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 20여점과 틀니, 단추, 칫솔 등 유품도..
다른 곳에서 학살한 뒤 이곳에 묻힌 듯

명석면 관지리 산 174번지에서 발굴된 유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강도영 씨(76)
명석면 관지리 산 174번지에서 발굴된 유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강도영 씨(76)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아이고.. 아버지.. 흐흑”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피학살된 아버지를 둔 강도영 씨(76)는 4일 경남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산 174번지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억울하게 희생된 아버지와 지난 세월이 떠오른 이유였다. 관지리 산 174번지에서는 지난달 22일부터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추정되는 유해 발굴조사가 이어져, 이날까지 20여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강 씨는 이날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3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가 들은 바로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내동면 내평리에 거주했다. 지금은 남강댐이 들어서 수몰된 지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여느 날처럼 논을 매다가 면사무소에서 호출이 와 불려갔다. 하지만 그 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진주교도소로 보내졌다가 알 수 없는 곳에서 학살당했다는 소문을 시간이 흐른 뒤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날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할머니는 아버지가 사라진 뒤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다닌 곳마다 곳곳에 피투성이만 있었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한국전쟁 전후 우리 군경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차원의 공식사과가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이호형 동방문화재연구원장이 유족들에게 발굴된 유해, 유실물을 설명하고 있다.
이호형 동방문화재연구원장이 유족들에게 발굴된 유해, 유실물을 설명하고 있다.

4일 명석면사무소와 관지리 산 174번지 일대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조사 중간보고회가 열렸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달 22일부터 이곳 일대 225㎡를 대상으로 유해발굴 작업을 이어왔다. 발굴조사는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호형)이 맡았다. 이곳은 한국전쟁 전후 국민보도연맹원 50여 명이 피학살된 것으로 추정돼온 곳이다.

이곳에서는 그간 두개골 2점과 허벅지뼈 및 정강이뼈 80여점이 발굴됐다. 동방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발굴된 유해는 20여구 상당으로 추산된다. 유실물도 여럿 발견됐다. 10여개의 탄피와 2개의 탄두, 단추 10여점, 틀니, 칫솔, 동전 등이다. 이들이 발굴된 곳은 가로 5.1m, 세로 2.1~2.4m, 깊이 0~40cm에 불과하다. 비교적 얕은 구덩이 속에 묻혀있던 유해는 73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된 유해의 주인들은 인근이나 다른 곳에서 학살된 뒤 이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이호형 동방문화재연구원장은 “허벅지뼈와 정강이뼈가 2~3중으로 중첩돼 출토됐고, 완전한 형체의 유해도 없다”며 “다른 곳에서 학살된 시신을 모아 매장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학살이 있었던 곳은 “완전한 형체의 유해나, 세워진 뼈가 나오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면서다.

지난해 41구의 유해가 드러난 집현면 봉강리 피학살지에서는 완전한 형체의 유해가 여럿 나온 바 있다. 완전한 형체의 유해란 한 사람의 뼈가 온전히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 원장은 “발굴지에서 탄피가 10여개 발견되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을 이곳에서 확인사살했거나 희생자들의 옷가지 등에 탄피가 딸려온 것 같다. 현장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면 탄피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20여구의 유해가 발견된 만큼, 학살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면 보다 많은 탄피가 발굴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명석면 관지리 산 174번지에서 발견된 유해 20여점과 유품들
명석면 관지리 산 174번지에서 발견된 유해 20여점과 유품들

유해 매장 유형은 두가지로 나타났다. 매장 당시 지표층이었던 구덩이 안에서 발굴된 유해가 있는가 하면, 이후 형성된 복토층에서 발굴된 유해도 있었던 것. 이 원장은 “복토층에서 발굴된 유해는 발굴지 상부에 있는 무덤을 조성하는 과정이나 자연적 현상에 따라 아래쪽으로 쏠려 내려온 것 같다”고 했다. 발굴지에서는 다른 색깔의 퇴적층 두 곳에서 각기 유해가 발견됐다.

정연조 유족회장은 이날 “또 한 번 매장 추정지에서 유해가 나와 감개무량하다”면서도 “진주에는 발굴가능한 매장 추정지가 아직 한 곳 정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도 서둘러 발굴작업이 진행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진실화해위나 자치단체에 "남은 발굴조사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고도 덧붙였다.

한편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 등은 감식작업을 거쳐 명석면 용산고개 임시안장시설(컨테이너)에 보관될 예정이다. 이곳에는 그간 진주에서 발굴된 유해 400여점이 임시보관돼 있다. /단디뉴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
현장에서 발견된 단추
현장에서 발견된 단추
현장에서 발견된 틀니
현장에서 발견된 틀니

* 국민보도연맹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가 좌파 전향자를 중심으로 구성한 반공단체이다. 1948년 1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려던 이승만 정권의 목적으로 결성됐다.

1949년 보도연맹 가입자 수는 30만여 명에 달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로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많았다.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지역별 할당제 때문에 가입을 강요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한  군경의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전후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의심 때문이다. 군인, 경찰 등은 이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결처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희생된 이들의 수는 14만에서 30만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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