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주도, 부지 225㎡ 대상
보도연맹원 50여명 피학살지 추정
4월 10일까지 발굴작업 예정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 전후 우리 군경에 의해 피학살된 민간인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발굴 대상지는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산174번지 일원(=닭족골)이다. 발굴면적은 225㎡ 안팎이며, 4월 10일 전후까지 발굴작업은 이어질 예정이다. 이곳에서는 1950년 7월경 국민보도연맹원 50여명이 피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이곳에서는 두 차례 유해가 확인된 바 있지만,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수습에 이르지는 못했다. 2011년 8월 경남대가 진행한 탐사조사에서 유해가 확인된 바 있고, 2013년에는 진주유족회 유족들이 시굴조사를 진행해 유해를 확인한 후 다시 묻었다. 진실화해위는 이에 따라 이곳을 유해발굴가능지로 분류해 지난해부터 발굴작업을 준비해왔다.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시삽하는 관계자들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시삽하는 관계자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함에 따라, 22일 명석면 사무소에서 개토제가 열렸다. 진주유족회를 중심으로, 진실화해위 관계자, 발굴조사를 진행할 (재)동방문화재연구원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유족들은 이날 “유골이나마 후손들에게 돌아오길 바란다”며 “후손으로서 뼈 조각 하나라도 찾아 정성껏 모시는 게 도리 아니겠냐”고 말했다.

명석면 관지리 닭족골 일원은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된 민간인 유해 매장지로 추정돼왔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학살 당시 명석면 관지리에 버스 3대가 들어와 2대는 화령골(2021년 5월 유해 25구 발굴)로 향했고, 1대는 삭평마을 부근에 멈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삭평마을 인근에서 내린 4~50명은 닭족골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유족 박모 씨는 당시 관지리 골짜기 대로에 버스가 서더니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 올라갔고, 1시간여 뒤 총소리가 났다고 증언했다. 그는 과거 이곳에서 삼종질 박모 씨와 사촌 자형 이모 씨 등의 시신을 찾기도 했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형무소 재소자도 있을 수 있다.

 

관지리 산 174번지 일원, 유해 매장 추정지 /사진=진실화해위
관지리 산 174번지 일원, 유해 매장 추정지 /사진=진실화해위

유해 발굴작업을 맡은 이호형 (재)동방문화재연구원장은 이날 “대략 230㎡에 해당하는 면적을 조사하는 것으로 계획안이 마련됐지만, 유해 발굴 작업 과정에서 가능한 최대한 넓은 면적을 조사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큰 비가 없으면 유해 일부가 떠내려갔을 수도 있”는 점을 고려해서다. 그는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분을 발굴하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정연조 진주유족회장은 개토제를 마친 뒤 발굴 현장을 방문해 “저는 유복자로, 아버지 없이 살았다. 여기만 오면 괴롭다. 아버지가 관지리에서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이곳에 계시는 지, 아니면 발굴이 불가능한 지역에 계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며 “후손으로서 뼈 조각 하나라도 찾아 정성껏 모시는 게 자식된 도리이다.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해자 없이, 국가의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살아왔다. 연좌제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며 “이제는 가해자가 사과하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사과를) 포용해야 할 때이다. 이념 전쟁은 그만두고, 국민들이 화합해야 할 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국가 차원의 정식 사과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남 진주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1700~2300명의 민간인이 우리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국민보도연맹원과 진주형무소 재소자가 대상이었다. /단디뉴스

 

22일 오후 2시 명석면 사무소에서 개토제가 열렸다.
22일 오후 2시 명석면 사무소에서 개토제가 열렸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좌파 전향자로 구성됐던 반공단체 조직이다. 1948년 1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사상을 국가가 통제하려던 이승만 정권의 목적으로 결성됐다.

 

1949년 보도연맹 가입자 수는 30만여 명에 달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많았다.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지역별 할당제 때문에 가입을 강요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한 군경의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전후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의심 때문이다. 군인, 경찰 등은 이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결처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