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자 김영희 씨 민간인 학살 관련 강연,
“유해 발굴지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해야..”
마산 여양리, 진주 명석면 답사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집단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고슬라비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있었던 집단학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우리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고 불리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죠. 진주에서는 당시 2000~30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보도연맹원을 포함, 한국전쟁 기간 100만여 명의 민간인이 전국 각지에서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폐광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폐광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강연 후, 2004년 유해 163구 발굴한 여양리로

지난 25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을 둔 강연과 유해 발굴지 답사를 진행한 김영희 씨는 이 같이 설명하고, “여양리 민간인 학살지 등을 보존해,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두 시간 여의 강연을 진행한 뒤, 스무 명 남짓한 참석자들과 함께 2002년 태풍 루사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여양리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지(태풍에 유해가 밀려 나왔다)와, 진주지역 피학살자 유해 350여 점이 보관돼 있는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 유해 안치소를 둘러봤다. 김씨는 수년간 전국 유해 발굴지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해왔다.

강연이 끝난 오후 3시 진주시 평거동에서 출발한 이들은 오후 4시 무렵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 위치한 여양소류지에 도착했다. 소류지에서 50여 미터를 이동해 다시 10분여 간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2004년 발굴조사가 진행된 마산 여양리 민간인 피학살지가 나온다. 기자와 동행한 이들은 진전면 대정마을에서 3km가량 1차로의 좁은 길을 타고 소류지로 향하면서 깊은 골짜기에 학살지가 있는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했다. 이렇게 깊은 산골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 사진은 산의 초입부다. 올라갈수록 산은 가파르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 사진은 산의 초입부다. 올라갈수록 산은 가파르다

피학살지로 오르는 길은 가파랐다. 앞서 피학살 민간인 유해 발굴조사가 진행된 명석면이나 집현면보다 높은 고도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2004년 163구의 유해가 발견된 바 있다. 당시 발굴조사는 고 이상길 교수(경남대 사학과)팀이 진행했다. 유해가 발견된 곳은 모두 3개 지점 7개소이다. 구체적으로 △폐광지역(4개소)이다. △너덜겅 지역(2개소) △산태골 숯막지역(1개소)이다. 답사는 유해가 발굴된 3개 지점 모두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고 이상길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1950년 7월 21일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논문은 이날 낮 12시 민간인 180여명, 군인 40여명이 쓰리쿼터 1대와 트럭 4대를 타고 여양리 골짜기로 진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숯막 근처에서 군경이 민간을 하차시킨 후 이들을 3개 그룹으로 나눠, 폐광지역으로 70여명, 너덜겅 지역으로 60여명, 숯막 쪽으로 50여명을 이동시킨 후 별도 사살한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학살된 이들은 대체로 진주사람들이다.

답사에 참석한 이들은, 이날 3개 지점을 방문할 때마다 피학살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며 묵념했다. 준비해온 막걸리를 부어놓고, 희생자들의 안식을 바랐다. 작은 꽃도 놓아두었다.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답사에 참석한 아이의 다리에 쥐가 나거나, 산을 오르내리기를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답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멀리 수원과 부산에서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폭우가 내리는 와중이었던 터라, 답사가 끝난 뒤에는 모두 비에 젖어 있었다.

 

입구에서 유해 23구가 발굴됐던 폐광이다. 음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입구에서 유해 23구가 발굴됐던 폐광이다. 음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여양리 학살지, 폐광지역.. 유픔으로 신원확인한 곳

답사를 시작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폐광지역이었다. 2004년 23구의 유해가 나온 곳이다. 동굴 내부 바닥에 물이 고여, 습하고 눅눅한 환경이었던 까닭에 유골만이 아니라 피학살자의 피부나 살 일부, 머리카락도 발견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유품을 통해 피학살자의 신원이 처음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泰仁(태인)’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도장이 나오면서 신원확인은 가능했다. 김영희 씨는 고 이상길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유해의 주인이 ‘정태인’ 씨라는 점이 밝혀졌다고 했다.

이곳이 발견될 당시에는 “동굴 입구에 나무가 걸쳐져 있고, 돌과 흙을 덧대어 입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봉해져 있었다”는 게 김영희 씨의 설명이다. 고 이상길 교수는 「한국전쟁시기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상과 성격(2005)」이라는 논문에서 “경찰은 (학살 후) 주민들을 독려해 시신을 매장했다”며 동굴이 봉해지게 된 것은 “시신을 곱게 모시고 동물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한” 주민들의 행동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여양리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김영희 씨가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여양리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김영희 씨가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폐광을 중심으로 이 지점에는 4개소의 유해 발굴지가 있다. 폐광에서 23구, 3호 돌무지(상) 지역에서 15구, 3호 돌무지(하) 지역에서 27구, 4호 돌무지에서 5구 등 모두 7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또한 당시로서는 고가였을 것이라 보이는 은반지와 ‘ㄷㅗㄱㄹlㅂ korea', 'LIBERTY(자유)’, ‘W' 등의 글귀나 문양이 새겨진 허리띠 버클이 발견되기도 했다. 탄두나 탄피도 발견됐다. 김영희 씨는 “이곳에서는 그 시대의 지식층이나 좌익활동의 중심가들이 희생된 것 같다”고 유추했다.

 

너덜겅 지역, 유해를 묻었던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산세도 가파르다.
너덜겅 지역, 유해를 묻었던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산세도 가파르다.

바위 아래 유해가.. 너덜겅 지역

폐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 번째 유해 매장 지점인 너덜겅 지역이 있었다. 너덜겅 지역은 마치 돌산에 온 느낌이 들만큼 곳곳에 돌이 쌓여 있었다. 깍아지른 듯 가파른 곳이었다. 김영희 씨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해들은 큰 돌 아래에서 발견됐다”고 소개했다. 고 이상길 교수도 그의 논문에서 “(유해가 발견된) 돌무지 모두 경사면의 낮은 쪽에 큰 돌을 석축처럼 쌓았고, 시신을 이 위에 기댄 뒤 위쪽은 작은 돌로 시신을 덮어두었다”고 기록했다. 

너덜겅 지점은 2개소로 구성돼 있다. 1호 돌무지와 2호 돌무지이다. 각각 29구의 유해, 28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김영희 씨는 “보통 민간인 피학살지를 가면 흙 아래 유해가 묻혀 있는데, 이곳은 폐광이나 돌 아래에 시신이 묻혀 있다는 특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곳을 향후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며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극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답사에 앞서 유해지 곳곳에 발굴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직접 붙여놓은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해가 발견된 곳임을 알리는 안내판. 숯막 초입에 세워져 있다.
유해가 발견된 곳임을 알리는 안내판. 숯막 초입에 세워져 있다.

여양리 학살 알린 숯막 지역

거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답사팀이 들린 마지막 유해 발굴 지점은 숯막 지역이었다. 산을 내려와 100미터 가량 진입도로 방향으로 내려오면 또 다른 유해 발굴지인 숯막 지역이 나온다. 초여름인 터라 사람 허리 높이만큼 자란 수풀을 헤치고 50미터 가량 산 쪽으로 들어가니, 너른 공간이 나왔다. 길을 가로막는 수풀 때문에 숯막 지역까지는 진입하지 못했다. 다만 안내판을 통해 이곳이 유해 발굴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은색 빛깔을 띄는 안내판에는 ‘유골 다량발견 지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숯막지역은 2002년 태풍 루사 때 유골이 떠내려 와 흩어져 있던 곳이다. 여양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알린 곳인 셈이다. 이곳에는 과거 숯을 굽는 사람이 임시로 거처하던 움막이 있었는데, 움막 안의 구덩이에 시신을 넣고 흙을 덮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36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여양리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지에는 김영희 씨가 이처럼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해뒀다.
여양리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지에는 김영희 씨가 이처럼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해뒀다.

숯막지역의 특이점은 이곳에서 일부 생존자가 나왔다는 점이다. 김영희 씨는 “총을 맞은 뒤 생존한 사람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라고 했다. 고 이상길 교수는 논문에서 이반성면에 거주하던 이 씨가 총을 맞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증언이 있다고 밝혔다. 20대 초반의 박 씨도 총을 맞은 상태에서 저녁에 마을로 내려가 밥을 얻어먹고 본인의 신분을 밝히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주민 신고로 연행돼 다음날 사살됐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박 씨는 경찰지서 근처에 매장돼, 여양리 유해 발굴 당시 유해를 찾지 못했다.

 

여양리 폐광지역에서 이름이 적힌 도장과 함께 발견돼 신원이 확인된 정태인 씨의 유해.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 유해안치소에 보관돼 있다.
여양리 폐광지역에서 이름이 적힌 도장과 함께 발견돼 신원이 확인된 정태인 씨의 유해.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 유해안치소에 보관돼 있다.

350여구 유해 보관된 명석면 용산고개로

5시 30분쯤, 여양리 민간인 학살지 답사를 마친 이들은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에 위치한 유해 임시안치소를 찾았다. 이곳에는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를 비롯해, 진주시 명석면과 집현면 등에서 발굴된 유해 350여 점이 보관돼 있다. 그간 진주지역에서 발굴된 유해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여양리 피학살자 가운데 유품(도장)이 나와 신원이 확인된 정태인 씨의 유해 아래에는 작은 메모지를 남겨 누구의 유골인지를 알 수 있게 해뒀다. 그 외에도 유해가 담긴 통에는 유해가 어느 곳에서 발굴된 것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메모 등이 남아 있었다.

 

강연과 답사에 참석한 이들이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 유해안치소 앞에 모여 있다.
강연과 답사에 참석한 이들이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 유해안치소 앞에 모여 있다.

“저 뼈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이날 답사에 참석한 이들은 다양한 소회를 밝혔다. 유일한 초등학생 참석자였던 문채주 군(12)은 “사람을 죽이라고 시키는 사람이나, 시킨다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 모두 너무너무 나쁘다”는 후기를 전했다. 이날 강연과 답사를 주최·주관한 생활정치시민네트워크 백인식 대표는 “(한국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을 맞이해 우리 역사의 아픈 부분을 강연과 답사를 통해 접해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같은 단체의 정호윤 씨는 “비가 내려, 더 숙연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한편 답사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김영희 씨는 진주를 비롯한 전국 10여 곳의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지를 소개했다. 특히 1200여명의 유해가 나온 대전시 동구 산내면의 골령골, 아이의 유해가 다량 나온 충남 아산시 설화산 등의 발굴사례를 언급한 그는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유해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 이상길 교수가 생전에 남긴 말을 전했다. “저 뼈(유해)에 좌우 이념이 있을까 싶다. 뼈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단디뉴스

 

답사에 앞서 자연드림 평거점 2층에서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김영희 씨
답사에 앞서 자연드림 평거점 2층에서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김영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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