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필자가 2018.2. 아산시 배방읍(설화산) 폐광 발굴장에서 발굴하는 모습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리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한국전쟁 전후 진주지역 민간인 학살지는 모두 24개소에 달한다. 그중에서 8개소를 발굴하였고 이번에 소개할 발굴지는 명석면 3개소(1차,4차,11-1차)이다. 3개소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은 아래 표와 같다.

 

 

▶ 먼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공동조사단) 출범되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들이 아직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고 있다가 2007~2009년까지 1기 진실∙화해위원회(이하:진화위)가 실태조사와 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국가적 책무인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7개 시민사회단체의 후원금으로 2014년 ‘공동조사단’이 출범하게 된다. 공동조사단은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를 제1차 발굴지로 선정한다. 그때부터 필자는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인연을 맺게 된다.

 

▶ 공동조사단이 제1차 발굴지를 진주시 명석고개(용산치)로 선정한 이유는

현재 전국유족회 중에서 진주유족회가 전국에서 가장 잘 운영되고 있다. 그 이유는 강병현 전 유족회장이 9년간 헌신적인 노력으로 밑거름이 된 덕분일 것이다. 강 회장은 발굴단장 박선주 교수와 만나서 구체적인 대화도 나누면서 진주는 시굴(주1)도 마쳤고 바로 발굴만 시작하면 발굴 성과의 확률이 99%라고 전한다. 공동조사단은 시민사회단체의 후원금으로 발굴을 시작했기 때문에 시굴 비용이 들지 않고 원하던 바를 얻을 수 있는 지역으로 명석고개를 제1차 발굴지로 선정하게 된다.

 

▶ 제1차 발굴지와 인연이 시작되다.

제1차 발굴지는 진주지역 희생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서 용산일대(일명 용산치) 3개의 골짜기 5군데에 718구가 매장되었다. 발굴지점은 진주에서 산청 가는 3번국도 용산고개에서 왼쪽 골짜기를 따라 200m 올라가면 정수장 바로 건너 개울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발굴은 2014년 겨울의 끝자락인 2월 24일에 시작하였고, 매일 오전 8시에 시작하여 5시에 마쳤다. 필자는 첫날부터 제자와 함께 발굴단의 간식으로 절편(떡) 한 박스를 준비하여 발굴장으로 향했다. 초보인지라 흙 나르고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유해에 익숙해지기를 통해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유해가 드러나는 것을 보는 순간 인간은 사상과 이념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이분들에게 이념이 무엇이고, 국가가 무슨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념이 목숨보다 소중하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었다. 발굴단 중에 키가 훤출한 분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보였다. 궁금해서 여쭤보니 멀리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자원봉사 차 오신 것이다. 발굴장에서 이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무실 천막치기와 뒷간 그리고 길을 만드는 것이다. 뒷간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베어와서 난간을 걸치고 사방에 기둥을 세워서 갑바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이런 궂은일을 웃는 얼굴로 솔선수범하였다.

 

⟪제1차 발굴 때 사연 하나 소개하면⟫

어느 날 발굴을 마치고 내려온 뒤 오후 6시경 타지역에서 위로차 발굴장에 몇 분이 방문한 일이 있었다. 물론 발굴현장에는 작은 천막과 시설들이 있긴 했지만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찾기가 쉽지 않다. 도로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발굴지가 있는데 방문객은 아무리 찾아도 사람과 인기척이 없어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뒤돌아서 내려오는데 계곡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아 저쪽인가 보다 하고 건너편으로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조금전에 들렸는 웅성거리는 사람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컨테이너 박스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날씨는 흐리고 어둠이 깔린 골짜기는 찬바람까지 낯을 할키고 지나갔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하면서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두려움에 발도 떨어지지 않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도로가로 내려와서 전화를 하니까 모두 발굴을 끝내고 내려왔다고 하였다. 그 사연을 전해들은 전 유족회 강병현 회장은 억울한 영혼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필자는 유해발굴을 다니면 이런저런 사연을 자주 듣게 되면서 귀신이나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제4차 공동조사단이 다시 명석고개로 오다

공동조사단은 제2차(2015년) 발굴은 대전 골령골로 향했고 제3차(2016년) 발굴지는 홍성군 광천읍에서 마치고 다시 3년 만에 진주 명석고개를 다시 찾았다. 전국유족회에서 서로 발굴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진주 용산고개를 지정한 이유는 강회장이 유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간절히 요청하여 2017년 2.24 제4차 발굴이 시작되었다. 제4차 발굴지는 제1차 발굴지에서 100m정도 아래쪽이며 지금의 컨테이너가 놓여 있는 곳 바로 위쪽에 위치한다.

발굴지에 항상 먼저 오시는 구자환 영화감독이 이번에는 드론으로 발굴장을 촬영하고 있다. 구 감독은 ‘민간인학살사건’영화만 3편(레드툼, 해원, 태안)을 제작하신 분이다. 그러나 이런 영화는 수입이 거의 없어 공공기관에서 상영해주지 않으면 아주 힘들다. 그래도 20년을 넘게 이 일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드론을 샀으니 참 대단한 열정이다. 구 감독과의 인연도 7년이 넘어가고 있다. 지금은 진화위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월급 모아서 그동안 영화에 쏟아부은 빚을 갚을 거라고 한다. “힘내세요 구자환 감독님!!”

 

⟪제4차 발굴 때 가슴 아픈 사연 하나 소개하면 (사진5)⟫

제4차 발굴에서 개체수가 정확한 유해는 박스에 넣어서 위령제 지내고 컨테이너에 안치한다. 이번 발굴은 지형에 수분이 많고 자연재해로 인하여 유해들이 많이 훼손되고 교란이 되어 사지(四肢)뼈 조각들이 많이 나왔다. 그것을 어떻게 하나 보았더니 안경호 국장님이 구덩이를 사각으로 파고 그 속에 화선지로 싼 유해 조각을 넣고 고이 묻었다. 그리곤 흙을 덮고 꼼꼼이 발로 눌려서 발았다. 돌을 여기저기서 가져와 세우니 ‘자그마한 돌비석’이 되었다. 그곳에 깍듯이 절을 하고 마무리했다. 다른 유해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쉽고 가슴이 아팠다. 5년이 지났는데 이 자그만 돌비석은 아직도 있을까!! 한번 찾아가 봬야겠다.

 

▶제11-1차 발굴지로 향하여 (왜 11-1차인가 (공동발굴단 발굴(✖), 부경대 발굴단(○))

2021년 5월 5일 제11-1차 명석면 관지리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번 발굴 비용은 경상남도에서 지원한 것이다. 유해 노출이 시작되면서 완전 개체는 거의 나오지 않고 교란된 상황이라 두개골이나 상지골 보다 하지골을 중심으로 발굴이 되었다. 또한 발굴지 하단 부분에는 과거 묘지를 조성하려던 흔적이 발견되고 구덩이를 파기 위해 시도가 있었고 돌이나 흙을 통해 메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해발굴 자원봉사를 왜 하는가!!⟫

필자는 역사교사로 근무할 때 국사책에 한국전쟁은 수록되어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내용은 전혀 수록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암흑의 역사도 중요한 역사이기”때문에 현장에서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발굴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르고 국가의 폭력에 죽어간 영혼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도 있다. 유해발굴은 힘들때만 있는게 아니다. 보람 있을 때도 있다. 그것은 흙을 파도 파도 나오지 않던 ‘유해가 순간 옅은 갈색빛으로 불그스름한 나무줄기처럼 생긴 모양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며 드러날 때이다. 특별한 유품도 마찬가지다. 유해 발굴자만이 느끼는 희열이며 온통 심신을 유해에 쏟게 되는 순간이다. 희생자들이 “어둡고 무서운 공포 속에서 학살되어 70여년 만에 빛을 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족분들이 발굴장에 와서 발굴된 유해를 보고 아구 저 뼈 한조각이 혹시 아버지가 아닐까 싶어 뚜렷이 쳐다보고 계실 때 더욱 열심히 발굴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역사의 진실은 꼭 밝혀진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끝으로 고 이상길교수님이 유해발굴에 대한 못다하신 뜻을 조금이나마 이어받고 싶다.

 

▶제11-1차 발굴을 마무리하면서

항상 유족이 제문을 읽으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11-1차 유해 발굴은 봉안식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용산 고개 학살지와 관지리 학살지에서 희생된 두 분 유족의 애환의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연1) 용산고개에서 학살된 아버지 강종호(희생자)의 아들 강○○의 증언

1950년 6월 18일(음력)경 아버지는 진주고보(진주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퇴하고 잠시 인쇄소에 근무하다가 진주중앙시장에 세를 얻어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장날에 외사촌 부부가 찾아와서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외사촌 부부와 함께 집에 들어왔다. 잠시 몸을 씻고 있는데 군인 두 명이 총을 들고 들어와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끌고 갔다고 한다. 어머니와 외사촌이 왜 이러냐고 했더니 ‘보도연맹’으로 조사 끝나면 보낸다고 했지만,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위⟫(주2) 활동과 보도연맹에 가입한 죄로 요주의 인물 로 낙인찍혀 제일 먼저 총살 당했다.

 

▶아버지의 활동 내용을 살펴보자

아버지 20살 때 결혼하여 1남 1녀 낳았고 진주시 평안동 237번지에서 살았다. 잡혀갈 당시 아들 강○○은 1살이고 누나는 4살이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권유로 건준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건준위는 몽양 여운형(주3) 선생이 해방 전에 해방이 될 것을 예상하고 해방 후 정국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전국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이런 훌륭한 단체에 가입하여 ⟪서북청년단⟫(주4)과 싸움도 하고 살벌한 전투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숙들이 아버지의 건준위 활동을 극구 반대하면서 너는 가장이고 가정을 돌봐야 한다고 타일렀다. 결국 아버지는 동의했지만,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정도 사회활동을 했다면 당시로서는 지식인 계급에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남겨진 고모 두 분의 운명!!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삼대독자의 책임을 다하였다. 큰고모(달순)는 시집보내고 작은고모(종순)는 도립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오빠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고 나날이 울면서 지내다가 작은고모는 인민군이 들어오자 곧 인민군으로 입대하여 간호사로 종사하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월북하여 소식이 두절되었다. 아무 죄없이 착하고 성실하였으며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던 오빠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해버린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로 인민군으로 자원입대한 것이다. 그리고 시집보낸 큰고모는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도저히 괴로웠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라고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집을 나가버렸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남강에서 자살한 것이다. 오빠를 부모처럼 의지하고 믿고 살았는데 갑자기 학살당하니 그 충격을 어디에 비할까. 오죽 괴로웠으면 생을 마감할 생각까지 했을까!! 부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저세상에서 편안히 쉬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강○○의 일생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나 걸리고 강○○을 업고 학살지를 갔더니 구덩이에 시체가 가득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오뉴월이라 시신 썩는 악취가 진동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시신을 뒤지기면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중앙시장에서 노점상으로 겨우 생활하였다. 어느 날 주위 권유로 누나와 강○○이를 잘 돌봐주고 대학까지 공부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임○○와 재혼한다. 강○○ 7살 때이다. 의부는 누나와 강○○에게 잘해주었고 두 오누이는 마산 진동에 있는 태봉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집에서 근 10리 떨어져 있었지만, 주변에는 저수지, 산,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 등 경치가 좋아 그 시절이 유년기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한다.

의부가 풍수 일로 출타하면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동생(임○○)이 밤새 경기하다가 병원도 못 가고 손을 쓸 수도 없어 그만 죽고 말았다. 의부가 집에 돌아와서 자기의 친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자식이 죽은 것은 우리 아버지 귀신 때문이라고 누나와 강○○을 외가집으로 보냈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니 새끼 니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키워야 한다’ 고 하면서 다시 어머니께 돌려보냈다. 그 길로 의부는 누나를 남의 집 가정부로 보내고 강○○은 고아원에 보내버렸다. 고아원에서 강○○은 초등학교를 거쳐 낙동중학교에 입∙졸업하고 국립소년직업훈련소를 졸업하고 26살 때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서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항시 ‘세월 잘못 만나서 그랬제 너그 아버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강○○은 사실 그동안 사회적 분위기가 험악한 때라 아버지 원망도 많이 하고 어머니가 아버지 말씀하시면 제대로 귀담아듣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빨갱이라 혹시 자식한테 피해 줄까 호적에도 혼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강씨 문중에서도 친인척들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아버지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지금은 부산에서 외식업을 한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성공하신 것을 들으니 필자의 마음이 아주 기뻤다.

 

▶사연2) 관지리에서 학살된 백갑흠의 딸 증언자(백○○)

아버지(당시27세)는 1950년 6월 11일(음력) 명석면 관지리(산173번지)에서 학살되었다. 당시 집은 학살지에서 20km정도 떨어져 있는 동전부락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밭에서 일하던 중 면에 오라는 연락 받고 면사무소로 갔으나 그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가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할아버지가 듣게 된다. 할아버지는 소 한 마리를 팔아 목돈을 마련하여 진주형무소에 감금된 아들을 구하고자 면회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하고 형무소 옆 둑에 잠시 앉아있었다. 그때 마침 군용트럭이 지나가는데 아버지가 트럭에 앉아있는 모습이 언듯 보였다. 순간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봤는지 몸을 돌려버렸다고 한다. 트럭은 마침 아버지 동네 근처 관지리에 도착하였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쳐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그 소리를 들은 동네 어르신이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그럼 아버지는 보도연맹원에 미가입자인데 왜 잡혀갔을까!!⟫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직접 가입을 하지 않았다. 잡혀간 사연은 따로 있었다. 동네 이장의 아버지와 할아버니의 논이 아래위로 있었는데 가뭄이 오거나 모내기를 할 때는 물로 다툼이 허다했다. 당시 물을 대주지 않는다고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고 결국은 서로 말도, 인사도 안 하고 지냈다고 한다.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이장이 아버지에게 도장이 필요하다고 하여 줬더니 ‘보도연맹 가입 서류’에 도장을 찍어버린 것이다. 이웃 간에 서로의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의 허락도 없이 도장을 함부로 사용한 이장은 고약한 사람인 듯하다. 그러니 아버지가 잡혀갔을 때 억울하다고 소리지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아버지의 시신을 찾은 기적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재랑 함께 그 골짜기를 찾아갔다. 관지리 학살지는 붉은 피로 물들어 난장판이 되어 계곡을 타고 핏빛 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고 한다. 시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아도 냄새와 악취 그리고 파리떼로 인하여 숨도 쉴 수가 없는 상태에서 낯익은 혁대 하나를 발견한다. 아버지는 평소에 고모부의 혁대가 좋아 보인다고 빌려 차고 다녔다. 마침 그 혁대가 할머니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결국 혁대 때문에 아버지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소리를 치고 발버둥을 쳤던지 머리에 총을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재가 바지게에 시신을 담아 지게에 지고 20km 거리를 걸어서 집에 도착하여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집 뒷산에 고이 무덤을 만들었다.

 

필자는 증언자가 현재 운영하는 ○○○캠핑장을 찾아가서 백○○와 사촌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갔다. 71년이 지난 무덤은 잔디 하나 없이 헐거벗은 모습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한편 시신이라도 찾아서 자식한테 참배라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유족들의 대부분은 희생자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는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이 험하고 추석에도 풀이 많아 찾아뵙지 못했는데 덕분에 찾아뵐 수 있어서 다행이고 고맙다고 했다. 필자도 희생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고 묘비가 있다기에 꼭 한번 뵙고 싶었다.

 

▶남겨진 어머니와 딸 (백○○)의 일생

당시 어머니는 백○○를 임신한 9개월 만삭의 몸이었다. 와중에 군인은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가 어디 있냐고 어머니 가슴에 총부리를 대고 위협하였다. 그 후 남편이 학살되자 매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삼촌은 이곳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모든 전답을 처분하여 부산으로 이사 갔다. 부산에서 집과 쌀장사를 할 수 있는 가게를 얻었다. 그 집에서 어머니는 삼촌의 가족과 백○○를 키우면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내 며느리 내 며느리 하면서 잘해주셨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백○○를 두고 도망갈까 걱정되었고, 손녀를 고아라는 소리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한평생 남편의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와 끔찍한 세월을 가슴 깊이 묻고서는 유일한 자식인 백○○에게 돌아가실 때까지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험난한 고통을 어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할머니보다 일찍 49세의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남편을 따라 떠났다.

한편 증언자 백○○는 어머니와 삼촌의 보살핌에 자랐다. 선명여중을 다녔지만, 어느 날 할아버지가 ‘니는 공부할 필요가 없데이’하면서 등록금을 주지 않아서 결국 중퇴하고 말았다. 백○○는 결혼하여 살다가 어느 날 남편이 ○○(주)에 기술자 시험을 봤지만, 점수는 높았는데 불합격되었다. 이유가 궁금하여 자세히 알아보니 아버지의 연좌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8여년 전 우연히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동네에 위치한 모교가 폐교된 것을 알게 되어 폐교를 임대하여 ○○○캠핑장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가 학살당한 곳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 가까이 있으니 마음이 푸근하다고 한다. 세월은 무심하지만 약인 듯하다. ‘백○○ 유족님 힘내세요.’

 

▶나가면서

유족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대변하고 해결해주는 기관은 2기 ‘진실∙화해위원회’이다. 하지만 이 기관에만 맡게 둘 순 없는 일이다. 2021년 조규일 진주시장의 추모탑 건립 약속은 큰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진주시는 올해도 발굴경비 예산을 책정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고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공유하는 것은, 비단 유족들만의 몫이 아니고 지자체와 시민들도 뜻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보도연맹”이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 자원봉사자는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1차부터 11-1차 계속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 자원봉사자는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1차부터 11-1차 계속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주⟧

(주1) 유해발굴을 하기 위해서는 이론조사와 증언을 종합하여 사전에 시험적으로 지형을 파보는 것을 말한다.

(주2)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는1945년 8월 15일부터9월 7일까지 한국의 군정기에 여운형,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총독부에 5개 항을 요구하며, 치안권 요구)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한반도 남부에는 여운형과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한반도 북부에는 조만식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줄여서 건준위(建準委)이라고도 부른다. 후에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었다.

(주3) 일제강점기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했던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본관은 함양, 호는 몽양으로 1919년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후 해방에 대비하고자 1944년 조선건국동맹,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우합작위원회를 설립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

(주4) 1946년 이북에서 남하한 이북의 각도별 청년단체들의 통합체로 결성되었다. ‘서북청년회’의 성격은 철저한 극우단체로서 우익의 선봉에 서서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전위 행동부대로서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

(다음달 9회 계속)

 

 

※ 본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2차 가공 없이 출처(김영희/전직교사)를 밝히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