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리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12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필자가 현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필자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2014224일부터 2021731일까지 12차례 다녀왔다. 그 중에서 진주지역에서는 5차례(200453일부터 2021520일까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다. 여양리, 문산 다음으로 명석면에서는 3차례 발굴이 진행되었다. 경남대 박물관 발굴팀은 마산 여양리, 산청 외공리, 문산 상문리, 경산 코발트 광산 4곳 지역을 조사 발굴하였다. 그 중 산청, 문산, 경산 발굴지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하여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양리 발굴은 경남대 고 이상길 교수가 자신의 개인 연구비로 발굴을 착수하였다. 그는 4곳 지역을 거의 8여 년간 자신의 영혼까지 바쳐 발굴 활동을 하였다. 여양리는 비록 필자가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유해와 유품으로 유족을 찾을 수 있었던 사연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하여 감히 몇 자 옮기고자 한다.

 

마산 진전면 여양리(산태골) 발굴착수의 과정을 찾아서(2002.9.4.~2004.5.3.)

필자는 4회 원고를 끝내고 진주시 대곡리에 위치한 고고학 연구원인 삼강문화재연구원뜰 앞에 이 교수묘비를 참배하고 영전에 원고를 바쳤다. 며칠 후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당시 여양리 발굴에 참석한 〇〇〇연구원이었다. 이 교수를 잊지 않고 계신 분이 또 있구나! 싶어서 보낸 감사의 편지였다. 그 인연으로 여양리 발굴 과정과 그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사진1 《삼강문화재연구원》 뜰앞에 고 이상길 교수님 묘비 앞에서 ‘行雲流水,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200294일 태풍 루사로 인해 여양리(산태골) 숯막에 매장되어 있던 유해 일부가 유출되었다. 유출과정은 처음에는 너덜겅 돌무지가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흔들려서 이동하면서 토사와 함께 유해가 몇 백미터로 휩쓸려 도로 길 바로 위 고추밭으로 밀려 내려왔다. 놀란 밭 주인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묵묵히 유해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이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이곳이 학살지라는 것을! 마산시와 대책위원회가 합의하여 인부를 동원하고 가매장을 준비하여 흩어진 유해를 박스에 넣어서 아무렇게나 옮겨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 교수는 언론 보도를 보고 대책위원장 조현기와 접촉하여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교수는 유해를 수습하는 데에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미 착수한 산태골 숯막 수습작업은 일단 완료된 상태였고, 폐광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인부를 동원하여 무질서한 작업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인부를 철수시킨 후 현장 일체와 수습한 유해 전부를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인수하기로 하였다. 향후 수습작업에 소요되는 비용 일체를 박물관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합의하여 경남대 발굴단은 200453일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한다.

경남대학교 발굴팀(이 교수와 경남대 사학과 동아라 고인돌과 발굴을 이해한 희망자 18명으로 구성됨)은 자발적으로 이 작업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합법적인 절차 없이 학살되어 정상적인 매장도 되지 못하고 40여 년간 역사 속에서 숨죽여 묻혀있다가 태풍의 비바람에 쓸려 내려와 팔다리가 흩어지고, 머리와 다리가 분리된 유해를 또다시 집단 매장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개체 수를 정확히 확인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한 조각 단편의 참혹한 역사의 산물로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유해를 수습하여 가능한 백골이나마 유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지와 바램이 담겨 있었다.

 

사진2 유족분들과 여양리 학살지를 찾아서. 무성한 풀숲만 우리를 반기네. (앞줄 이증식, 뒷분 이상길) 숯막 발굴지이다.

마산 진전면 여양리 발굴 장소와 내용을 찾아서

필자가 여양리를 다녀온 것은 발굴 후 17년이 지난 후였다. 다행히도 발굴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제 200454일로 시계를 돌려서 여양리 발굴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이어볼까 한다. 경남대 발굴팀은 여양리 학살지 위치를 확인한 후 발굴을 진행한 곳은 3개의 지점 7개소이다. 산태골 숯막 주변(1개소), 너덜겅 주변(2개소-돌무지), 폐광 주변(4개소-동굴, 돌무지3)의 지점이다.(1) 그는 생존자의 증언과 발굴장에 부역으로 동원된 증언을 종합한 결과, 진주방향에서 트럭 4(40~50명 탑승), 쓰리쿼터 1(20명 내외 탑승 지휘차량?)가 골짜기로 실어온 인원은 180~200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리고 2개월간 발굴한 유해는 163. 유품은 허리띠 33, 단추, 비닐팩, 동전, 고무줄, 반지, 안경, 솓가락, 열쇠, 젓가락, 도장(태인), 양복상의, 구두칼, 종이, 탄피(M1) 27, 탄두 6, 칼빈 2이 발굴되었다.(2)

 

사진3 너덜겅 주변 돌무지 무덤 발굴지 현재 모습

특히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의 형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그것은 지형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너덜겅에서 발굴된 유해는 돌무지 무덤으로 수분과 공기가 잘 통하여 유해들의 형태와 모습이 아주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품 중 버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아주 고급스럽고 귀한 버클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유품에서 읽을 수 있듯이 이곳의 학살자들은 보도연맹원으로서 상당수가 지식층으로서 학식과 재력을 갖추었던 분들이라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진주지역은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한 사람이 3천여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편이다. 필자가 전국으로 다니면서 발굴을 하고 있지만, 링반지 정도는 가끔씩 발굴되었지만, 이번 발굴처럼 은으로 된 무늬의 두꺼운 반지는 본 적이 없다. 상당히 세련되고 귀한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트모양의 반지도 흔한 반지가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끔 끼고 다닐 정도의 수준이다.

 

사진4 돌무지2호 무덤에서 노출된 유해 상태. 두개골과 팔뼈, 다리뼈 등이 양호하다.

유품 중에서 태인(도장) 아저씨 유족을 찾아서

페광 안쪽 물속에서 발굴된 유해 한 구가 머리카락부터 두개골, 어깨뼈, 갈비뼈, , 다리, 등 인체 형태가 정확하게 개체 수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였다. 그 유해가 입고 있었던 양복 상의와 상의 속 주머니에서 도장’(泰仁), 젓가락, 구두칼이 나왔으며 양복 안쪽에는 大松이라 새겨져 있었다. 이 아저씨는 태인이라는 피학살자이다. 폐광 속에는 입구가 꽉 막혀있었고 물이 고여있었기에 유해가 물에 잠겨있었다. 태인 아저씨의 자세는 엎드린 모습으로 물속에 있었기에 부패가 덜 되었다고 한다. 키는 165cm 정도였으며 하의는 부패되어 없어지고 상의 양복만 남아 있었는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사진16 폐광 입구 발굴지 (태인 아저씨가 발견된 곳) 현재 모습
사진17 폐광 속에서 발굴된 ‘태인’아저씨 상의 왼쪽 가슴에 총을 맞은 흔적임.
사진18 태인 아저씨 양복 속에 적힌 ‘大松’
사진20 태인 아저씨 양복 내에서 출토된 구두칼, 젓가락, 도장

 

상의 양복 내에 적힌 大松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진주 중앙시장 근처에 있었던 양복점으로 추정이 된다. 상의 양복으로 확인된 바 여양리에서 학살된 자는 진주지역 보도연맹원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상의 왼쪽 주머니에는 젓가락이 들어있었고, 오른쪽 주머니에는 구두칼과 도장이 들어있었다. 이 교수는 태인 아저씨의 DNA 검사를 하여 DNA 검사 결과를 가지고 태인 아저씨 유족을 찾는데 동분서주하였다. 수소문 끝에 태인이란 같은 이름이 세 명 나왔는데 두 명은 DNA 확인 결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나머지 한 명인 태인 아저씨 여동생과 통화를 하고 집행위원장(조현기), 구자환 감독과 함께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약속 전에 이 교수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이후 여동생(유족)과 연락은 두절되었다. 필자가 전국으로 유해발굴을 다니고 있지만, 유해와 유품의 형태가 양호하고 DNA가 일치한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도장은 유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진21 고 이상길 교수님이 ‘태인’ 유족을 찾는 전단지.《경남대 박물관에서 제공한 자료》

드디어 찾았다 태인 아저씨유족(남동생)!!

필자는 이 교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싶고 만나고 싶어했던 태인아저씨(미혼 당시 25) 유족과 우여곡절 끝에 통화연결이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70여년 넘게 세월이 흘러서 유족에게는 응고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세월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것이 무척 죄스럽고 황송했다. 태인 아저씨의 동생 정〇〇(80) 할아버지였다. ‘형님 정태인은 당시 미혼이었으며 아주 미남이었다고 한다. 거주지는 나동(내동)에서 양조장을 운영하였고 32녀 중 장남이었다. 상당히 부유하게 살았으며 어릴 때(다섯 살)부터 천자문을 습득할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한다.

태인 아저씨의 외삼촌분들이 일본 유학도 다녀올 정도로 훌륭하고 똑똑하여 외가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진주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학교운동장에서 한복을 입고 관중들 앞에서 연설도 하고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경찰은 태인 아저씨를 잡기 위해 집에 와서 잠복까지 하면서 가족들에게 고통과 수모를 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그동안 좌익활동을 면제해준다는 통보를 받고 지서로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잡혀가서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형이 학살된 후 양조장을 하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진양호 수몰지역 철거공사로 인하여 부산으로 이사하였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태인 아저씨 남동생께 유해와 유품을 찾아갈 생각은 없으시냐고 묻자. 오랜 세월이 흘렸고 유품을 보면 그 당시 엮어진 형제의 영혼이 생각날까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결국 태인 아저씨는 유족을 찾은 유일한 피학살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국 태인 아저씨는 진주 용산면 컨테이너 속에서 영혼을 달래줄 안식처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다.

 

여양리 발굴은 한국전쟁 민간인 유해 발굴의 최초의 발굴지이다

발굴을 전국적으로 다녀보지만 유해와 유품이 뒤엉켜 정확한 유전자 검사를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대부분이다. 그냥 무작위로 DNA를 검사하여 찾고자 하는 유족의 DNA와 일치하는가 확인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비극의 실태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여 어두운 역사도 후세에게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같이 유족을 찾아서 유해와 유품을 생생히 확인하고 역사적 연구자료와 증거가 현재·미래 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이 교수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양리 발굴 후 유해의 처리문제는 심각했다. 발굴지역은 마산이지만 유해는 진주분들이라 마산시에서 합동묘지를 마련해 주었지만, 이 교수와 진주유족회는 합동묘지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진주유족회측에서도 유해를 안치할 여력이 없었다. 한편 경남대학교측에서도 유해가 학교 교내로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학교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다니지 않은 곳을 선택하여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유해를 안치하였다. 매일 연구원을 시켜 온도 조절을 하여 유해의 상태를 점검하고 철저한 관리를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유해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있는 것은 이 교수님의 헌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온 산에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지만, 우리가 모르고 지나친 골짜기에는 피비린내와 살이 썩어 검붉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곧이어 그 계곡에는 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겨울이 오겠지요! 가해자여! 저 가슴속 밑바닥에 단 한 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한국전쟁민간인학살의 진실과 화해에 귀 기울여 주길 기대한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1차부터 12차까지 계속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1)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보고서, 2004104. 경남대학교박물관

(2)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보고서, 2004104. 경남대학교박물관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