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슴

특정한 조직 내에서 매우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다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꺼리는 일이나 일의 마지막 부분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폄하의 느낌이 살짝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다.

조선 초부터 있어온 제도이기는 하지만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 타파(노비가 사라졌다)가 되면서 농촌경제의 실질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로서 정상적인 임금 노동자의 우리식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이 단어는 대단히 정치적인 수사로 변화했다. 툭하면 머슴이라고 자칭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현대에는 고용주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람을 우리는 노동자라 부른다. 노동자와 머슴은 얼마만큼 다른가?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현재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노동시간은 노동문제의 핵심이다. 하지만 머슴은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머슴의 노동시간은 주인, 즉 고용주의 전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근대적 노동자들이 가지는 권리 중 일부(노동시간)는 제한되어 있었지만 신분적 예속(즉 노비)과는 완전히 다른 고용 형태의 하나로 보인다.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2. 학교와 머슴

2021년 대한민국 학교에는 직제가 있다. 즉 학교는 직무와 직위가 있는 조직이다. 학교는 매우 특이하지만 Vertical differentiation(수직적 분화)Horizontal differentiation (수평적 분화)가 혼재되어 있다. 이를테면 위계질서(교장, 교감)를 가지면서 동시에 전문가 그룹(교사)들이 동시에 작동되는 특이한 조직이 현재의 대한민국 학교다.

2021년 이러한 학교 조직에서 머슴은 실제적인 역할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수사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먼저 머슴은 고용주가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해 노동을 하여 그로부터 임금을 얻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문제는 교사 집단의 고용주는 누구인가? 현재 공사립을 막론하고 교사 집단의 실질적 고용주(임금 지급 기관)는 국가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행위를 통해 국가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 그러니 우리는 머슴인가? 그런데 머슴인지는 모호하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법에 따라 노동을 제공한다. 반드시 법률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당 노동 행위의 문제가 생긴다.

머슴은 법과 제도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다분히 인정에 따라(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머슴이 아니다.

결국 학교 안에서 우리는 머슴이 될 수 없다. 이유는 자명하다. 학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철저하게 법률 속에 있고 그 법률에 근거하여 처리된다. 그것이 직제가 있는 이유다. 각각의 직무가 있고 그 범위 내의 일을 처리한다. 물론 범위를 넘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범위를 넘을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다. , 타인의 권리행사를 방해하거나 타인의 의무와 충돌되어서는 곤란하다.

최근 스스로 학교의 머슴을 자처하시는 글을 보았다.

나는 그분이 학교의 머슴을 자처한다는 말씀에는 쉽게 동의하거나 수긍하지 못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좁게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미묘하지만 타인의 권리행사 방해와 의무 충돌이 있을 수 있고, 넓게는 대한민국 학교 조직의 특성상 수직적 분화와 수평적 분화가 여전히 혼재된 상황에서 수직적으로 상위에 존재하는 당사자가 하위에 존재하는 타인에게 본인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피해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률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지는 신성한 노동자이다.

어쩌면 그분의 말씀은 정치판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정치적 수사의 인용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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