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추송웅이라는 배우가 죽었을 때 나는 고작 20대 초반을 넘고 있었다. 그의 명 연기로 유명했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사실 그때 나는 연극을 볼 만한 사정도 여유도 없는 험한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선생 노릇을 새롭게 시작했던 어느 때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의 원작이 카프카가 쓴 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 우리는 죽자 사자 '변신[Die Verwandlung]'이라는 제목만 기억하는 교육을 받았고, 그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거의 무용한 것이었다. 단지 벌레로 변한 샐러리맨과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줄거리 외에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 많은 외국의 소설을 내용은 아예 읽어 보지도 않고, 소설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대표작의 제목만을 그저 외우는 교육을 받았다. 소설의 내용은 대부분 우리가 보는 시험과 무관했고, 또 우리는 그 제도에 잘도 적응했다. 나는 그렇게 선생이 되었고 또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2016년 사천 시내 모 고등학교 교사 시절, (학교 규모가 작아 전 학년 수업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사회 선생이면서 ‘카프카’의 ‘변신’을 다 읽어 오라고 이야기했다.(사실 책은 단편이다.)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카프카’의 자아정체성과 사람들과의 관계와 가족과 문화와 제도를 이야기해보자고 아이들에게 요청했다. 교과서 진도가 뭐 대수랴!(그런데 당시 교과서의 내용과 얼추 비슷했다.)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2학년 학생들의 세계사 시간에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 오게 했다. 아마도 반 아이들 중 10명 정도만 읽었지만 책을 읽을 그 아이들은, 책 제목만 달달 외운 나보다는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3학년(사실 당시 그 학교는 수능보다는 수시로 대학에 가기 때문에 도시 인문계 아이들과는 좀 사정이 다르다.) 아이들에게 바로 이 책,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報告)’라는 책을 읽어 오게 했다.

스스로 받아 온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진보시켜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 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몸부림을 쳐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기억이 없다. 다만 2016년 봄, 나는 아이들과 함께 단순 암기로 성장해 온 나의 벽을 깨기 위해 온 마음으로 아이들과 격렬한 수업을 했던 기억만 있다.

그리고 2022년 오늘 오후,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중에 유선 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는 2016년 당시 그 학교에서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이제 군 제대 후에 복학을 준비 중이라면서 한참 동안 서로 안부를 묻고 친구들 안부를 전했다. 담임을 한 아이들도 아니어서 기억이 잘 나질 않았지만 모두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니 기분이 흐뭇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말했다. 지난 12월 군 제대 후에 여러 가지 책을 읽다가 집안에서 책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책은 바로 고 3 때 선생님께서 읽으라고 하셔서 산 책, 즉 카프카 전집이었단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나를 생각하고 당시의 치열했던 수업(질문과 공방이 가득했던)이 생각났단다. 그래서 물어 물어 전화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인생의 새로운 면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조금은 건방진(?) 이야기까지 했다.

교육은 바로 이렇게 천천히 아주 슬며시 다가오는 것이다. 그 어떤 거창한 교육적 패러다임으로도 사람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수업을 고민하는 교사와 그 교사의 진심 어린 수업은 아이들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6년, 내가 읽으라고 이야기한 그 책을 당시는 읽지도 않았는데 6년이 지난 이제 다시 읽고 당시 내 수업을 기억하는 것을 지금 유행하는 어떤 교육이론으로 설명할 것인가?

오후 내내 뭔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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