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과 종업식을 마친 학교는 적막하다. 지난해 봄, 아이들이 없는 학교에 대한 그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선생님들도 방학을 해서 계시지 않으니 학교는 그야말로 무중력 세상처럼 느껴진다.

점심을 먹어야 되는데 아침부터 은근히 걱정이 된다. 워낙 외진 곳이기도 하거니와 이 코로나 상황에서 제대로 문을 연 음식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이름 있는 배달 업체도 여기까지는 손이 미치지 않으니 개별 도시락 생각도 잠시 했다. 다행히 동네 중국음식점에서 주인장이 배달해 주셔서 오늘 점심은 해결이 되었다.

방학을 했으니 여러 가지 업무를 잠시 미뤄두고 혼자 앉아 2021년 한 해를 하나씩 돌아본다. 내가 위치하고 있는 이 작은 중학교에서부터 대한민국까지. 주제넘은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뭐 어떤가? 나의 그릇에서 나의 그릇으로 끝날 일인데.

 

1. 전염병

전염병 탓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된 것은 맞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우리 삶을 다르게 만들고 있는 것도 맞다. 거기다가 온갖 이상한 조어(造語)들이 판을 치는 것도 맞다. 쉬운 말을 지나치게 어렵게 한다. 영어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필요한 언어일 뿐인데 그것이 말하는 사람의 신분과 학식을 나타내는 도구로 전락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 가진 일상의 철학이 부족한 탓이다.(언택트, 뉴 노멀, 팬데믹 등등)

얼마 있지 않아 전염병도 끝날 것이다, 틀림없이! 하지만 이 이상한 용어들은 꽤 오래 우리 주위를 맴돌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새롭게 바뀌어버린 우리의 일상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만큼 흔들림 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언젠가 코로나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전염병이 다시 유행하겠지만.

 

2. 교사와 교장, 그리고 고위 공무원들

비난 가능성이라는 말이 있고 기대 가능성이라는 말이 있다. 전자는 부정적인 입장에서 출발하고(뒷말이 중요하다. 즉, ~이 낮다 또는 ~이 높다.) 후자는 긍정적인 의지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역시 뒷말이 중요하다.) 하지만 단어 자체는 부정과 긍정의 뜻으로 볼 수 없는 가치 중립적인 말이다.

30년 이상을 교사로서 살아 온 내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난 가능성은 높고, 기대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내 삶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인데……

그런데 교장으로 살아온 2년은 어떨까를 생각해보니 지난 30년 치의 두려움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다. 환란에 가까운 2020년과 2021년, 두 해 동안 학교 현장에서 나의 무지와 정확하지 못한 태도 탓에 미봉책으로 넘어간 일이 얼마나 많을까? 또 나의 작은 판단 착오와 작은 말실수가 미쳤을 파급효과를 생각해보니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는 듯하다.

하물며 시골 작은 학교 교장의 책임이 이러할 진데 이 나라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은 얼마나 큰가? 그런데 여전히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아무렇게나 이야기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 공복(公僕: 사적인 이익을 누르고 공적인 번잡한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 있다.)이라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인데…… 안타깝다. 이 또한 철학의 부재다.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3. 전망

2022년은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까? 코로나도 어느 정도는 평정이 될 것이니 코로나 이전의 일상은 어렵다 하더라도 코로나가 없는 새로운 일상이 유지될 것인데 전망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수 만개도 넘지만 제일 큰 이유는 과도한 사적인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장악했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자본의 확산 범위와 속도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즉, 전염병의 대유행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헐거워진 가치관의 틈새에 파고든 자본은, 온갖 욕망의 자가 증식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철학의 부재를 넘어 공백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4. 철학이 있는 삶

철학이 있는 삶이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좌표 확인이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는지, 나의 속도는 적당한가? 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철학이 있는 삶의 기본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철학자의 이야기에 기대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 위대한 철학자의 삶은 우리 개인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라는 것을 무시한다. 물론 위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와 세대를 통섭하기는 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가 내 삶에 적용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동기로 하되 결국 자신의 모습을 탐구하고 고민하는 것이 철학하는 자세다.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몇 마디 위안의 잠언이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자. 결국 우리는 철저하게 혼자이며, 스스로 내 삶을 개척해야 한다. 그 바탕에 철학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