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이와 꽃분이가 대문간을 향해 마구 짖었다. 누군가 집에 찾아온 것 같아 밖으로 나가니 이장과 마을수도를 관리하는 젊은이가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이구, 이장님께서 어쩐 일이세요.” 슬리퍼를 껴신으며 황급히 문간으로 나갔다. 수도관리 젊은이는 뭔가 장부 같은 것을 들고 이장 곁에 엉거주춤 서있었다.

, 석봉씨. 왜 있잖아요. 우리 군에 항노화 산삼엑스포 축제하는 거.”

그렇죠. 그거 한다더만. 코로나 3단곈데 하긴 하는 건가?”

인원 통제하고, 일부는 비대면으로 한다네요. 그래서 거기 소망등을 거는데 군민 이름으로 세대별로 1만원씩에 소망등을 거는데 석봉씨도 걸어야지.”

축제에 소망등을 거는데 10,000원을 내놓으라는 거였다. 나는 안 걸겠다고 했다. 당연히 걸 거라고 여겼는지 이장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는 듯했다. 막 이름을 적으려던 수도관리 젊은이도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두서너 해 전부터 엑스폰가 뭔가 한다고 온갖 일 벌려 돈을 물 쓰듯 해온 군청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군민 호주머니까지 털려는 행정이 못마땅해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다.

오후에 골목 평상에 나갔는데 단연 그 돈 10,000원이 화제였다. “아침에 이장이 왔더라고. 돈 만 원 내라더라고. 뭐 하는데 내라고 해 내긴 냈는데 뭐한다고 돈을 걷어간 거야?” 박샌댁이 영남아지매를 향해 물었다.

산삼축제 하는데 등을 건다더마.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그냥 줘버린 거지.” 영남아지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앗따. 아지매는 돈도 많은가 봐. 돈 만 원을 그냥 줘버리고.”

그냥 줘버리는 게 마음이 편해. 어쨌든 내고 말 걸.”

나는 안 냈는데요. 그런 돈을 왜 내요? 고지서 날아오는 세금만 내면 되지.”

나는 왈칵 속이 상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의례 이리 생각할 걸 뻔히 알면서 소망등 만 원을 걷으러 다니는 행정이 못마땅해서였다.

도시 살 때는 잡부금이란 게 없었다. 그저 세금고지서가 나오면 그 고지서 들고 은행에 나가 납부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누가 돈을 걷으러 다닌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 산골은 달랐다. 내야 할 잡부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녀회는 기금을 마련한답시고 미역과 다시마를 팔러 다녔다. 집에 미역과 다시마가 쌓였어도 주민이라면 누구나 다 사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녀회의 다시마와 미역을 안사는 집은 단 한 집도 없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취소되었지만 해마다 8.15 경축일에 면민축구대회가 열렸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이장과 새마을지도자가 운동장 차양 아래 버티고 앉아 장부를 들고 기부금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마을방송을 통해 누가 얼마를 냈다고 발표를 하니 안 낼 도리가 없었다.

처음 몇 해는 나도 그 기부금을 냈었다. 그러다 그렇게 모은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불확실하다는 판단이 들면서 안 내기 시작했고, 운동장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가 동네이웃 어른들 손에 하나씩 쥐어주는 것으로 기부금을 대신했다.

마을회관을 새로 지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고 안 내고는 자유라면서 기부금을 걷었지만 안 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이십만 원은 기부금 축에도 들 수 없었다. 대개 이삼십만 원이었고, 많게는 백만 원이나 내는 주민도 있었다. 경로당과 부녀회와 노모당은 그동안 모아둔 회비를 몽땅 기부하기도 했다.

잡부금 가운데 가관인 것은 반장 사케였다. 우리 마을은 마을이 커 예부터 1, 2, 3반으로 행정 소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이장은 행정에서 일정 정도 활동경비를 지급받지만 반장은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마을주민들이 봄가을에 만 원씩 반장 활동비를 내는데 그걸 반장 사케라고 불렀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수도요금도 잡부금 성격이었다. 수돗물을 공급받으면 당연히 내야 할 요금이지만 마을 상수도는 조금 다르다. 지하수를 개발해 마을 위 물탱크로 모아 공급하는데 필요한 경비는 펌프모터를 가동하는 전기요금이 거의 전부였다. 그 전기요금도 행정에서 상당 부분 보조를 하기에 실제 드는 전기요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군청에서 마을 상하수도 관리업체를 지정해 두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업체가 달려와서 다 해결하기에 특별히 관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임의로 수도요금을 정해 주민들로부터 걷어 들인다.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걷는데 그 금액이 상당한데도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지난 상반기 우리 집과 보름이 카페와 집을 합쳐 수도요금은 십이만 원이 넘었다.

경로당에 가면 경로회비. 노모당에 가면 노모당 회비가 있다. 노인복지예산으로 경로당 난방비와 점심식사 비용은 어느 정도 지원받지만 따로 회비를 걷었다. 이 회비도 내고 안 내고는 자유라지만 한 푼도 안 내고 어찌 경로당 노모당을 맘 편케 드나들겠는가.

이런 잡부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가 궁금했다. 해마다 연말이면 동회를 열어 마을재정을 공개하지만 그게 그리 투명하지가 않았다. 얼마나 걷어 어디에 얼마를 쓰고 나머지 돈은 어떻게 관리되는지 주민들조차 알려 하지도 않았다.

서너 해 전 연말 동회를 할 때였다. 한 장짜리 마을경비결산보고서가 나왔다. 마을경비라고 해봐야 별스러운 항목이 있으랴 하며 훑어보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적십자회비와 불우이웃돕기성금이었다.

연말이면 지역 텔레비전방송에 연례행사로 나오는 것이 불우이웃돕기성금 모금방송이었다. 저녁뉴스 끝자락에 그날그날 성금모금 현황을 전해주는데 시골 마을회와 경로회 이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산골 마을이 도움을 받아야지 누굴 돕고 자시고 할 처지도 아니면서 뭔 불우이웃돕기성금을 내고 그런대요?”

왈칵 화도 나고 짜증이 나서 한마디 툭 던졌다. 동회에 모인 주민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뭔 소리냐는 눈빛이었다.

아따, 우리 마을 이름이 텔레비전에 나오잖아.” 맞은편에 앉은 경로회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받아넘겼다. 주민들은 그려, 그려라며 머리를 주억거리는 듯했다.

그저 그러려니, 많이 하는 대로만 따라가면 돼.”

바로 곁에 앉은 서 씨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럴 때마다 마을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 후회스러웠다. 나도 차라리 건너편 언덕에 외따로 집을 지어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이 있는 삶을 선택했지만 살아오는 과정에서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못하고 따질 수도 없는 이웃들과 마을에 섞여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마을 외곽에 별장처럼 집을 지어 귀촌한 가구가 스무나뭇이나 되었다. 대동회가 열려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에서도 그들을 주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잡부금을 내지도 않았고, 부녀회는 미역이며 다시마를 팔러 가지 않았다.

노인네들 호주머니 긁어모아 불우이웃돕기성금을 내든 말든, 적십자회비 얼마를 내든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마을일일 뿐이었다. 면민축구대회가 열리는 운동장에 나타나지 않아도, 마을회관신축경비모금에 참여하지 않아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마을은 이렇게 운영되었다. ‘마을자치를 강조하며 행정은 마을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법을 어겨도 누군가 고소고발을 하지 않으면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 마을 행정이다.

마을 입구에 범죄 없는 마을이라고 새겨진 빗돌이 서 있다. 누구도 고소고발을 하지 말라는 듯, ‘범죄 없는 마을에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듯 위세를 뽐낸다.

외지인이 들어와 마을 수도관을 연결할 때 오백만 원을 받아야 해.” “들어온 지 이십 년 이상 안 되면 주민으로 인정하면 안 돼.”

동회에서 공공연히 이런 말이 오간다. 오직 토박이들 자치행정이다. ‘인구 늘리기지역소멸이라는 용어가 참 허황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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