을 마치기도 전인 13살 나이에 선상기(지방 대표 관기)로 뽑혀 궁으로 들어간 뒤 곧 고종 앞에서 춤을 추게 된다.
역사서에는 1902년 마지막 연회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검기무에 출연한 여성 2명의 이름이 ‘계향’과 ‘녹주’였다고 적혀 있다. 양지선 교수는 연대순으로 추적해 ‘계향’이 최순이의 예명이라고 추론했다. 이후 고향 진주로 내려온 최순이는 ‘완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기생조합을 이끌고 후배들에게 진주검무를 전수하는 삶을 산다.
권리를 찾기 위해 ‘기생조합’을 이끈 최완자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한 제국주의 일본은 궁중음악을 전승하던 ‘장악원’을 해체하고 ‘이왕직 아악부’란 이름으로 격하시키고, 왕실이 관리하던 관기들을 내보낸다. 일제는 공무원 신분에 가깝던 교방을 해체하고, 자신들의 게이샤 문화를 본떠 ‘권번’을 만들어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한다.
당시 왕의 음식을 만들던 대령숙수 안순환은 발 빠르게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을 열어 춤추고 노래하던 궁궐 관기들을 채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최순이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 진주로 내려온다. 그녀는 진주에서 기생들의 자생조직 ‘모의당’에 들어가 기생들의 자주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기생조합을 만든다. 당연히 최순이는 진주권번의 가장 큰 춤 선생이 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완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궁중에서 익힌 검기무를 지역색에 맞게 발전시켜 오늘날의 ‘진주검무’를 만들고 후배들에게 가르친다.
일본 경찰의 비호 아래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던 권번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기생에 대한 대우는 야박했다. 최순이가 이끌던 기생조합은 이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다가 파업까지 벌인다. 기생조합이 내건 요구조건은 세 가지. 비 올 때 출근하지 않을 것, 권번의 수지 예산을 자세히 밝힐 것. 권번의 학생들에게 받는 월사금을 깎아줄 것 등이었다. 오늘날 노동조합이 사용자 측에 내세우는 요구조건과 비교할 만큼 진취적이고, 헌신적이라 평가할 만하다.
개천예술제 대축이 역할을 맡았던 최순이
최순이의 발자취는 영남예술제와 개천예술제 기록에도 남아 있다. 1948년 영남예술제를 연 진주 사람들은 전쟁 중이던 1952년에도 제3회 개천예술제를 개최한다. 최완자로 활동하던 최순이는 제9회 개천예술제에 출연하며 축문을 읽는 대축이 역할까지 했다.
제3회 개천예술제가 열리던 1952년, 개천예술재단은 전쟁을 피해 부산에 머물고 있던 국립국악원 단원들을 진주로 초청한다. 최순이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배들을 이끌고 국악원 단원들이 머물던 동명여관으로 찾아간다. 장구 장단으로만 가르친 후배들이 해금, 대금까지 갖춘 3현 6각 가락에 맞춰 춤추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진주를 찾은 국악단원 중에는 훗날 문화재 위원이 되는 김진흥이 있었다. 그리고 김천흥과 최순이가 대면한 이날의 인연은 훗날 진주검무가 대한민국 최초의 무형문화재로 등극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진주기생들의 검무춤을 본 김진흥은 매우 놀란다. 궁중 악사와 무동으로 활동한 시절 장악원에서 보았던 검기무를 제대로 구현한 춤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궁중의 검기무는 전국 각지 교방으로 전승돼 이어졌지만, 격동의 세월을 넘지 못하고 모두 명맥이 끊어졌다. 노래와 연주는 악보로 전승될 수 있지만, 춤은 오직 스승과 제자 사이 몸에서 몸으로만 전승될 수 있기에 한 번 끊어지면 복원이 불가능해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성계옥, 최순이의 꿈 의암별제 복원에 성공하다
진주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의암별제를 ‘이에미 별제’라고 불렀다. 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논개 사당을 중건한 뒤 제향을 올린 것이 시초였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한때 전국 300여 명의 기생이 모여 3일 동안 제례를 올리고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도 의암별제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광복과 전쟁을 겪는 와중에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1992년 진주검무 보유자이자 포구락무를 발굴한 운창 성계옥 선생은 사라진 의암별제 복원에 성공해 첫 봉행 행사를 연다. 이후 매년 같은 시기 봉행되다가 2002년부터는 논개제 행사와 함께 열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6년, 30대이던 성계옥 선생은 가야금을 배우고자 진주기생 모임 ‘모의당’에 갔는데 이때 ‘완자’로 불리던 고희의 최순이를 만난다. 최순이는 젊은 제자들 앞에서 “너거들 이에미 별제라고 들어봤나”라는 말로 시작해 의암별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최순이로부터 의암별제의 의미와 대단했던 역사를 전해 들은 성계옥은 이때부터 의암별제 복원을 꿈꾸게 된다.
‘진주검무’라는 꽃의 씨앗이 되다
1966년 문화재관리국은 중요무형문화재 발굴과 지정을 위해 진주를 방문한다. 이때 문화재위원 자격으로 온 사람은 김천흥, 박헌봉, 유기룡이었다.
1967년 최순이가 가르치던 8명의 제자 이윤례, 이음전, 최예분, 김자진, 강귀례, 김순녀(예명 김수악), 성계옥, 강순금은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스승 최순이는 문화재 명단에 없었다. 진주검무가 이 부분 최초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2년 뒤 최순이는 몇 명의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양지선 작가는 최순이의 최후를 기록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진주검무 문화재 지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모든 영광은 최순이가 가르친 제자들에게 돌아갔다. 최순이는 진주검무라는 아름다운 꽃의 최초 씨앗이었다”고 썼다.
성계옥 선생님에게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주검무’를 처음 배웠고, 정금순 선생님에게서 경남무형문화재 ‘진주포구락무’를 배우고 춤에 입문하게 되었다. 몸으로 익힌 춤에 학문적 지식을 더하고자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생과 한국의 교방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근대 영남 교방의 해체와 기생의 정체성 변화를 통한 여성의 문화예술적 위상」이라는 주제로 학술연구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경남 교방문화를 말하다>가 있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