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자세히 오래 보아야 대상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어떤 시인이 말하더니, 그것이 사람이나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요즘 지역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쨍한 햇살입니다. 육지에서는 흔하디흔한 가을 아침의 안개도 자주 보기 어렵습니다. 이 강한 햇살을 받고 자란 농산물들이 그 어디보다 맛나고 탐스럽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으니 참 뒤늦은 깨달음이지요. 게다가 사람들도 이 강한 햇살의 기운을 받아서 씩씩하고 힘이 넘칩니다.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는 추운 겨울 아침에도 물옷을 입고서, 바다에 들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파래를 건져 올리는 사람들을 보자면 어떤 숙연함이랄지 숭고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겨울에도 매섭게 춥지가 않으니 월동농사가 적격입니다. 지금도 푸른 들판 곳곳에서 시금치를 캐고 마늘 논에 풀을 매느라 납작 엎드리고서 일하는 농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덜 춥다 하더라도 겨울이면 우리의 신체가 순환이 잘 안 되고 경직되어서 근골격 질환이 생기기 쉽고 다치기도 쉽습니다. 게다가 땅에서 1미터 이하로 자라는 농작물을 키우고 수확해야 하는 노지 농사의 특성상 앉거나 몸을 숙여서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더한 어려움이 많겠지요.

2020년 조사에 의하면 비농민에 비해 농민들의 근골격 질환 발생 비율이 2.4배가 높고, 농민의 86.4%가 근골격 질환이 있다고 합니다. 같은 농민이라도 지면에 가까운 작물을 키우는 노지 농사가 농민들의 허리나 무릎에 더 많은 부담을 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우리의 입맛을 한창 되살려 주는 딸기 하우스에 일하러 오는 외국인노동자들도, 앉아서 토경재배한 딸기를 따는 것을 회피한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전자동 시설인 스마트팜으로 전환하자는 얘기도 아니요, 토경재배 대신 서서 작업하는 수경재배를 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더 많은 시설이 투입되는 농사는 더 많은 탄소배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람되게도 근골격에 의존하는 농업이 지구를 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농업인 특수 건강검진이 필요하다고들 말하는데, 올해 여성농업인 특수검진비 예산 20억원이 그대로 동결되었고, 대신 11개 시·군 9,000명이 혜택을 볼 수 있었던 사업이 20개 시·군으로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작년 초에는 예산을 없앤다 어쩐다 하여 여성농업계가 입장문을 내고 기자회견을 하며 완강하게 주장한 끝에 존속된 예산인데, 그래서 올해는 확대되려나 어쩌나 기대를 했건만, 동결이랍니다. 여성농민 뿐만 아니라 전체 농민으로 확산해야 하는데 아쉽기만 합니다. 없애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까요?

농업인 특수 건강검진 예산이 증액되지 않은 것은, 농정당국의 2023년 주요계획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올해는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기업경영방식의 도입 및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농식품부가 밝혔습니다. 이 정책 방향 아래에서는 농민의, 아니 여성농민의 특수질환을 보장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는 것도, 기후위기의 어려움을 같이 모색하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가장 우려하던 현실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패한 농업정책으로 노령화된 농촌에 후계인력을 세워내지 못하면서, 영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농업에 진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말입니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농업의 정의에 관한 우리의 수많은 고민과 주장은 허공의 메아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안개가 농업의 앞날에 자욱합니다.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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