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추모제 열려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진주지역에서 지금껏 수습한 유골 수가 450구에 이르지만, 아직 진실을 규명한 사람(=피학살자로 인정받은 사람) 수는 수습한 유골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2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람은 모두 150명입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족들에게 더 엄밀하고 정확한 증거를 요구하며 진실규명을 미루고 있습니다. 유전자 감식을 통한 발굴 유골 신원확인 요구에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헌화하는 유족들
헌화하는 유족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우리 군경에 의해 피학살된 민간인들을 추모하는 합동추모제가 21일 오후 1시 진주 초전공원 인근에서 열렸다. 이날 정연조 유족회장은 진실규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진주지역에서 2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람은 150여명, 하지만 지금껏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됐다고 인정받은 이는 7명에 불과하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150여명이 피학살자로 인정받은 바 있다.

유족회에 따르면, 진주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국가 공권력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등 2000~3000여명이 학살됐다. 유족들은 연좌제라는 굴레에 묶여 온갖 굴욕과 멸시, 냉대와 차별을 감내하며 고통 속에 살아왔다. 그러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기본법이 제정돼 진실규명이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껏 150여명의 유족만이 진실규명을 받았다. 유족들 가운데 가족의 유해를 찾은 경우도 알려진 바 없다.

 

정연조 진주유족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정연조 진주유족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정연조 유족회장은 이점에 기초해 조속한 진실규명과 신원확인을 요구했다. 그는 “우리 지역에서 발굴하고 수습한 유골 수가 지금까지 450여구인데, 피학살자로 진실규명을 받은 사람은 모두 150여명에 불과하다”며 “수습한 유골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분들만이 진실규명을 받았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특히 2기 진실화해위가 짧으면 내년 5월 활동을 종료할 수 있다는 점에 기초해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조속한 진실규명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특히 민간인 피학살자 명단이 정부기관에 남아 있을 것이라며 이를 공개할 것과, 발굴 유해와 유족들의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유해의 연고자를 찾아 유골을 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날 “1980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민간인 신원 조회기록을 바탕으로 민간인 피학살자 명단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또 “유전자 감식으로 유해의 연고자를 찾아내 돌려주는 것은 사건의 책임이 있는 국가의 의무”라며 이 같이 말했다.

김증식 진주유족회 사무국장은 지역에 남은 발굴가능 유해매장지를 하루 빨리 발굴해야 한다고 했다. 2002년 유해 발굴을 시작한 이래, 12곳의 유해매장지에서 발굴을 완료했지만, 아직 발굴 가능한 곳이 1~2곳 남았다면서다. 그러면서 그는 “내년까지 발굴 작업을 완료해, 새로운 (유해)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간 진주지역에서 발굴된 330여구의 유해는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보관소에, 111구는 세종시에 보관돼 있는 점을 들어서다.

 

제례를 지내고 있는 유족들
제례를 지내고 있는 유족들

유족회는 이날 자료집을 통해 정부와 지자체에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들이 요구한 사항은 △더한 훼손이 있기 전에 유해를 완전히 발굴할 것 △유해 발굴 시 유전자 추출, 감식으로 유해를 연고자에게 인도할 것 △유해는 유족의 바람에 따라 안치, 안장할 것 △진실규명 후 소송 절차 없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할 것 △유사사건 재발 방지를 위해 국가가 저지른 불법 행위의 소멸시효 완성을 배제할 것 등이다.

진주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국가 공권력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등 2000~30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시작된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으로 지금껏 진주에서는 12곳의 유해매장지에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날 합동추모제가 열린 진주시 초전공원 내 추모탑은 2022년 진주시가 3억여 원의 예산을 들여 설립한 것이다. /단디뉴스

 

* 국민보도연맹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가 좌파 전향자를 중심으로 구성한 반공단체이다. 1948년 1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려던 이승만 정권의 목적으로 결성됐다.

1949년 보도연맹 가입자 수는 30만여 명에 달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로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많았다.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지역별 할당제 때문에 가입을 강요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한 군경의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전후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의심 때문이다. 군인, 경찰 등은 이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결처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희생된 이들의 수는 14만에서 30만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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