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리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12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진주지역에서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 24곳 중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3), 명석면 용산리(3), 상문리(2) 등 모두 8곳은 발굴되었다. 현재 미 발굴지는 16곳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발굴한 지역 중 최초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가 발굴된 곳이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이다.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가 어떤 과정으로 현재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417-2에 안치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경과

 

 

사진1 경남대학교 고 이상길 교수(앞줄 왼쪽 두 번째)와 고고학연구팀, 사학과 동아리‘고인돌’, 대학원생, 18명의 여양리 발굴단 용사들
사진1 경남대학교 고 이상길 교수(앞줄 왼쪽 두 번째)와 고고학연구팀, 사학과 동아리‘고인돌’, 대학원생, 18명의 여양리 발굴단 용사들

경남대 발굴단에 의해 태풍 루사로 50년 은폐의 뚜껑이 열리다

20029월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여양리에 매장되어 있던 유골 일부가 드러났다, 이때 주민의 신고로 마산시는 장의사를 시켜서 유골들을 수습하고 인근 밭을 매입하여 가매장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경남대학교 고 이상길 교수는 현장을 방문하여 주민들을 탐문하였다. 그 결과 여양리(산태골)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과 부역에 동원된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1950721~26일 사이 진주방향에서 트럭 4대로 실려 온 보도연맹원들이 집단학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철저히 사전조사를 실시하고 20045월 경남대 고고학연구팀과 사학과 동아리인고인돌멤버, 그리고 대학원생 중심으로 발굴단을 조직한다. 발굴단은 국민의 인권과 생명은 이데올로기가 없다. 발굴된 유해를 백골이나마 유족 확인 후 돌려주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발굴을 착수하였다. 그는 발굴을 진행하는 한편 유해와 유품의 신원확인 단서와 가해자를 가릴 수 있는 증거 수집에 주력하였다. 여양리 집단학살 지점에서 163구의 유해와 유품을 공개하였다. 탄피와 탄두는 모두 M1 소총의 것으로, 이를 통해 가해자가 어떤 신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났다. 첫째 폐광(동굴) 입구가 완전히 봉해져 가해자가 은폐하고자 하였다. 둘째 매장 시설과 유해의 배치상태로 볼 때 동원된 주민들이 묘를 만들었다. 셋째 매장지 내에서 근접사격이 있었다. 즉 확인 사살이다. 넷째 학살자는 트럭 4대 중심으로 180~200(1대에 40~50명 탑승) 정도이며, 가해자는 쓰리쿼터 1(20명 내외 탑승, 지휘차량)와 동원된 30~50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다섯째 집단사살 3곳 지점(숯막, 너덜겅, 폐광)과 매장지 등 모두 7개소에서 유해가 발굴되었다. 발굴은 200453일부터 630일까지 이루어졌다. (2)

 

 

사진 2 여양리 폐광 바로 앞에 있는 돌무지(3호기) 발굴현장에서 경남대 고 이상길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 2 여양리 폐광 바로 앞에 있는 돌무지(3호기) 발굴현장에서 경남대 고 이상길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여양리 발굴 후 이 교수의 유해 봉안 문제 고심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양리 유해 발굴을 마친 후 고 이상길 교수는 유해의 봉안을 위해 고심하게 된다. 유해는 지속적인 정리와 보존, 그리고 유족 확인을 위한 DNA 채취와 검출까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임시 안치하기로 하였으나, 박물관에는 그럴 만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결국 묘안을 내어 컨테이너를 박물관 인근 학생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곳에 갖다 놓고 보관 관리하였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그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특히 유해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유해를 단순히 유해로만 인식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증거자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식 있는 역사학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으며,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양심의 소치이기도 하다.

 

 

사진3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지 발굴에 헌신을 다한 고 이상길 교수의 생생한 모습(왼쪽 3번째)
사진3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지 발굴에 헌신을 다한 고 이상길 교수의 생생한 모습(왼쪽 3번째)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에서 여항리가 최초였으므로 그는 자신이 발굴 수습한 그 자리에 안치소와 추모공원을 조성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몇 차례 진주유족회에 자신의 뜻을 전하면서 일곱 가지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유해 안치에 대한 고 이상길 교수의 일곱 가지 의견]

첫째 자연재해로 인해 유해가 드러난 것은 의미가 매우 큰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결국은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여양리의 유해는 뜻하지 않게 노출된 것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둘째 그곳은 최초의 유해 노출지이며 발굴지이고 수습지이다. 또한 그분들이 마지막 돌아가 신 곳이기도 하며 지금까지 묻혀있던 곳이다.

셋째 그곳은 피아가 가장 격렬하게 대치했던 최전선이었으며 한국 현대사와 한국전쟁사에서 차지하는 매우 각별한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넷째 좌우의 이념이 충돌한 전장이었으며 돌아가신 분들 역시 좌우의 갈등을 한몸에 지고 가신 역사적 희쟁자로 봄이 타당하다.

다섯째 경상남도의 거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경남의 어느 곳에서도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여섯째 옛날 진주와 마산을 잇는 주요 도로변이었으며 현재는 사람의 접근이 어려우나 사실 을 은폐한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인 지형과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일곱째 특히 폐광의 경우 입구를 밀폐해서 흔적을 없애려는 흔적이 역력하여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수범이 되는 사례가 될 것이며, 여러 형태의 주검과 무기사용 흔적이 있어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의견을 두고 유족회와 이 교수의 협의가 진행 중에 마산시는 가매장지를 매입하여 묘지 조성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교수와 유족회는 매장과 화장을 적극 반대하였다.(3)

 

 

 

사진4 눈물과 한으로 한평생 살아온 전 진주유족회 강병현 회장의 슬픈 모습이다.
사진4 눈물과 한으로 한평생 살아온 전 진주유족회 강병현 회장의 슬픈 모습이다.

여양리 발굴 유해는 어떻게 고향 진주로 오게 되었을까?

2004630일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는 경남대학교에서 근 10여 년 가까이 보관 관리하고 있었다. 경남대 측은 201312월경 컨테이너에 안치한 유해가 습기도 차고 학내 공원 조성 문제도 겹쳐서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진주유족회 측에 인계하는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마산시에서는 경남대에 안치되어 있는 유해의 처리 문제를 고심한 결과 발굴현장 인근에 가매장했던 땅을 매입하고 진주유족회 측에 그곳에 묘지 조성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진주유족회 측은 유전자를 채취하기 전에는 매장이나 화장은 불가하며, 만약 가매장을 하였다가 유전자 채취를 위하여 다시 발굴한다면 이는 망자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라 생각해 묘지 조성을 거절하였다. 또한 행정안전부와 진주시 측에 유해 안치소 마련에 대한 요청과 동시에 다방면으로 안치소를 물색하였다. 이런 와중에 마산시와 창원시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예산편성이 그대로 이월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2014128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결성되어, 첫 발굴 예정지가 진주 명석면 용산리 산241-1로 결정된다. 진주유족회 측에서는 진주시와 행정안정부가 여양리 발굴유해의 안치소 설치에 대한 뽀족한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던 차에 용산고개 산 주인과 논의한 결과 발굴지 아래에 컨테이너를 설치하여 임시 안치소로 결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 전에 이상길 교수는 유해의 진주 귀향을 보지 못한 채 2012년 유명을 달리하였다.

 

 

사진 5 현재 명석면 용산리 산417-2 임시 안치소 유해들의 모습. 안식처만 기다리고 있다. (262구)
사진 5 현재 명석면 용산리 산417-2 임시 안치소 유해들의 모습. 안식처만 기다리고 있다. (262구)

필자가 다녀온 여양리 발굴지

필자는 2014년부터 발굴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한 관계로 마산 여양리 발굴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동안 자원봉사활동를 하면서 여양리 발굴지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마침 2021912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관들이 진주 발굴지 방문을 하게 되어 세 분의 조사관과 진주유족회 회원 세 분과 함께 필자도 동행하게 되었다. 차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와 함께 여양리로 출발하였다. 국도 2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1029번 도로로 들어섰다. 달리는 차장 밖에는 초가을 벼들이 고개를 숙일 듯 말 듯 한 들녘과 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한참(10리길)을 굽이굽이 달려서 여양리(산태골)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니 아주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으로 느껴졌다. 교수님께서는 2012423일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맞으며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어디쯤일까? 두리번거려진다. 그의 운명 장소로 선택할 만큼 여양리 발굴장에 대한 애정과 고심이 깊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복잡한 생각 속에 발굴지를 향했다. 입구부터 무성한 풀밭으로 뒤엉켜 있었는데 유족분들이 지혜롭게 낫을 가지고 오셔서 풀을 쳐주면서 길을 터 주셨다. 앞장선 유족분들을 따라 가파른 산으로 1킬로미터 정도를 올라가니 돌무지들이 계곡을 끼고 보인다. 처음에는 애기 묘지인 줄 알았다. 발굴지를 찾는데 이쪽으로 바라보니 저쪽인 듯, 저쪽에서 바라보니 이쪽인 듯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유족들은 발굴할 때 사흘이 멀다 하고 다녀셨다고 한다. 하지만 발굴한 지 17년이 지난 곳이라 지형도 바뀌어 어디인지 잘 찾지 못하고 그날을 되새기고 계셨다.

이리저리 한참을 올라가니 회장님이 여기다! 하며 외친다. 가까이 가보니 폐광 입구다. 그리고 주변에 너덜겅과 숯골, 돌무지 등 집단학살지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발굴한 흔적이 여기저기 조금씩 남아있다. 천막을 친 곳이 평평하게 남아있고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발굴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교수님과 발굴단이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발굴을 했구나! 잠시 발굴 현장 모습을 상상해본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교수님 음성과 이리저리 발굴에 혼신을 다하셨던 모습이 선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움이 밀려왔다.

발굴지 현장을 살피고 촬영한 후 다시 되돌아 내려오면서 누구를 위해 가해자들은 총부리를 갈겨서 피맺힌 절규를 뒤로 한 채 산태골을 유골의 밭을 만들어 놓고 침묵과 은폐를 하고자 했는가! 유기의 세월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역사와 진실은 숨 쉬고 있다는 것, 여양리는 역사와 진실이 밝혀진 교훈의 장이 되었다. 그 장에 우뚝 선 분이 바로 고 이상길 교수이다. 당신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어갈 것을 다짐하며 여양리 역사의 장을 뒤로 하였다.

 

 

사진 6 여양리(산태골) 굽이굽이 깊고 깊은 학살지길.
사진 6 여양리(산태골) 굽이굽이 깊고 깊은 학살지길.

 

사진 7 여양리 학살지 입구.아름다운 산하 골짜기에 붉은 피로 물들었든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구나!
사진 7 여양리 학살지 입구.아름다운 산하 골짜기에 붉은 피로 물들었든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구나!

이번 여양리 발굴지를 돌아보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고 이상길 교수님이 헌신을 다해 발굴을 마무리하면서 내놓은 일곱 가지 의견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또한 발굴지 입구에 표지판 하나도 없어 최초의 민간인 학살지 발굴한 곳의 의미가 무색하게 되었다. 경남대에서 10년간 보관하고 있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2014219일 경남대학교와 경남도청 앞에서 노제 행사를 한 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417-2에 무사히 안치되었다.

진주시는 조례에 걸맞게 차후 시굴 및 발굴 비용을 장기적으로 예산 편성하여 눈물과 한으로 살아온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것을 기대한다. 유족들의 요구에 핑계나 외면하는 태도는 진실을 은폐한 가해자와 다를 바가 있겠는가! 유족들도 고령이라 남은 일생에 국가의 폭력에 참혹하고 억울하게 당한 부모, 형제가 안락한 곳에 안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열의를 다 할 것을 촉구한다. 진주시는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할 것이다. 5회부터는 유해 발굴 현장의 생생한 모습 그리고 학살지의 특징과 참혹하고 처절한 사연을 전하고자 한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 자원봉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1차부터 12차까지 계속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 자원봉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1차부터 12차까지 계속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1)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보고서”, 경남대학교 박물관, 2004104.

(2)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보고서”, 경남대학교 박물관. 2004104.

(3) “백골의 귀향, 1차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2014219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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