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명석면 명석고개 1차(2014년) 발굴지 현장.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초록빛 산하로 덮여있다.
사진1) 명석면 명석고개 1차(2014년) 발굴지 현장.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초록빛 산하로 덮여있다.
사진2) 명석면 명석고개 1차(2014) 발굴지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솟대의 흔적. 지금은 온데간데 없다.
사진2) 명석면 명석고개 1차(2014) 발굴지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솟대의 흔적. 지금은 온데간데 없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진주지역에서 명석면 명석 고개는 학살자(718)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발굴 후 발굴장을 진주의 아픈 역사로 간직하기 위해 시민단체나 유족회는 교육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진주시가 미온적이고 원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발굴현장 보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발굴 현장을 지키는 이정표만 초연하게 홀로 서 있다.

 

이승만 정부는 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확대시켰나

19505.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은 불가능했다. 무기명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했지만, 이승만 지지 세력은 30%를 넘지 못했다. 그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하자, 개성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인사들이 인민군 환영에 앞장선 것이 알려진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가장 먼저 “6.27일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은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 지시를 직접 한다.”(1) 우선으로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정치범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학살은 주로 CIC(특무부대)가 지휘했으며 학살 현장에는 각 군 헌병대와 경찰, 형무관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은 크게 세 가지 범죄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보안법, 국민보도연맹, 부역혐의 등으로 죄목을 적용시켜 학살을 자행했다. 증언록을 통해서도 희생자 열일곱 명 중 보도연맹으로 열다섯 명, 부역혐의로 한 명, 국가보안법으로 한 명이 희생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앞 회에서 기술한 국민보도연맹 외에 이번 회에서는 부역혐의, 국가보안법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재판 없는 처형과 부역혐의(附逆嫌疑)

부역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국가나 공공단체公共團體가 대가 없이 백성에게 의무적으로 시키는 노역勞役이 부역賦役이다. 그러나 민간인 희생자 중 부역혐의附逆嫌疑는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이다. 부역附逆 죄목으로 잡혀간 사람들이 전체 민간인 희생자(100만 명) 55만 명에 이른다. 최초의 부역혐의 학살사건은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점령지였던 통영과 경남지역에서 국군 수복 직후인 820일부터 부역혐의로 받은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부역민이나 그의 가족들을 연행하여 조사하고, 구타를 비롯한 갖은 고문이 자행되었고, 이를 견디지 못해 사망하는 주민들도 나타났다. 부역의 정도에 따라 A, B, C 등 세 등급으로 나눠졌지만 결국 대부분 학살당하고 만다.

1950916일 인천상륙작전 후 928일 수도에 복귀한 정부는 101일 군··경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부역자 처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부역혐의자에 대한 재판없는 처형이 자행된 것이다. 수복하던 국군에 의한 부역자 학살이 몇 초의 고민도 없이 이루어진 반면, 경찰의 부역자 처리는 하루에서 일주일 정도의 조사 형식을 거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군의 처벌이 훨씬 잔인했던 것이다.

 

증언록에서 부역혐의로 희생된 김〇〇 유족의 인터뷰

○○ 유족의 아버지 김○○(당시 36)는 어머니 강○○씨와 1950년 진양군 사봉면 부계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사봉지서로 출두하라는 전갈을 사봉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 편으로 받았다. 김씨는 사봉지서에서 진주경찰서로 갔고, 이후 진주형무소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행방불명이 되었다. 당시 유족은 10살 초등학교 2학년이라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으로 돈 벌러 가서 오사카 기와공장에서 일을 했으며, 유족도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족은 해방이 되어 조부모가 계시는 산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살면서 빨치산(인민군)에게 보리쌀 두 되를 준 것이 산청경찰서에 사찰계에 부역죄로 1년 징역 집행유예 3년 받았다. 1년간 징역을 살다 나왔는데 전과기록이 진주형무소로 넘어가 보도연맹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리고 유족분이 도청에 근무할 때 도경찰국에 들어가서 동기가 보안과장할 때 보도연맹명부를 찾았다. 그러나 복사가 안 된다고 하여, 기록을 지하 창고에 가서 자필로 적어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기록에는 ○○ 아들 김○○, 진주 사봉면 부계리 1443번지, ‘죄목 보리쌀 두 되제동부락, 영구보존, 비밀서류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학살장소는 마산 여양리로 추정한다.

사진3) 마산시 여양리 발굴 현장. 고 이상길 교수가 유해와 유품을 유족에게 무릎까지 구부리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3) 마산시 여양리 발굴 현장. 고 이상길 교수가 유해와 유품을 유족에게 무릎까지 구부리고 설명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두 해 전만 해도 남과 북은 해방의 기쁨을 함께했던 하나의 나라였다. 하지만 분단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어제까지 같은 민족을 오늘의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엄청난 사회규범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단독정부 수립직후인 1948121일 형법보다 먼저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이 법은 북한을 외부의 적으로 규정했으며, 이것은 곧 이후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를 동족 증오에 두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이란 어떤 법인가

애초에 치안유지법은 일본 내의 공산주의자 처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해방 전까지 거의 모든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처벌했다. 해방 후 전쟁 발발 전 미군정은 1심만으로 판결하는 민간인 처벌법을 만들었다. ‘미군 포고령 제2국방경비법(해안경비법)’이 그것인데 제헌헌법 위반이며 법치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법률이다. 미군정 포고령 제2호는 194810.19 여순사건 이후 세계적 여론으로 거의 적용하지 않았다. 국방경비법은 군인 대상의 법인데 이것으로 민간인을 처벌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1949년에 기존의 3심제인 국가보안법을 1심으로 개악해 국회에 통과시킨다. 하지만 정치적 부담으로 시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 상황이 악화되자 공격의 방향을 내부로 돌린 이승만 정부는 이 법으로 1949년 한 해에만 118,621명이나 되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범죄자로 만들었다. 전쟁 발발 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가장 빠른 조치로 그동안 정리했던 블랙리스트에 따라 체계적으로 내부의 적을 학살하고, 사형시킬 수 있게 된다.

 

증언록에서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한 분에 대해서는 유족께서 기사를 원하지 않아 부득이 자세한 기술은 할 수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입니다.) 〇〇〇독립운동가는 광주고등보통학교 1학년 때 1929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한다. 그리고 전공분야는 독일 헤겔 철학이었고, 전남노농협의회, 독서회, 사회운동연구, 불교비판, 노동자동맹파업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여순사건이 발발하자마자 국가보안법(당시 치안유지법)으로 잡혀가 김천형무소에서 수감되던 중 진주형무소로 이감되어 7월 중순 경 명석면 명석고개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장남)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세 번이나 신청했으나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리하여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정부가 외면하니 시민 명의로 서훈패를 증정하였다.” 저는 서훈패 증정하는 날 광주에 다녀왔다. 유족은 서훈 신청을 포기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서 서훈패를 증정 받으시면서 용기를 내어 국가보훈처에 다시 서훈 신청을 제기할 것을 다짐하였다.

사진4)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서 서훈패를 증정함.
사진4)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서 서훈패를 증정함.

해방 후 좌익이면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정부는 2005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54명을 독립유공자로 결정한 바 있다. 여운형, 권오설, 조동호, 구연흠, 김재봉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말에 사망했거나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런 결정은 웃지 못할 결과를 낳았다. “경성트로이카(2) 활동을 한 이재유는 독립유공자로 결정되고, 이관술은 되지 못했어요사회주의자 이재유는 19441026일 청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 해방 전에 사망해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것이다. 반면 이관술은 해방 후 좌익활동의 중심에 섰다.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을 맡은 그는 19467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3)으로 구속되었다가 19507월 초 대전 산내에서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해방 후까지 살아남아 좌익활동을 한 것이 이관술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한 이유이다.

독립운동가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변절해, 정신대나 징병·징용을 강권하는 역할을 했다면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또 해방 후 반인권 행위나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독립유공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어긋나는 것이다. 현재 남북 관계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맞게 평화의 길로 가고 있다.

국가보훈처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독립운동가들을 정권의 색깔과 냉전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형태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해방 후 활동에 색안경을 쓰고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4) 이번에 우리는 과거 40여 년 동안 일자무식의 빨갱이로 홍범도 장군을 낙인찍어 역사의 미아로 전락시켜왔는데,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유해 봉환식과 해방 후 현직 대통령 내외가 최초로 참석한 역사적 현장을 보지 않았는가!

끝으로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이들이 적의 편으로 돌아설 것이 두려워 예방적 차원에서 학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군의 공세로 낙동강 한 귀퉁이로 밀려가 공황 상태에 빠진 이승만 정부는 평소 이들에 대한 불신과 잠재적 위험성이 있다 하여 아무런 저항 의지도, 능력도 없는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국가를 누가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승만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사건에 대해 역사적 책임은 물론 실질적 책임이 있다.(5) 아울러 한 증언자께서 언급하였지만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고자 한다면 학살자 명단을 공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실과 화해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1) 심규상,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민간인 처형 집행했던 헌병대 간 부 최초 증언, <오마이뉴스>, 2007. 7. 4

(2) 1933년 일제강점기 때 경성에서 조직된 이현상, 이재유, 김삼룡 등을 주축으로 한 사 회주의 단체이다.(노동운동, 학생운동을 조직함)  

(3) 19465월 서울에서 일어난 위폐 범죄 적발 사건으로, 정치적인 파장이 커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 세력과 미군정의 정면 충돌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4) 박만순, 골령골의 기억 전쟁, 고두미, 2020, 35~37,

(5)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304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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